러시아로 기우는 조선…일본, 민비 시해하다
러시아로 기우는 조선…일본, 민비 시해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2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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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라 고로 공사, 을미사변의 주범…3국간섭 이후 국제고립 피하려는 수단

 

청일전쟁(1894~95)에서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동양에서 일본의 지배력이 커지는 못마땅하게 생각한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동원해 일본을 견제하게 되니 3국간섭이다. 일본은 전쟁의 대가로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게 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일감정이 가득차 있던 조선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러시아의 위력을 높이 평가하고 일본을 멸시하는 풍조가 눈에 띠게 나타났다. 눈치 빠른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일본군에 의해 훈련시킨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했다.

3국간섭은 조선에 서양열강이 일본과 동등한 조건의 지분을 요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들은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을 찾아가 일본에게만 이권을 배분하지 말라고 항의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부부는 수시로 궁궐 연회에 참석해 고종과 민비의 조언자가 되었다. 일본으로 볼 때는 다 된 밥에 콧물 떨어뜨리는 셈이었다.

왕실은 18957월초 친일파 거두로 지목된 박영효(朴泳孝)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박영효가 고종과 민비를 거세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제보가 전달되었고, 고종은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체포명령을 내렸다.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신변보호를 요청한후 일본 배를 타고 도망쳤다. 박영효는 후에 자신의 역모 혐의의 부당성을 고종에게 호소했으나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망긴자 이틀후인 79일 고종은 대신회의에서 이제까지의 칙령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뤄진 것이므로, 짐이 친정하겠다고 밝혔다. 곧이어 갑오경장 때 취해진 각종 제도개혁, 신법령을 재검토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명성황후 /위키피디아
명성황후 /위키피디아

 

조선에서 형세가 몰리자 일본은 조선주재 공사를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서 군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로 교체했다. 미우라 공사가 부임한 것은 91일이었다.

미우라가 부임한지 한달 후 민비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미우라는 국제정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 민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하수인을 동원해 실행한 것이다.

미우라는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의 사장 아다치(安達)와 낭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6천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았다. 일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여 작전을 개시했으니, 이른바 여우사냥이다.

그들은 또 명성황후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을 참여시켰다. 대원군은 당시 지금의 마포 동도공고자리에 있었던 아소정(我笑亭)에 있었는데, 일본은 그를 끌어들여 사건이 탄로날 경우 그를 배후조정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1895년 음력 820, 양력 108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날이다. 역사가들은 그날의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 이라고 한다. 한 나라의 왕비가 침략자의 창검에 참혹하게 살해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태워진 날이다.

장소는 경복궁 건청궁(景福宮 乾淸宮). 이 곳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곳이다. 그 시각 민비는 건청궁 안의 곤녕합(坤寧閤)에 머물고 있었다.

그날 새벽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와 일본의 낭인무리들은 서대문에서 조선훈련대와 합류해 광화문에 이르렀다. 훈련대 연대장으로 1중대 병력으로 왕궁호위를 맡았던 홍계훈을 칼로 쳐 죽이고 군부대신 안경수마저 죽이고 경복궁에 난입했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도 일본의 칼에 죽으니 세자(후에 순종), 힘없는 궁녀, 민비만 있었을 뿐이었다. 세자를 밀쳐내고 민비를 찾아 수차례 칼로 난자했다. 그들은 시체를 녹산에서 태우고 경회루에 재를 뿌렸다.

 

민비 시해자들이 한성신보사 앞에서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
민비 시해자들이 한성신보사 앞에서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

 

그날의 기록을 조선왕조의 정사 조선왕조실록은 어떻게 정리했나. 고종실록32년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20, 묘시에 왕후가 곤녕합에서 붕서하다.

822, 왕후 민씨를 서인으로 강등하다.

823, 왕태자가 상소문을 올리다. 폐서인 민씨에게 빈()의 칭호를 특사하다.

국모가 일본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서인으로 강등되고, 왕세자(후에 순종)가 상소문을 올려 간신히 빈()이라는 하위등급을 지켰다고 했다고 실록은 기록했다.

