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③…최후승자 김씨
신라초기 왕족 3성의 권력갈등③…최후승자 김씨
  • 아틀라스
  • 승인 2019.04.1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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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김씨와 연대해 박씨, 석씨 견제…말기에 박씨에 3대 넘겨줘

 

초기 신라의 3()의 왕족 가운데 김씨 집단은 소백산맥 남쪽의 경북 영주를 발상지로 하고,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 괴산, 보은, 소백산맥 이남의 상주, 문경을 세력권으로 했다. 진흥왕때 충주를 국원(國原)’이라 부르며, 소경(小京)으로 삼아 서라벌의 귀족자제와 육부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국원은 나라의 들판이라는 뜻으로, 김씨 세력의 유서가 깊은 곳을 의미한다. (강종훈 저 신라상고사 연구)

유례에 이어 이사금에 오른 기림이 김씨 세력의 영산으로 보이는 태백산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300) 석씨 임금이 김씨 세력과의 유대를 형성하려는 의지의 반영으로 보인다. 김씨 세력의 힘이 커지면서 석씨 집단도 박씨 집단도 김씨 세력의 부상을 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마침내 내물 이사금의 등극으로 김씨 왕조가 이어졌다.

석씨는 16대 흘해 이사금을 끝으로 신라 왕조사에서 막을 내린다. 박씨는 앞서 8대 아달라 이사금을 끝으로 석씨에게 왕권을 내주었다가 오랫동안 왕조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728년후 신덕, 경명, 경애왕 315년간 박씨가 신라의 명맥을 있는다. 마지막 56대 경순왕은 김씨로, 고려 왕건에 나라를 들어 바쳤다.

내물왕 이후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김씨 족단은 가야 김씨와 연대를 형성한다. 두 김씨는 연대를 형성해 박씨, 석씨를 제압하게 되는 것이다.

 

경주 교동의 내물왕릉 /문화재청
경주 교동의 내물왕릉 /문화재청

 

신라 김씨 왕가도 가야 김씨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동족임을 알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 한다고 했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首露)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금관국 구해왕의 증손인 김유신과 신라 왕족의 김씨가 한 뿌리임을 밝힌 대목이다. 신라 김씨 세력은 금관국을 합병하면서 가야 김씨를 대거 영입해 김씨 세력을 확장하는데 활용했다.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 사이 결혼도 성사됐다. 신라 김씨들은 처음에 가야 김씨와의 결혼을 꺼렸지만, 결국은 허락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舒玄)의 결혼 이야기에서 그런 흐름을 읽을수 있다.

 

처음에 서현(舒玄)이 길에서 입종(立宗) 갈문왕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결합했다. 서현이 만노군(萬弩郡) 태수가 되자 만명과 함께 길을 떠나려고 했다. 숙흘종이 그제야 자신의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딸을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했다. 그러던 갑자기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지자 지키던 사람이 놀라 어찌할 줄을 모르는 틈에, 만명은 구멍으로 빠져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서현이 만명과 결혼함으로써 가야 왕족과 신라 왕족이 친족 관계로 결합하게 됐다. 김유신도 여동생 문명(文明)을 나중에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에게 보내 2대에 걸쳐 두 김씨 왕족이 혼인 동맹을 맺는다. 김유신은 나중에 김춘추의 셋째딸을 아내로 맞는다. 흉노족의 유습이다.

 

경남 김해 수로왕릉의 가락루 /문화재청
경남 김해 수로왕릉의 가락루 /문화재청

 

김유신은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해져 왕의 반열에 올랐다.

구해왕의 아들 중 무력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전투에 참여해 대승을 거두고, 그 일대에 새로 만든 주(신주)의 행정통관을 맡는다. 무력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베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손자 김유신은 잘 알다시피 삼국 통일이 선봉장 역할을 했다.

신라의 김씨 왕조는 박씨, 석씨와의 치열한 권력 투쟁 과정에서 미추왕을 거쳐 내물왕 이후 지속적으로 왕권을 장악했다.

신라 김씨족단은 박씨와 석씨가 연합할 경우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새로운 연합세력을 찾는데, 그것이 가야 김씨였다.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의 결합은 종족의 동질감을 넘어 왕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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