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멸망과 기후변화①…환경 파괴로 재해 확대
신라멸망과 기후변화①…환경 파괴로 재해 확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0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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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인구 과밀로 삼림 훼손, 식용수 부족 초래

 

한반도를 통일하고 천년 왕국을 누렸던 신라가 인간에 의한 환경 파괴로 멸망했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있다. 경북대 황상일 교수와 경희대 윤순옥 교수가 2013년 한국지리학회지에 실은 논문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논문의 제목은 자연재해와 인위적 환경변화가 통일신라 붕괴에 미친 영향이다. 두 교수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그 연관성을 파악해 본다.

 

두 개의 사료를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서기 880) 9월조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임금이 신하들과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랫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임금이 시중 민공에게 묻기를,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라 물었다. 민공이 대답하기를, ‘저도 역시 일찍이 이와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롭고 바람과 비가 순조롭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풍족하며, 국경이 안정되고 도시에서는 즐거워하니, 이것은 임금의 어진 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임금이 기뻐했다.”

<삼국유사> 피은(避隱)편 염불사(念佛師)조에 나온 기사를 인용해 보자.

남산(南山) 동쪽 산기슭에 피리사(避里寺)가 있는데, 그 절의 스님이 늘 아미타불을 염송하였는데,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려 36017만 호에서 그 염불 소리를 듣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 두 기사를 종합하면 신라는 멸망(935)하기 50년전인 헌강왕기(857~886)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수도 경주 시내에 민간 가옥이 모두 기와집이었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지었다. 경주 인구는 17만호로 가구당 4~5인으로 잡으면 70~80만명에 이르렀다.

이 사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부정할수 있는 근거도 없다.

어쨌든 이 사료를 근거로 할 때 궁금증은 이 많은 인구가 어떻게 숯으로 밥을 지었을까 하는 점이다. 대도시 경주를 운영하기 위해 막대한 목재가 소요되었고, 삼림이 파괴되었다는 얘기다. 숯은 나무의 부피를 1/3, 무게는 1/10로 감소시킨다. 경주 인근 삼림은 신라말기에 거의 파괴되었고, 멀리서 숯을 만들어 수도로 이동시켰다고 볼수 있다.

황상일·윤순옥 교수는 신라말기 수도 경주의 인구 밀집이 환경파괴를 가져왔고, 그 환경파괴가 자연재해를 확대시켜 민란이 발생하고 반란세력이 만든 후백제와 후고구려(고려)에 의해 신라가 멸망했다고 결론짓는다.

 

소금강산에서 본 경주시내 /경주시청
소금강산에서 본 경주시내 /경주시청

 

·윤 두 교수는 자신들의 논리 근거로 경주 인근의 화분(花粉) 결과를 인용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조화룡 연구자의 경주인근 꽃가루 분석을 보면, 한반도에서 삼림 벌채가 일어나는 시기가 농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동기시대이며, 이 때부터 경작지 확보를 위해 숲이 벌채되었다.

경주와 울산 방어진 지역의 화분 분석에서 1만년전 홀로세(Holocene) 시기에 목본 90%, 초본 10%로 숲이 울창했고, 목본 가운데 대부분 낙엽활엽수로 인간이 자연환경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가 지금부터 2,350년 철기시대기 시작되면서 화분 가운데 목본은 감소하고 초본이 빠르게 증가했다. 또 울창한 참나무속(quercus)이 감소하고 2차림인 소나무속(pinus)이 크게 증가했다. 이는 경작지가 조성되면서 소나무 서식지가 상대적으로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사로국이 성립할 때엔 목본이 60% 안팎으로 낮아지는데, 이 때만해도 경작지가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고 지역을 병합하면서 곡물을 전리품으로 노획하거나 조공 형태로 곡물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경주인근의 삼림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시점에 초본 화분 비율이 목본 화분 비율의 4배 정도로 확대된다. 농경지 확장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서기 800년 이후 초본 화분의 비율이 감소하고 목본 화분 비율이 증가해 2배로 늘어났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 초본보다 목본 화분의 비율이 더 높게 유지된다. 이는 신라의 멸망으로 경주 인구가 감소하고 식생이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두 교수는 신라수도 경주의 자연환경 파괴는 농업, 연료, 토기 제작, 제철, 건축, 기와제조, 제염 등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파악했다.

