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왜 우산국 정벌했을까…동해 제해권 확보
신라는 왜 우산국 정벌했을까…동해 제해권 확보
  • 김태수 박사
  • 승인 2020.03.07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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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왜의 해상연합전선 차단…여진족의 침략 방어 주장도

 

이글은 20191218일 강원도 삼척시에서 열린 이사부 선양 활성화 세미나에서 김태수(국학) 박사(환동해학회장)의 발표내용이다. /편집자주

 

신라에서 주() () ()제도를 실시한 것은 제22대 지증왕 6(505) 2월인데 이 때 동해안에는 유일하게 삼척에 실직주를 설치했다. 이 실직주에 첫 군주로 부임한 인물이 이사부(異斯夫)였으며, 신라시대 군주(軍主)라는 이름은 이 때 처음 생긴 것이다. 군주는 지방행정의 수장일 뿐 아니라 군사까지 총괄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는 지위였다.

 

이사부 국가표준영정 /삼척시
이사부 국가표준영정 /삼척시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한 이사부의 성은 김()씨이며, 신라 제17대 내물왕의 4대 손()으로 이름은 태종(苔宗)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나 흔히 이사부로 알려져 있다. 이사부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3국 정립시대로 가던 때, 신라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증왕법흥왕진흥왕 3대에 걸쳐 정치군사학문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우산국과 대가야 정벌을 완수했고, 진흥왕 때에는 병부령으로서 중앙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으며, 왕에게 아뢰어 국사(國史)를 편찬할 수 있도록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이사부가 확실하게 다졌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사부를 신라 중고기(中古期))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사부의 활약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고, 김유신이 통일과업을 완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사부의 많은 활약 가운데서도 우리 삼척과 연관된 것은 신라 최초의 군주로 실직주에 부임한 것과 우산국(于山國) 정벌이다.

이사부가 실직주의 군주로 부임할 당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부족국가였으며, “우혜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우혜왕은 대마도에서 이라는 미녀를 데리고 와 왕후로 봉한 다음부터 정사는 돌보지 않고 풍미녀와 사랑놀음에 빠졌다. 게다가 왕후의 사치를 위해 삼척의 해안마을은 물론이고, 멀리 신라의 인근까지 노략질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이에 신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마침내 신라왕은 실직주의 군주 이사부에게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511년 이사부는 즉시 출병하여 우산국에 접근했지만 천연요새와 같은 지형과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되돌아온 이사부는 군사를 철저히 훈련시키고, 이듬 해인 512년 다시 우산국 정벌 길에 오른다. 우산국에 다다른 이사부는 우혜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하도록 권유한다. 그러나 우혜왕은 지난번 싸움에서 후퇴한 신라군인지라 얕보고 그 자리에서 사신의 목을 벤 후 전투를 시작했고, 이사부는 계획했던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어 갔다.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만들어 세운 대형 나무()사자로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 하고 또 화살도 쏘게 하며 군선을 몰게 했던 것이다. 이 광경에 우산국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커다란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고 있으니...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이 때 신라의 군사들이 합창하여 큰 소리로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서 섬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고, 이미 이상한 짐승에게 질려버린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데다가 신라군이 쏘아대는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기 바빴으므로 우혜왕은 자신의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軍門)에 던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우산국은 멸망하고 이 때부터 실직주의 관할영지가 된 것이다.

512. 이렇게 우산국은 멸망했지만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으니 울릉군 서면 남양포구의 사자바위와 투구바위가 그것이다.

신라군이 군선(軍船)에 싣고 왔던 나무사자가 울릉도에 내려져 바위로 변했다는 사자바위, 우혜왕이 항복할 때 벗어던진 투구가 남아 투구봉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아직도 울릉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1)

그리고 삼척시에도 우산국 정벌의 기념물이 있다. 사직동과 근덕면의 경계(옛 삼척시.군의 경계)인 한재 길 옆에 세워진 사자상과 동해시와 경계인 등봉리 주유소 길 옆의 사자상(獅子像)으로 1986년 박환주시장 재임시 향토사학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우산국 정벌 때 활용했던 나무사자를 기념하는 뜻에서 삼척시 경계지역(단봉)에 돌사자상을 설치해 둔 것이다.

2010년에도 삼척교의 출입구에 돌사자상을 세웠다. 그와 함께 삼척시에서는 2008년부터 이사부장군의 해양개척정신을 길이 빛내고자 매년 8월 초순에 <이사부역사문화축전>을 개최하고, 이사부 국가표준영정을 제작 및 삼척시립박물관에 이사부전시코너를 신설함으로써 삼척시가 명실상부한 이사부의 도시라는 것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17세기에 작성된 조선팔로지도 천하도첩.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김태수 제공
17세기에 작성된 조선팔로지도 천하도첩.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김태수 제공

 

