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족의 슬픈 운명
‘산 이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족의 슬픈 운명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03.08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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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이란, 이라크의 방해공작, 강대국들의 배신…나라 없는 최대민족

 

지난해 10월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산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쿠르드족의 격언을 인용했다. 슬픈 쿠르드족의 운명을 함축하는 말이다. 지난 2000년 넘는 세월 나라 없이 유랑자로 떠돌며 터득한 비운의 격언이기도 하다.

쿠르드족은 현재 25백만~35백만 명을 헤아린다.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 평야와 지금의 터키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라크 북부, 이란의 북서부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남서부 지역에 흩어져 산다. 중동 내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인 쿠르드족은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졌다. 그러나 단 한 차례도 자신들의 국가를 세운 적이 없다. 세계 최대의 무국적 민족이다.

그들은 끝없이 독립을 추구해왔다. 그 꿈은 매번 강대국의 자국이기주의 때문에 좌절됐다. 또한 터키, 이란, 이라크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했다. 쿠르드족은 기원전부터 존재했다. 마호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무슬림이 되었다. 종파는 수니파 계열이다. 중세 이후 오스만튀르크가 유럽을 지배하던 무렵엔 슬픔이 비교적 덜했다. 국경과 국가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시절이었다. 쿠르드족에 신경 쓸 겨를 없는 오스만제국이 그냥 탄압하지 않을 테니 얌전하게 있으라는 방침으로 임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의 꿈은 식지 않았다.

 

쿠르드족 거주지역 /위키피디아
쿠르드족 거주지역 /위키피디아

 

20세기 초 쿠르드족은 독립국가 쿠르디스탄을 세울 좋은 기회를 맞았다. 1920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중심이 된 연합국이 독립을 미끼로 던졌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오스만제국을 배후에서 공격하면 종전 후 독립국 건설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은 오스만제국의 패전으로 끝났다. 1920년 연합국과 오스만 튀르크가 서명한 세브르 조약은 쿠르드족의 독립국 건설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3년 뒤 터키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독립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터키가 강해지자 서방국가들은 세브르 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더구나 쿠르드족이 밀집 거주하고 있던 이라크 북부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 등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쿠르드족과 했던 약속을 폐기했다. 세브르 조약은 1923년 터키와 영국이 맺은 로잔 조약으로 대체됐다.

이후 100년 가까운 세월 쿠르드족은 세계 최대의 무국적 민족의 설움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터키 동남부엔 15백만 쿠르드인이 살고 있다. 시리아 북동부에도 2백만 쿠르드인이 있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터키 군사정부는 쿠르드인에게 쿠르드어를 말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탄압과 핍박의 모진 세월이 그들에게 남긴 격언이 바로 산 외엔 친구가 없다.”이다. 한때 팔레비왕조 시절 이란이 쿠르드의 독립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라크와의 영토분쟁이 문제였다. 분쟁지역을 양보할 것이니 쿠르드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하라는 이라크의 제안을 이란이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독립 운동은 또 좌절을 맞아야 했다.

가장 최근에 쿠르드족은 또 한 차례 미국의 배신으로 좌절해야 했다. 2011년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해 시리아 정부가 수도 다마스쿠스 방어에 집중하는 동안 시리아 북동부를 쿠르드족이 차지했다. 민병대인 인민수비대(YPG)를 조직해서 이룬 결과였다. 2014년까지 시리아 내전이 이어지면서 쿠르드족은 모처럼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 수니파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IS(이슬람국가)가 발호하자 지상군 투입을 꺼리는 미국을 대신해 IS격퇴에 적극 나섰다. 미국은 무기 공급과 군사 훈련까지 시키며 쿠르드족 수비대를 적극 활용했다.

IS가 패망하자 이번엔 터키가 가만있지 않았다. 시리아에서 불법 자치를 하고 있는 YPG는 터키 남동부의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연결된 조직인 만큼 미국은 YPG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직 이익이 되는 전쟁만 하겠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작년 10월 시리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터키의 시리아 북동부 자치 쿠르드족 공격을 눈감아주었다. 작년 9월만 해도 쿠르드인들은 IS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자신들의 독립국 지위 획득을 미국이 강력하게 후원해 줄 것을 믿었다. 쿠르드족 자체 투표까지 하며 국가 건설의 꿈을 다지기도 했다. 모두가 백일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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