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 대한제국 중립국론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 대한제국 중립국론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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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러일전쟁 직전에 중립화론 추진…열가의 무관심으로 실패

 

고종의 칭제건원에 사대부들이 건의상소를 올리고 지지한 것은 중화론의 연장이라는 시각이 있다. 송시열(宋時烈)을 이어받은 사대부 주류들은 조선이 한···명의 정통을 이은 소중화(小中華)로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시점에 중화의 천자를 이어받을 호기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독립협회 등 개화세력들은 청국이 패하기 전부터 칭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독자성을 강조해왔다. 서로 다른 견해에서 출발했지만 여러 의견을 수렴하며 고종은 18972월 칭제와 대한제국수립을 단행했다.

 

황제에 오른 고종은 대한제국이 영세중립국으로 자리 잡기를 희망했다. 1902년 중립국인 벨기에와 국교를 수립한 것도 당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스위스·벨기에의 중립국가 모델을 본받아 중립외교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고 외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시기에 대한제국이 설 위치가 중립국이라 보았던 것이다.

 

대한제국 군대 /위키피디아
대한제국 군대 /위키피디아

 

중립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조선인은 개화파 유길준(兪吉濬)이었다. 그는 1885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 중국 주도의 중립화가 러시아 남하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목구멍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벨기에와 같으며, 국제적 지위로는 터키의 속국인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 중립화는 유럽 열강이 러시아 남하를 막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 중립은 유럽 강대국들이 상호간 자국 보호를 위해 나온 것이다. …… 이를 우리가 먼제 제창할수 없으니, 중국이 주창자가 되어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 등에 요청해야 한다.”

비슷한 시기에 청국이 조선에 보낸 외교자문관 묄렌도르프(Paul G. von Möllendorff)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조선의 중립화를 추진했다. 그는 러시아가 조선을 벨기에처럼 중립화를 추진할 것을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 헤르만 부들러(Hermann Budler)18853월에 청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과 관련국들이 이상적으로 살수 잇는 방법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국·러시아·일본이 주선의 중립화를 영원히 보장흐는 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일본 외교관들도 청국의 조선 지베시기에 중립화론을 꺼내들었다. 일본의 군사전문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일본과 중국이 주도하고 영국과 독일이 주선하는 조선의 중립화를 주장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중 하나인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일본··미국·영국·독일의 다섯 나라가 조선을 하나의 중립국으로 삼아 벨기에·스위스의 예에 따라 타국으로부터 침략받지도 않는 나라로 함께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882년에 일본 외무성 당국을 통해 청과 미국에 타진을 시도했지만, 유야무야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했 소식을 들은 서울의 외국인들 모습을 그린 프랑스 잡지의 삽화 /문화재청 대한제국 기획총서 캡쳐
1894년 청일전쟁 발했 소식을 들은 서울의 외국인들 모습을 그린 프랑스 잡지의 삽화 /문화재청 대한제국 기획총서 캡쳐

 

청이 조선반도에 주도권을 쥐던 시절에 조선 중립화론은 청이 조선의 속국 상태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주장에 그쳤다. 고종황제가 10여년후 러시아와 일본이 대결하는 시기에 중립화론을 다시 꺼내든 것이다. 이 시기의 배경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대륙세력에 청을 대신해 러시아가 등장하고, 해양세력인 일본의 외교적·군사적 역량이 보다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고종은 주한 미국공사들에게 여러차례 미국 정부가 대한제국 중립화를 제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1899년봄, 알렌 공사(Horace N. Allen)가 미국으로 출발할 때 고종은 미국이 주도해 열강에 의한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불개입 원칙을 견지했다.

또 고종은 중립화를 추진하기 위해 189910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윌리엄 샌즈(William F. Sands)를 궁내부 고문으로 초빙했다. 샌즈는 한국을 스위스·벨기에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열강과 평화조약이나 국제협약 체결을 추진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시건이 터지고 서구열강과 일본이 출병하면서 청나라가 분할 위기에 놓이자 고종은 그 다음 차례가 조선이 될 것을 우려해 중립화를 더 집착했다.

