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멸망과 기후변화②…말기에 전염병 창궐
신라멸망과 기후변화②…말기에 전염병 창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0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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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과밀인구로 삼림파괴, 지하수 부족과 질 저하, 수인성 전염병 확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염병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특히 신라 말기에 전염병 기사가 집중된다. 그 사례를 몇가지 인용해 보자.

 

성덕왕 13(714), 여름, 가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원성왕 12(796) ,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임금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흥덕왕 7(833) 겨울 10,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다시 피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

문성왕 3(841) ,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경문왕 7(867) 여름 5,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경문왕 10(870) 겨울,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경문왕 13(873) ,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임금이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경북대 황상일 교수와 경희대 윤순옥 교수가 발표한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2009)라는 논문에 따르면, 신라본기에 전염병 기록이 모두 17회 등장한다. 이중 10회의 기록이 636~885년의 통일신라 시기에 등장하고, 멸망 직전인 836~885년 사이에 5회나 등장한다.

신라말기에 집중된 전염병은 대체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에 발생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죽어나가고, 왕실은 나라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기사로 연결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어 국민경제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정부가 부랴부랴 추가경정예산을 짜고 재정을 푸는 것은 1천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황상일·윤순옥 교수 연구논문에서 캡쳐
황상일·윤순옥 교수 연구논문에서 캡쳐

 

그러면 신라 시대에 전염병이 말기에 집중되고 가뭄이 극심할 때 발생한 것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런 의문의 해답을 찾기는 어렵다. 사료가 충분하지 않고 출토 유물에서도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황상일·윤순옥 교수는 신라시대 전염병이 대개 봄에 많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갈수기의 지하수 오염으로 인한 수인성 전염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고대인들은 배수시설과 화장실이 현대처럼 완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질(疫疾)의 창궐할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하수체계와 화장실 형태, 배설물 처리에 관한 자료가 극히 드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그동안 불국사(8세기), 익산 왕궁리(7세기중엽)에서 변기시설이 발견되었다. 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7년 경주 동궁과 월지를 발굴조사했을 때, 수세식 변기의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신라 왕실에서는 고급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해 변기시설을 만들고 오물 제거에 수세식 방식이 사용되었고,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 타일 기능의 전돌을 깔아 마감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왕족이나 지배계급에서는 나름 배변 처리를 한 것으로 관측되지만 일반 백성들이 배출하는 오물들을 하수처리하는 시설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의 변기시설과 배수시설 /문화재청
경주 동궁과 월지의 변기시설과 배수시설 /문화재청

 

황상일·윤순옥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신라말기 봄철에 자주 역질이 창궐한 이유는 춘궁기에 영양부족으로 면역성이 떨어지는 시기이며, 역질이 발생하면 면역성이 낮은 노인과 어린이들이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근과 역질의 상호관계는 있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신라시대의 전염병 확산에서 상호관계를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앞의 사례에서 네 번의 경우가 기근으로 인한 전염병이 창궐한 경우들이다.

·윤 교수는 신라시대 역질이 홍수보다는 가뭄과 관련성이 더 크다고 보았다. 가뭄으로 지하수 유량이 줄어들어 수량이 악화되고, 우물의 수위가 하강해 위생상태가 나빠지거나 지하수가 오염될 가능성이 높아져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집중호의 경우엔 강수량이 증가해 하수와 오수가 지하수에 흘러들어 오염될 가능성이 커지고 배수시설이 잘 되지 않은 화장실에서 지하수가 오염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경주의 고고학 발굴에서 한 가옥 내에 우물이 두 개 또는 세 개 조성되어 있을 정도로 우물의 밀도가 높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장실로 확인된 유구는 드물게 나타났다. 이는 신라인들이 지표면에서 깊게 판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을 보여주며, 따라서 고대 역질의 대부분이 수인성 전염병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신라말기에 전염병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경주의 도시화가 비대해지면서 삼림이 파괴되고 이에 따라 가뭄의 빈도가 높아지고 지하수의 수위가 낮아진데 그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황상일·윤순옥 교수는 또다른 논문 자연재해와 인위적 환경변화가 통일신라 분괴에 미친 영향에서 이런 관점을 설명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을 토대로 신라말기 경주의 인구는 70~80만명으로 추정된다.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면서 경주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 경작지 확대, 연료 사용 등에 의해 경주와 울산 인근의 삼림 자원이 파괴되고 홍수와 가뭄의 자연재해가 빈발하게 나타났다.

산지의 식생이 파괴되면서 산지 사면의 퇴적물이 급격히 제거되고 암석이 노출되었고, 집중호우시 빗물은 단시간에 유출되었다. 따라서 강수의 대부분이 지표수로 유출되어 산지 토양이 지하수를 함유하지 못하므로 저지대의 지하수 유출 속도가 빨라져 지하수위가 낮아졌다. 경주분지의 과밀인구는 지하수 부족 현상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용수 부족은 용수의 질을 저하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경문왕(재위 861~875) 때에 전염병이 빈발했다. 3년을 건너 3회나 발생했다. 전염병 이외에도 지진이 발생하고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홍수도 있었다. 겨울에는 날씨가 포근해 음력 10(양력 11~12)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고, 11월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임금이 죽을 무렵엔 혜성도 나타났다.

자연재해가 끊임 없이 반복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수시로 반란이 일어났다. 즉위 6(866)에 이찬 윤흥(允興)과 그의 아우 숙흥(叔興계흥(季興)이 반란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망쳤다. 2년후엔 이찬 김예(金銳)와 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었고, 874년에는 이찬 근종(近宗)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왔다.

 

말기 현상이 나타나면서 경문왕이 취한 조치는 두가지다. 친중국 정책을 강화하고 신민들을 종교적 열기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때 완공된 불탑이 동양에서 가장 높다는 황룡사 9청 탑이다.

경문왕은 869년 왕자를 보내 당나라에 엄청난 조공을 바쳤다. 그 내역에 <삼국사기>에 상세히 적혀 있다.

2, 부금(麩金) 1백 냥, 2백 냥, 우황 15, 인삼 1백 근,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 10, 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 10, 조하금(朝霞錦) 20, 사십승 흰 모직 40, 삼십승 새모시 40, 넉자 5치짜리 머리털 150, 석자 다섯치짜리 머리털 3백 냥, 금비녀오색 댕기반흉(班胸) 10, 응금쇄선자병분삽홍도(鷹金鏁鏇子幷紛鎝紅幍) 20, 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鷹金鏁鏇子紛鎝五色幍) 30, 응은쇄선자분삽홍도(鷹銀鏁鏇子紛鎝紅幍) 20, 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鷹銀鏁鏇子紛鎝五色幍) 30, 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鷂子金鏁鏇子紛鎝紅幍) 20, 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鷂子金鏁鏇子紛鎝五色幍) 30, 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鷂子銀鏁鏇子紛鎝紅幍) 20, 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鷂子銀鏁鏇子紛鎝五色幍) 30, 금화응령자(金花鷹鈴子) 2백 과, 금화요자령자(金花鷂子鈴子) 2백 과, 금루응미통(金鏤鷹尾筒) 50, 금루요자미통(金鏤鷂子尾筒) 50, 은루응미통(銀鏤鷹尾筒) 50, 은루요자미통(銀鏤鷂子尾筒) 50, 계응비힐피(繫鷹緋纈皮) 1백 쌍, 계요자비힐피(繫鷂子緋纈皮) 1백 쌍, 슬슬전금침통(瑟瑟鈿金針筒) 30, 금화은침통(金花銀針筒) 30, 바늘 15백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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