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 보호국 요청하던 고종, 칭제건원하다
러시아에 보호국 요청하던 고종, 칭제건원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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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만 챙기는 러시아에 실망, 1년만에 환궁…황제국 대한제국 선포

 

1896211일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러시아에게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 격이었다. 러시아는 총 한방 쏘지 않고, 외교적 노력을 한번도 기울이지 않은 채 왕실의 반일 감정의 결과로 조선의 임금을 손안에 넣게 된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처음에 이 귀중한 보물이 행여 튀쳐 나가지나 않을까, 일본이 뺏어가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게 다뤘다.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 공사는 처남의 처형인 앙투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으로 하여금 서양 식사를 고종에게 대접하며 비위를 맞췄다. 베베르는 유사시에 러시아 황제가 조선을 도울 것이라고 약속했고, 고종은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러시아 공사관은 이 불로소득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조선을 다뤘다. 곧바로 친러 정부를 수립하지도 않았다. 되도록 내정 개입의 흔적을 보이지 않으려고 친미파들로 정권을 구성하도록 모양새를 갖췄다.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포살령(捕殺令)으로 김홍집(金弘集) 등이 백성들의 손에 타살된 후 김병시, 이재순, 박정양, 조병직, 이완용 등 친미파로 내각이 구성되었다. 러시아의 이같은 태도는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친러파의 수뇌인 이범진(李範晉)은 나중에 기용되었다.

 

고종의 피신과 김홍집 친일내각의 붕괴에 일본은 처음엔 충격에 빠졌다.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공사는 천자(天子)를 빼앗겼으니 만사는 끝이 났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일본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의 간을 보기 시작했다.

아관파천 후 일본은 러시아가 곧바로 조선을 보호국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러시아가 극동에 배치한 군사력이 소수에 불과하고 조선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유럽쪽 병력이 대서양을 건너서 돌아와야 한다는 약점을 간파했다.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해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 중에 있었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였다. 일본은 러시아가 육로지원이 어려운 상태에서 쉽사리 전쟁을 벌이기 어렵다고 정세를 판단하게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동시에 조선반도에서 러시아와 타협책을 모색했다. 모두를 잃지 않고 절반이라도 건지겠다는 술책이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것이 조선주재 공사들간의 협약이다. 아관파천 3개월후인 515일 고무라와 베베르 사이에 각서가 체결된다. 그 내용은 고종의 환궁을 권고한다 온건한 인물로 내각을 구성한다 일본의 전신선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일본군 주둔을 허용한다 일본군에 상응하는 러시아군을 주둔시킨다는 것이었다.

고무라-베베르 각서는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하되, 일본의 기득권도 보장하며 조선에서의 충돌을 막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또 이 밀약은 러시아 공사가 조선을 지켜주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고종도 모르게 러-일 양국의 이해관계를 절충한 게 된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皇帝御璽) /문화재청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皇帝御璽) /문화재청

 

그해 6월 러시아에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이 열렸다. 청국에서는 이홍장(李鴻章), 일본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조선에서는 민영환(閔泳煥)이 파견되었다. 러시아는 세 나라 대표를 따로 만나 서로를 속이며 외교 농간을 부렸다.

러시아는 이홍장을 융숭하게 대접했다. 러시아는 이홍장이 수에즈 운하에 도착했을 때부터 기선을 보내 환영하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장식물을 선사하고, 50만 루블이나 되는 뇌물도 줬다. 로마노프 외무대신은 이홍장을 만나 청이 일본의 공격을 받을 경우 상호원조한다는 공수(攻守)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하는 만주의 동청(東淸) 철도를 건설하려는 의도였다. 이홍장은 흡족해 하며 동의했다.

로마노프는 곧이어 야마가타와 만났다. 야마가타는 대동강과 원산을 잇는 북위 38°를 경계로 조선을 분할하자는 안을 제안했는데, 로마노프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에 로마노프와 야마가타는 서울에서 양국 공사 간에 이미 체결된 고무라-베베르 각서를 추인하는 의정서를 맺었다.

러시아는 민영환도 극진히 대접했다. 니콜라이 황제를 접견하고 외무대신 로마노프, 재무대신 비테를 만났다.

민영환은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삼아 달라고 요구했다. 민영환이 65일 러시아 외무성에 전달한 사항은 고종을 호위할 러시아 군대 파견 다수의 군사교관 파견 고문관 파견 3백만엔의 차관 제공 조선~러시아간 육상 전신선 가설 등이었다. 이중 고종이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은 고종 호위병의 파견과 차관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앞서 청국-일본과 비밀 협약을 맺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거절했다. ·일 비밀 협약에는 양국이 단독으로 군사지원을 할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러시아는 대신에 군사교관만 파견하겠다고 했다. 민영환은 실망했다. 민영환은 좌절해 숙소에 두문불출하면서 러시아 지원이 끊긴다면 결딴이 났다며 비관론에 빠졌다고 한다.

