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년전 고려 국왕의 국새는 어떤 모양일까
630년전 고려 국왕의 국새는 어떤 모양일까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3.0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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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왕 국새 찍힌 과거합격증, 고려 불교경전, 조선 백자 등 3점, 보물 지정예고

 

고려국왕의 직인은 어떻게 생겼을까.

문화재청은 630년 전에 발급된 고려 시대 과거합격증인 최광지 홍패’ 1점과 고려 후기 선종(禪宗) 경전인 육조대사법보단경’ 1책 그리고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1점 등 전적 2점과 도자기 1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이들 3건의 문화재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동안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최광지 홍패 /문화재청
최광지 홍패 /문화재청

 

최광지 홍패(崔匡之 紅牌)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문신 최광지(崔匡之)1389(고려 창왕 1) 문과 병과 제3(丙科 第三人, 전체 6)’으로 급제해 받은 문서로서, 630년 전 고려 말에 제작된 매우 희귀한 사료다. 홍패(紅牌)는 고려조선에서 발급된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합격증을 말한다.

홍패에는 '성균생원 최광지 병과 제삼인 급제자'(成均生員 崔匡之 丙科 第三人 及第者)'홍무 이십이년 구월 일'(洪武 貳拾貳年 玖月 日)라는 문장이 두 줄로 적혀 있으며, 발급연월일 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가 찍혀 있다.

고려국왕지인 /문화재청
고려국왕지인 /문화재청

 

이 과거합격증에 찍힌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1370(고려 공민왕 19) 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고려에 내려준 국새로, 조선 건국 후 1393(조선 태조 2)년에 명에 다시 반납되었다.

고려 시대 공문서에 이 직인이 찍힌 사례는 최광지 홍패가 지금까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 개국 직후인 1392(조선 태조 1)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李濟, ?~1398)에게 내린 이제 개국공신교서’(국보 제324)고려국왕지인이 사용된 사실이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고려 시대 홍패는 총 6점으로, 시기는 모두 최광지 홍패보다 빠르지만 관청에서 왕명을 대신해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문서의 형식과 성격 측면에서도 왕지(王旨, 왕명)’라는 문서명과 국왕의 인장이 찍힌 정황으로 보아 임금의 명령을 직접 실천한 공식문서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렇듯 왕명의 직인이 찍혀 있고 형식상 완결성을 갖춘 예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은 후대로 계승되어 조선 시대 공문서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최광지 홍패1276(고려 충렬왕 2) 부터 과거합격증에 왕지(王旨)’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처음 확인시켜 준 실물이다. 또한, 조선 시대 문서제도와 관련성이 밀접하다는 점에서 역사학술 가치와 희소성이 인정되어 보물 지정 가치가 있다.

충분하다.

 

육조대사법보단경(권수제) /문화재청
육조대사법보단경(권수제) /문화재청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1(64)으로, 1290(충렬왕 16)년 원나라 선종의 고승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가 편찬한 책을 고려 수선사(修禪社)에서 당시 제10대 조사(祖師)인 혜감국사 만항(萬恒, 12491319)이 받아들여, 1300(충렬왕 26) 강화 선원사(禪源寺)에서 간행한 판본이다. 현재 경상남도 사천시 백천사에 소장되어 있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혜능의 선사상을 이해하거나 선종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경전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간행되었으며, 백천사 소장본은 우리나라에 전래된 관련 경전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보이는 덕이본(德異本)’ 계열의 책들과도 판식(板式 또는 版式)의 차이점이 보여 고려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육조대사법보단경은 선종의 핵심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지침서이자 한국 선종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불경으로 불교사에서도 중요하며, 이 중 백천사 소장본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같은 종류의 경전 중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가치가 높다. 따라서 불교학 연구는 물론, 고려 시대 말기 목판인쇄문화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학술서지학 가치가 있다.

 

백자 항아리(정면) /문화재청
백자 항아리(정면) /문화재청

 

백자 항아리(부산박물관 소장)

부산박물관 소장으로,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며, 높이가 52.6cm에 이르는 대형(大形) 항아리다. 구연부와 어깨에 미세하게 금이 간 것을 수리했으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형태는 좌우가 약간 비대칭을 이루고 있으나, 자연스럽고 당당하며, 담담한 청색을 띤 백색의 유약이 고르게 발라져 전체적으로 우아한 품격을 나타낸다.

이 백자 항아리는 안정된 기형(器形)과 우수한 기법 등으로 보아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의 관요(官窯, 왕실 도자기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관요백자의 제작기술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자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백자 항아리 중 크기와 기법 면에서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백자 항아리는 50cm 이상 크기의 입호(立壺, 항아리 형태)로서의 희소성, 파손이나 수리가 거의 없었던 완전성, 비례가 알맞은 조형성과 정제된 유약, 번조(燔造: 도자기 굽기) 기법의 우수한 수준 등을 근거로 조선 시대 도자사(陶磁史)의 중요한 유물로 평가할 수 있으므로 보물로 지정해 연구하고 관리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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