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시베리아 철도, 바이칼호를 페리로 건넜다
초기 시베리아 철도, 바이칼호를 페리로 건넜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2.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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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베리아 철도 건설전에 러시아와 전쟁 개시…경부선 공사 서둘러

 

극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격돌은 철도경쟁으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유럽 지역에 인구와 산업, 부가 몰려 있어 새로 개척한 극동지역에 인원과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다. 일본도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도를 건설해야 러시아와 맞설수 있었다. 그리하여 속도전을 펼친 것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이며, 대한제국에서의 경인·경부선 철도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28일은 시베리아 철도가 준공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철도가 놓이기 전에 시베리아는 황무지나 다름 없었다. 유럽 러시아에서 극동러시아로 건너오려면 수십개의 개의 강을 건너고 삼림지대를 지나야 했다. 겨울철에는 말이 이끄는 썰매로 눈더미를 헤치며 이동해야 했다. 1840년대에 오브강에 증기선이 도입되었으나 그 지역의 사람과 화물을 실어나르는데 그쳤다. 1850년대에 이르쿠츠크-치타 철도건설이 논의되고, 아무르강(흑룡강) 철도 건설이 제안되었지만 막대한 비용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중국에서 할양받아 영토로 확보하면서, 러시아는 연해주 남단에 블리디보스톡 항을 건설하고 극동과 유럽러시아와 연결하는 철도망을 구상하게 된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한 황태자 시절의 니콜라이 2세 /위키피디아
일본 나가사키를 방문한 황태자 시절의 니콜라이 2세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철도가 본격화된 것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Nicholas II)의 황태자 시절이었다. 황태자는 1890~1891년 제위에 오르기 전에 세계일주에 나섰다. 그는 오스만투르크, 그리스, 인도, 싱가포르,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렀다. 일본에서 암살 위험을 겪기도 했지만 블라디보스톡에 무사히 도착해 육로로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그가 다닌 거리는 해로로 22km, 육로로 15km였다. 지구를 반 바퀴 돈 그는 극동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서두를 필요성을 절감했다.

황태자는 블라디보스톡에 들렀을 대 극동지역의 철도 착공을 지시했다. 그는 시베리아를 여행하면서 황량한 대지에 황제의 열차(tsar's train)가 주파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18913월 러시아 정부는 칙령으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공포하고 황태자를 건설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어 189411월 알렉산드르 3세가 사망하고 황태자가 니콜라이 2세 황제에 오르면서 시베리아 철도는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트레인 페리선 바이칼호 /위키피디아
트레인 페리선 바이칼호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철도는 유럽쪽과 극동쪽 양방향에서 건설되었다. 중간중간에 이미 깔려 있는 철도를 연결하면서 대역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많은 숙련, 비숙련 자유노동자와 시베리아 유형 죄수, 중국인이 가혹한 조건에서 건설공사에 내몰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한 철도는 1897년에 아무르 강변을 따라 하바로프스크를 연결했고, 유럽에서 출발한 철도는 1898년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호 연안에 도달했다.

최대의 난공사는 바이칼호 구간이었다. 호수 주변의 산세가 험악해 철로를 깔기 어려웠다. 공학자들의 결론은 바이칼호에 배를 띄워 열차를 이동시키는 방안이었다. 카 페리의 형식, 즉 트레인 페리(train ferry)가 만들어졌다. 페리는 영국에서 부품이 만들어져 이송되어 현지에서 조립되었다. 2척의 트레인 페리가 건조되었는데 바이칼호(SS Baikal)와 앙가라호(SS Angara). 바이칼호는 겨울에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깨고 운항할수 있도록 쇄빙선으로 만들어졌고, 기관차 1대에 열차 24대를 실었다. 앙가라호는 소형선이었다. 이들 배는 하루에 두 번 열차를 싣고 바이칼호를 건넜다.

바이칼호를 연결하는 트레인 페리가 1899년 건조를 마치고 투입되었고, 시베리아 철도는 1904년에 전 구간을 연결하게 된다.