 

환구단의 석고 /김현민
환구단의 석고 /김현민

 

고종은 러시아의 애매한 태도에 실망했다. 고종은 가장 신임하던 베베르의 현란한 말솜씨에 속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는 일본의 눈치를 보며 조선을 보호국화하지 않고 이권에 개입했다. 러시아는 압록강변 삼림채벌권을 획득하고 스위스계 러시아 상인 J. 브린너에게 이권을 주었다. 그는 헐리웃 영화배우 율 브린너(Yul Brynner)의 할아버지다. 러시아의 삼림채벌권은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200만 에이커에 달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러시아는 또 부산 절영도에 석탄창고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이 무렵 막 설립된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이권개입에 반대하며 고종의 환궁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드디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것을 결심했다. 1997210, 외국 공사관에 체류한지 1년을 꼬박 채우고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경복궁에는 민비 시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환궁한지 며칠 후, 일본은 러시아와 체결한 의정서의 비밀조항을 조선정부에 통보해 조선과 러시아 사이를 이간시켰다.

이제 고종은 믿을 곳에 없게 되었다. 청국은 일본에 패해 조선에서 발을 뺏고, 일본은 그냥 싫고, 러시아는 믿을수 없었다. 임금은 이제 믿을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힘 뿐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팽팽한 긴장을 평화로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이기기 위해 군비 확충의 시간을 벌고 있었고,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뚫리길 기다리며 우선 만주에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2차적인 문제였다. 잠시의 평화는 폭풍 전야의 고요함일 뿐이었다.

 

환구단의 황궁우 /김현민
환구단의 황궁우 /김현민

 

고종은 신하들을 부추겼다. 이때 나온 것이 칭제론(稱帝論)이다. 조선의 군주가 일본의 천황, 중국의 천자와 동등한 지위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고종의 환궁이 있은지 3개월째 되던 18975, 승지를 지낸 이최영(李㝡榮)이 처음으로 칭제건원(稱帝建元)의 상소를 올렸다. “오늘날 자주 독립의 시대를 만나서 조서와 칙서로서 이미 황제(皇帝)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아직도 군주(君主)의 지위에 있습니다. 군주와 황제는 바야흐로 지금 천하에 통용되는 규례이므로 ……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속히 판단을 내리시어 천도(天道)가 순환하는 이치를 헤아리시고 황제라는 크게 보배로운 자리에 임어하소서."

이어 재야 유생들이 같은 상소를 올리고, 원로대신 임상준(任商準)도 뒤이어 칭제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상소를 받고 불가하다고 거절했다.

고종은 민비의 장례를 네 번이나 연기했다. 반일감정을 고조시키면서 자신이 황제가 되면 왕비의 존호도 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환구단(圜丘壇)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임금의 눈치를 알아챈 신하들은 연이어 상소를 올렸다. 원로대신 김재현(金在顯)716명이 연명한 대규모 집단 상소가 올라왔다. 930일 의정 심순택(沈舜澤)이 현직 대신들을 대동해 고종에게 칭제를 공식적으로 촉구했다.

9번이나 고사하던 고종은 마침내 103일 칭제를 수락하는 비답을 내렸다.

칭제에 대한 반론도 많았다. 최익현(崔益鉉), 유인석(柳麟錫) 등 척사파들은 소중화(小中華)의 나라에서 칭제는 망자존대(忘自尊大)라며 비판했다. 윤치호(尹致昊)와 같은 신지식인은 한 나라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나라의 힘이지 군주의 존호가 아니다. 외국 군대가 왕궁을 유린하고 국모를 살해하는 마당에 황제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임금은 귀에 좋은 소리만 들었다.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했을 때 들었던 소심함을 감추려는 듯, 고종은 대담하게 황제 칭호를 받아들였다.

 

18971012일 고종은 중국 천자가 입는 황룡포(黃龍袍)를 입고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다음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고종황제는 조선(朝鮮)이란 국호는 선대왕들이 500년간 사용해 은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태조 때 국호를 정할 때 명나라로부터 추인을 받는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꾀해야 하는 지금에서는 취할 것이 못된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 다음으로 우리민족이 많이 사용한 호칭이 한()이라 하면서 이를 새기는 호칭으로 대한제국을 제안해 신하들로부터 절대적 찬성을 받아냈다. 고종황제는 중국과의 전통적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크게 의식했다.

 

대한제국 황제의 황색 곤룡포 /문화재청
대한제국 황제의 황색 곤룡포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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