군왕이자 남편인 고종이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일본이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서인 조치하도록 하고 자신들은 뒤로 숨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그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1995820일자 승정원일기에 조선왕의 비서들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오전 세시가 지날 무렵, 일본인이 두 명의 훈련대원과 함께 갑자기 곤녕합에 들어와 순식간에 변란을 일으켰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곤녕합 대문 밖에서 살해되고 연대장 홍계훈도 광화문 밖에서 살해됐다.” (是日寅正後, 日人與二訓鍊隊, 突入坤寧閤, 變起創卒, 宮內府大臣李耕稙, 遇害於坤寧閤楹外, 聯隊將[聯隊長]洪啓薰, 遇害於光化門)

 

민비 국장 /위키피디아
민비 국장 /위키피디아

 

구한말에 조선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벌인 미국인 호러스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18511921)가 자신의 체험을 정리해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쟁이들과 함께한 15)란 견문록을 냈다. 그는 명성왕후와 친밀한 관계였는데, 그의 저서에서 당일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184~189p)

미우라 고로 /위키피디아
미우라 고로 /위키피디아

 

“189510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 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 것도 알수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 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임금에게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대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말을 하였다. , 일본인 장교 휘하의 군대가 대궐 마당과 왕족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것,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일본인 소시’(낭인)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 닥쳤다. ……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 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를 덮어 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 와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서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원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엿고 뼈 몇줌만이 남았다.“

 

일본은 사건 직후 자신들의 범행을 부정했다. 일본 언론은 민비 시해를 고종이나 대원군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왜곡 보도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였던 일본인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건현장에 있던 미야모토 소위와 마키 특무조장은 사건 한 달여 뒤 본국으로 소환된 뒤 참고인 조사를 대충 받았고, 다시 19개월 후에 타이완 헌병대로 발령났다.

사변의 총책임자로 지목된 미우라 고로 공사를 비롯해 일본인 56(군인 8, 민간인 48)은 사건 3개월여 만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사이자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사변이었지만, 일본은 유야무야로 결론짓고 말았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에 민비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복궁 건천궁 /문화재청
경복궁 건천궁 /문화재청

 

명성왕후 시해사건에 등장인물이 여럿이다.

홍계훈은 사실 영화와 뮤지컬 드라마에서 명성황후의 호위무사로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다. 그는 동학농민 항쟁을 진압한 공을 세웠지만 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관군의 힘으로 진압할 수 없다 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청군을 끌어들여 청일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어쨌든 이 일로 고종의 총애를 받아 훈련대 대장에 임명되었고 임오군란때 군인들이 궁궐에 난입 명성황후를 죽이려고 할 때도 지켜 궁궐 밖으로 피신토록한 사람이다.

시위대장 홍계훈이 일본 낭인들에 맞서 명성황후를 막기 위해 몸을 던져 헌신했다면, 일본의 편에서 함께 궁궐에 난입한 훈련대 대대장이 있었다. 우범선이다. 씨없는 수박을 만든 종묘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다.

이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외국인이 있었다. 퇴역 미국장교 다이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다. 사바틴은 독립문, 러시아공사관, 경운궁의 정관헌, 제물포의 여러 양관을 설계한 근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들의 증언이 아니었으면 사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민비 시해에 사용된 히젠도 /한선생 제공
민비 시해에 사용된 히젠도 /한선생 제공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絶命)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칼 히젠도(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쿠시다 신사에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새겨져 있다. 히젠도는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칼로 전쟁용 무기가 아닌 애초에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120, 칼날 90의 칼이다.

이 칼을 누가 이곳에 두었을까? 1908년 토오 가츠아키(藤勝顯)가 신사에 기증했는데 그는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침입한 세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사건 이후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사찰에 이 칼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 살기가 너무 짙은 칼을 절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신사에 보관시킨 것이다.

 

장충단비. 비문은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썼다. /김현민
장충단비. 비문은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이 썼다. /김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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