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국왕, 노정객 마하티르에 뒤통수 쳤다
말레이시아 국왕, 노정객 마하티르에 뒤통수 쳤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0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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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헌군주가 총리 지명한 드믄 사례…마하티르 “과반 지지 얻었다” 반발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한 연방국이다. 13개주와 3개 연방직할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13개 주 가운데 9개 주가 별도의 왕을 두고 있다. 각 주의 왕을 술탄(sulta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에 따라 라자(Rajah)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는 9주의 왕들이 모여 연방 국왕을 뽑는데, 이를 '양 디-페르투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이라고 한다. 우리가 말레이시아 국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바로 이 연방 국왕이다.

따라서 말레이시아에서 주의 왕은 세습직이지만, 연방 국왕은 선출직이다. 연방 국왕의 임기는 5년이며, 9개주의 술탄 또는 라자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현재의 말레시이아 연방국왕은 20191313일 등극한 압둘라 국왕(Abdullah Sultan Ahmad Shah)으로 파낭(Pahang) 주의 술탄 출신이다.

말레시아는 연방제와 동시에 영국식 의회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왕은 의전 행사에서 국가수반으로 위세를 드러내지만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서 국왕의 권한은 막강하다. 연방국왕은 술탄이 통치하지 않는 4개주의 주지사를 임명하고, 또 연방직할령의 통치권을 통치한다. 또한 내각이 붕괴되었을 때 총리를 임명할수 있다.

 

압둘라 국왕과 마하티르 전 총리 /위키피디아
압둘라 국왕과 마하티르 전 총리 /위키피디아

 

이번에 말레이시아 국왕이 음모와 배신, 분열과 이합집산으로 얼룩진 내정에 개입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 전 총리가 내던진 사표를 수리하고, 새 총리를 지명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치권은 물론 해외 언론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개명천지의 21세기에 입헌군주국에서 새 총리를 지명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국왕은 새 총리로 말레이시아원주민연합당(PPBM) 소속으로 부총리를 역임한 무히딘 야신(Muhyiddin Yassin)을 지명했고, 야신은 1일 총리에 올랐다.

 

무히딘 야신 신임 총리 /위키피디아
무히딘 야신 신임 총리 /위키피디아

 

사건의 발단은 멀리 2년전으로 소급된다. 20185월 총선에서 마하티르는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과 연대해 15년만에 총리에 대시 오르게 된다.

마하티르는 1981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22년간이나 총리를 역임하면서 말레이시아의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장기독재를 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가 물러난 후 나집 라작(Najib Razak)이 총리에 올라 장기 집권하면서 마하티르는 정치권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마하티르와 안와르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라는 집권당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총리와 부총리를 지냈지만, 1997년 아시아를 휩쓸고 간 통화위기 해결과정에서 이견이 노출되었다. 경제 부서를 쥐고 있던 안와르는 서구식 자유시장주의를 채택했고, 마하티르는 조지 소로스와 같은 유태계 음모자들에 의해 말레이시아 경제가 무너졌다며 대외폐쇄 정책을 고집했다. 두 사람의 정책갈등은 권력갈등으로 변질되어 안와르는 변태성행위 혐의로 투옥되어 10여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 두 철천지 원수가 라잡 총리를 잡기 위해 정당연합을 구성해 이긴 것이 2년전 5월 총선이었다.

안와르 이브라힘 /위키피디아
안와르 이브라힘 /위키피디아

 

당시 총선 직후에 마하티르는 2~3년만 하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다. 안와르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기다렸다. 2년이 지나자 안와르는 마하티르에게 총리 자리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지구상 2백여개 국가 수반 중에 가장 나이가 많다는 94세의 노총리는 자신이 총리를 더 할 요량으로 안와르와 결별하려 했다. 마하티르는 결국 안와르와 정당연합을 구성한 희망연대라는 조직에서 탈퇴해 다른 정당과 연합을 모색했다. 72세의 안와르도 의석 과반수를 얻기 위해 여려 정당에 손을 내밀었다.

집권 연립정부의 분열을 돌파하기 위해 마하티르는 초강수를 던졌다. 그는 지난 24일 총리직 사직서를 국왕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의원들과 정당 지도자들을 만나 자신의 지지를 호소했다.

 

말레이시아에서 국왕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다. 1994년 개헌에서 연방군주의 권한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그 개헌안도 당시 총리였던 마하티르가 추진해 만든 것이었다.

대다수의 말레이시아인들, 정치분석가들은 국왕이 총리의 사직서를 반려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파낭주 술탄 출신의 압둘라 국왕의 태도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국왕이 이틀에 걸쳐 의원 222명 전원을 불러 면담을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각주의 술탄들도 불러 회의를 했다.

그래서 국왕이 내린 결론은 현재의 집권연합도 아니고, 마하티르도 아니고, 과거의 집권당에서 사람을 골랐으니, 그 사람이 바로 1일 취임한 무히딘 야신 총리다.

 

야신 신임총리는 말레이족·중국화교·인도인 등 다인종으로 구성된 말레이시아에서 다수 종족인 말레이족 우선주의(Malay First)를 주장하는 인종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연방국왕이 그를 새 총리로 지명한 것은 술탄이란 군주제가 이슬람과 말레이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치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또 마하티르가 각주의 술탄과 연방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과 법안을 입법하면서 군주들과 사이가 벌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국왕은 합의의 형식을 취했다. 모든 의원들을 만나 의견을 물었고, 주의 술탄들과도 상의했다.

야신이 차기 총리에 오를 것이란 소문이 돈 것은 228일 오후쯤이었다. 마하티르와 갈라섰던 안와르는 급히 마하티르를 지지한다고 돌아섰다.

하지만 다음날인 29일 국왕은 모두에게 최선의 결정이라며 야신을 지명했다. 그리고 하루후 31일 야신의 취임식이 열렸다.

마하티르는 분노했다. 그는 야신은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마하티르와 야신은 한때 라집 전총리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공동전선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마하티르도 안와르를 배신한 입장에서 그럴 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마하티르는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이 114명으로 과반(111)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야신은 의회(하원)의 투표로 총리에 임명되지 않고, 국왕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취약한 권력 기반위에 서 있는 상태다.

 

말레이시아 연방국왕은 태국 국왕처럼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지 못한다. 연방제 국가라는 단점도 있다.

말레이시아 정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번 정치 파동에서 국왕이 모처럼 권한을 행사했지만, 군주 결정이 국민주권의 대세 위에 있는지는 말레이시아가 선택해야 할 또다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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