고종은 조병식(趙秉式)을 주일공사로 파견해 한반도 중립화안을 추진케 했다. 그러나 한반도 중립화안에 관심을 두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 외상은 스위스·벨기에가 중립을 유지할만한 국력을 갖추고 있지만, 대한제국은 그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병식의 제의를 거부했다. 조병식은 주일미국공사를 만나 미국 정부가 열강과 협력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의 국제적 보장을 위해 노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버크 공사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이 고조되자 고종은 몸이 바짝 달았다. 주일 공사관을 통한 중립화 추진이 무산되자, 고종은 유럽에 직접 전권대사를 파견했다. 19013월 이범진을 러시아 공사로, 민영찬을 주프랑스공사로 파견했다. 또 독일과 오스트리아 공사에 민철훈, 영국과 이탈라아 공사로 민영돈을 파견했다. 외교관을 보낼 국비가 모자라 고종은 왕실의 내탕금으로 지출해 유럽 외교에 힘썼다. 미국이 중립화에 거부의사를 보이자 유럽에 매달린 것이다. 그러나 유럽 열강들은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일본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 한반도에 어느나라도 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은 1902년에 일본과 동맹을 체결했기 때문에 한반도 중립화안을 지지할수 없는 입장이었고, 프랑스는 러시아를 지지했으므로 대한제국 중립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독일은 러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가 전쟁이 휘말려 자국 국경의 부담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었다.

1902년 영일 동맹 체결 협상이 진행될 때 영국 외상은 일본의 하야시 공사에게 :조선을 중립상태로 하는데 여전히 불만족인가라고 물었다. 그때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는 조선 중립화 불가의 이유로 조선인은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고, 열국에 의한 중립을 보장한다 해도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내란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藝) 일본공사의 고종과 민비 알현도 /문화재청 대한제국 기획총서 캡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藝) 일본공사의 고종과 민비 알현도 /문화재청 대한제국 기획총서 캡쳐

 

고종이 19013월에 벨기에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고종은 1902년에 벨기에 국왕에게 자신의 중립화안을 설명하고 이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벨기에 국왕은 대한제국이 벨기에처럼 영세중립국이 되는 것을 찬성한다는 회답을 보내왔다. 고종은 이에 용기를 얻어 프랑스·독일·이탈리아·미국에 같은 안을 제의했지만, 독일만이 검토 의사를 표명했을 뿐, 다른 나라들은 그 제안을 접수조차 하지 않았다.

 

열강이 아무도 한반도 중립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자 고종은 국제회의 참여를 추진했다. 물에 빠진자, 지푸라기도 잡는 법이다. 국제회의의 기초인 만국공법을 따르면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이란 기대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고종은 그해 19025월 벨기에 공사의 도움을 얻어 박제순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케 했다. 또 주프랑스 및 벨기에 공사인 민영찬에게 네덜란드 소재 만국평화회의 사무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지시했다. 190212월 스위스 정부에 적십자회 가입에 대한 국서를 보내 19031월 가입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회의 활동이 한반도 중립화 논의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결국 고종의 한반도 중립국 추진은 러시아·일본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일 전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나름 중립외교를 취하려 했다. 결국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전쟁 발발 직전인 19041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그 선언도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대한제국 시절 1903년 서울의 전철 /위키피디아
대한제국 시절 1903년 서울의 전철 /위키피디아

 

중립화 논의외 별도로 조선 분할론도 대두되었다.

조선 분할의 시초는 아관파천후 조선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이 강화되자 1896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침석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러시아측에 조선반도를 북위 38°에서 분할해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이 차지하는 방안을 제의했지만, 러시아 외무장관이 거부했다.

그후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에 만선교환론(滿鮮交換論)을 제의할 것을 주장했다.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하고, 조선은 일본이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조선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선교환론은 무산되었다.

고종은 중립국화가 힘을 전재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태국이 제국주의 시대에 베트남을 차지한 프랑스와 버마를 삼킨 영국 사이에 독립을 유지했는데, 그것은 영국-프랑스가 태국을 완충국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마 2차 대전때 일본이 베트남을 차지하고 버마를 공격할 때 태국은 일본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과 만주에 대해 한치 양보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선의 중립국화는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나고 말았다.

 

 


< 참고자료 >

코리아-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배기찬, 2005, 위즈덤하우스, P 256~258

고종의 중립화정책, 왜 실패했나, 현광호, 문화재청 대한제국 기획총서, P 71~87

고종시대의 리더십, 오인환, 2008, 열린책들, P 380~384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오카모토 다카시, 2009, 소와당, P 170~175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덕주, 2004, 에디터, P 29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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