신라에서는 왜 우산국을 정벌했을까

동해안에서 울릉도까지 거리는 현재의 뱃길 거리로 따져도 가장 가깝다고 하는 울진군 죽변항에서 130, 삼척시 임원항에서는 137, 동해시 묵호항에는 161가 된다. 지금이야 고속훼리선으로 2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지만, 신라시대에는 이틀이나 소요되는 거리였다. 이는 순풍이 부는 최적의 조건이었을 때의 시간이다. 풍력과 인력에 의존하는 전통항법으로 항해 소요일은 통상 3~6일 정도 걸렸을 것이다. 2)  이렇게 멀고 험한 바다를 건너 우산국의 정벌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김창석교수는 고구려와 왜의 침공이 거듭되고, 양국이 외교적으로 가까워지는 정세가 조성되면 신라로서는 북방과 동남방의 삼면에서 강대한 적대세력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국면을 적극적으로 타개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우산국 정벌이라고 했다.

고구려와 왜 사이의 교통로상에서 중간 경유지 역할을 한 우산국을 장악함으로써 양국의 교섭을 차단한다는 국제정치적군사적 목적이 1차적이고, 이를 통해 신라는 동해를 무대로 펼쳐지던 문화교류와 교역의 장에 울릉도를 거점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2차적인 목적이었다는 설명이다. 3)

박도식교수는 동해안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다 6세기 들어 삼척에 실직주를, 강릉에 하슬라주를 설치하는 등 급성장한 신라(지증왕)로서는 동해안 제해권을 확보하지 않고는 삼척 강릉 등의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교수는 특히 우산국은 고구려의 대일교섭항로였던 동해 중부이북- 일본 혼슈 중부 이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간기착점에 위치, 신라가 동해안에서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대외항로였던 이 항로를 확보해야만 했고, 그것이 우산국 정벌에 나서게 된 이유라고 덧붙였다. 4)

동북아재단 윤재운연구위원도 같은 견해였다. “신라의 동해안 지역점령과 우산국 복속은 동해해상권 장악으로 풀이할 수 있다신라는 결국 울릉도를 포함한 동해안 지역과 한강유역, 낙동강 하류 가야를 병합해 해상무역 루트를 장악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주장했다. 강봉룡교수도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은 신라가 동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 5)

 

삼척시립박물관 제1전시실 ‘이사부전시코너’ /김태수 제공
삼척시립박물관 제1전시실 ‘이사부전시코너’ /김태수 제공

 

한편 이사부의 우산국정벌을 외적 방어 차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당시 동해안 일대에 출몰했던 여진족에 맞서 신라와 우산국 해상세력 간에 공동방어망이 형성됐다는 견해이다. 울릉군지는 신라의 하슬라군주는 여진족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해상세력인 우산국과 연합전선형성이 요구되자 우산국 정벌을 단행하게 된 듯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한 연합전선 형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국사기>지증왕 13(512) 6월 우산국이 귀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는 기록을 제시했다. 또 울릉군지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이후 우산국은 궤멸된 것이 아니라 점차 더 융성해졌다는 것이 현재 남아있는 적석총 등 유적 유물로 확인된다그런 점에서 우산국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신라에 귀복에 연합동맹을 구축했다는 주장이다.

외적방어 차원이라 해도 결국은 동해안 해상권 장악이 우산국을 정벌하게 된 배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학계에서는 이사부가 정벌을 단행한 힘의 근원을 당시 동해안 부족국가에서 찾고 있다. 강릉의 예국, 삼척의 실직국, 울진의 파조국(우중국) 등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에 자리했던 부족국가는 강력한 해상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은 주로 해상에서의 전투라고 판단되며, 음집벌국과 실직국과의 싸움도 바다 물길을 이용한 수전(水戰)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들 부족국가의 해상군사력이 상당한 파괴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국가 정책적으로 배를 만드는 선부라는 조직이 있었고, 고구려에서는 17차례, 발해에서는 34차례 이상 동해바다를 건너 일본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해상교류에서 우산국은 항해의 중간기착지 또는 등대와 같은 물표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결국 안전한 항로 확보 차원에서도 우산국 정벌은 필요했다고 본다.

 


1) 『울릉군지, 울릉군. 1988. 379~380

2) 1997년 발해~일본의 항로를 탐사하기 위한 시험항해 자료에 따르면 후포 동쪽 해역~은지도 북서 해상까지가 동해안~울릉도에 이르는 항로와 거리나 방향이 비교적 비슷한데, 117일부커 123일까지 약 6일이 걸렸다(김윤배권용인이소희, 발해해상항로 학술뗏목답사를 통한 발해의 동해해상항로 연구, 동북아역사논총16, 2007. 79)

3) 김창석, 신라의 우산국 복속과 이사부, 고대 해양활동과 이사부 그리고 사장이야기, 강원도민일보강원도삼척시, 2009. 101~104

4) 최동렬, 이사부를 개워 독도를 다시 보다, 금강출판사, 2009. 80

5) 강봉룡, 이사부의 동해안 진출과 우산국 정복, 이사부 삼척 출항과 동해 비전, 한국이사부학회강원도민일보삼척시, 2010.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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