유럽에서 극동까지 9,289km의 시베리아 철도는 당시나 지금이나 지구 둘레의 4분의1에 해당하는 세계 최장의 철도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1904년 러일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시베리아철도는 완벽하지 못했다. 바이칼호를 건너는 페리선은 겨울철에 얼어버려 움직이지 못했고, 단선철도였기 때문에 병력 이동 등 급한 인적·물적 수송이 있을 경우 마주보는 운행되는 열차는 며칠씩 기다려야 했다. 겨울철에는 철로 주변에 폭설이 내려 눈을 치우며 지나가야 했다.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위키피디아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극동 국경을 가로질러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를 병행해 놓았다. 치타에서 중국 하얼빈을 거쳐 연해주 우수리스크까지 연결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 Chinese Eastern Railway)는 아무르강변을 지나는 시베리아철도보다 구간이 짧아 효율성도 높았다. 이 철도는 청나라 영토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러시아의 만주 공략과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

러시아는 하얼빈에서 대련을 연결하는 남만주철도도 동시에 연결했다. 만주를 차제에 러시아 땅으로 만들 심산이었다.

 

동청철도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는 러사이의 코사크 기병대 /위키피디아
동청철도를 지키기 위해 경비를 서는 러사이의 코사크 기병대 /위키피디아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겨울에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한후, 부동항을 육로로 연결하는 철도 건설로 확대되었다. 동청철도는 1902년에 완공되었는데, 수시로 만주의 마적단이 공격하는 바람에 러시아는 철도 보호라는 명목으로 만주에 코사크 기병대를 주축으로 하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은 동아시아 패권을 노리는 일본과의 충돌로 이어지니, 바로 러일 전쟁(1904~1905)이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도중에 청나라 영토인 만주 공략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8978월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피서지에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빌헬름 2세는 독일의 동아시아함대 정박항으로 산동반도 교주만(膠州灣)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러시아 황제의 의견을 물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요동반도 여순(旅順)에서 압록강 지역에 집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황제가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러시아 황제는 이의가 없다고 말했다. 두 황제의 회담은 비밀로 붙여졌다.

교주만은 현재 산동성 칭다오(青島)에 있는 만()으로 예로부터 천혜의 항구였다. 그해 11월 독일 카톨릭 선교사 2명이 중국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해군은 곧바로 칭다오를 점령하고 청국의 굴복을 받아 식민지로 만들었다.

니콜리아 2세는 이때다 싶어 그해 1218일 여순·대련(大連)을 점령했다. 두 항구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점령했던 곳으로 러시아가 프랑스·독일과 함께 이른바 3국간섭(1895)을 통해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에 되돌려 주게 한 곳이었다. 요동반도 끝자락에 고구려의 비사성(卑沙城)이 있었던 그곳은 발해만 입구의 군사요충지였다.

중국이 항의했다. 서태후가 노발대발했다. 러시아는 이홍장(李鴻章), 장음환(張蔭桓) 등 청국 고위관료에게 뇌물을 주어 서태후를 설득하게 했다. 18983월 러시아는 청국과 여순·대련을 25년간 조차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만주를 종단하는 철도부설권을 얻었다. 러시아는 곧바로 여순항을 포트 아서(Port Arthur)라고 명명하고 여순함대를 배치했다.

 

1902년 여순항 /위키피디아
1902년 여순항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철도 동진에 맞춰 일본도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도 건설에 속도를 냈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어 러시아 군사력이 동북아시아에서 우위를 점하기 전에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꺽어야 한다고 판단해 군사력을 확충했다. 동시에 군사적 이동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인·경부선 철도 건설에 주력하게 된다.

우리나라 철도는 1899918일 노량진~제물포간 경인선 33.2km 개통으로 시작되었다. 원래는 미국의 철도상사 모스(James R. Morse)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경인선 부설권을 확보했지만 자금조달에 실패하자 일본이 모스와 교섭을 추진해 인수하게 되었다. 일본이 서둘러 경인선을 확보한 것은 인천항과 서울 간의 병참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경부선 철도는 일본이 부설권을 갖고 있었다. 1901년 영등포역에서 착공해 러일전쟁 중인 1905년 경성역~초량역(부산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원래는 네 개의 노선이 검토되었지만,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최단코스인 현재 노선을 선택했다.

일본은 서둘러 경부선과 경의선을 연결하려 했지만, 조선 철도의 완공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일본은 시베리아 철도가 연결되면 유럽쪽 러시아 본대가 철도를 타고 동진할 것을 우려해 대역사가 완공되기 직전에 전쟁을 벌이게 된다.

 

현재의 시베리아 철도 구간 /위키피디아
현재의 시베리아 철도 구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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