신라는 일성이사금 때인 114년에 경작지 개간령을 내렸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경작자 확대에 주력했고, 경작지 개간으로 삼림이 제거되었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백제와 고구려에서 이주민이 경주로 유입되면서 식량수요가 커지면서 경작지도 확대된다. 경주 분지 일대에는 경사가 완만한 구릉지까지 개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작지가 부족해지며 신문왕 시기에 녹읍을 폐지했다가 경덕왕 10년에 다시 녹읍을 부활했다. 녹읍제 부활로 귀족과 사원이 토지를 장원화하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미개척 산간으로 들어가면서 생태계가 황폐해졌다.

생활연료도 삼림파괴의 주범으로 꼽힌다. 신라시대에는 난방과 취사를 위한 연료로 나무를 썼다. 땔나무를 공급하기 위해 삼림을 파괴했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경주 인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서 땔나무를 충분히 공급받을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통일 시점에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인근 숲에서 땔나무 공급이 불가능해졌고, 경주·울산 지역의 인근의 삼림은 거의 황폐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은 경주는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된 숯에 의존해 연료를 공급받게 되었다. 숯은 많은 나무가 소요되므로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 주변의 삼림도 파괴되었을 것오로 보인다.

현재 한반도에서 발굴된 숯가마는 경주시 손곡동, 천북면 물천리, 내남면 월산리 유적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경주와 그 부근에서 지속적으로 숯이 생산되어 공급되었음을 의미한다.

식생활과 제기용으로 사용된 그릇도 환경을 파괴했다. 목기는 나무로 만들었고, 토기는 숯을 연료로 가마에서 구워냈기 때문에 목재를 필요로 했다. 어디에선가 나무가 베어진 것이다.

농기구와 무기의 원료인 철의 제조에도 목재가 소요되었다. 또 철 제품을 가공하는데도 나무를 연료로 했다. 당시에 석탄을 원료로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철의 추출에서 제련에 이르기까지 숯을 썼고, 그 숯은 삼림에서 나와야 했다.

이밖에 건축물 건립, 기와 제조, 제염에도 목재와 숯이 사용되었다.

 

인구 1백만에 근접하는 거대도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엄청난 자연환경이 파괴되었다. 식생이 파괴되면 지표면이 바람이나 유수에 의해 침식되고, 토양의 유기물과 영양분의 손실이 발생하고, 토양의 극심한 퇴화가 나타난다. 또 식생이 없는 토양은 흙속에 침투한 지표수를 유출시켜 자연재해의 위험성을 가중시킨다.

경주지역에 인구가 증가하면서 산지의 식생이 파괴되고 하곡에 많은 퇴적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퇴적물로 인해 하상이 높아지면서 경주 북천의 하상도 높아졌다. 이런 양상은 분황사 동쪽 구역의 퇴적층에서 확인되었다. 북천 하상 가장자리에 6~7세기에 조성된 문화층이 통일신리 시대 문화층에 의해 매몰되었다는 사실에서 북천의 하상이 높아졌음을 알수 있다. 강물의 수위가 높아지면 작은 비에도 홍수가 발생한다. 신라 말기에 홍수의 빈도가 높아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 연유한다고 두 교수는 지적했다.

경주지역은 우리나라에서도 비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우기인 여름을 제외하면 만성적인 용수 부족에 시달렸다. 그나마 식생이 양호했던 신라 초기에는 지하수와 하천이 지속적으로 유출되었기 때문에 가뭄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경주 인구가 증가하고 산지의 식생이 파괴되면서 지하수 수위가 낮아졌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신라 말기에 주로 지하수를 용수로 사용하는 경주 분지에서 오염된 물을 음용수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만성적인 용수부족을 겪었다.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황상일·윤순옥 교수 논문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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