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②…피렌체의 국부로 추앙받은 코지모
메디치가②…피렌체의 국부로 추앙받은 코지모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10 14: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알비찌 가문과의 전쟁에서 승리…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 은행업 번창

 

1429년 메디치 은행의 창업자 지오반니(Giovanni)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 Cosimo de' Medici)40세의 나이에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는 근면하고 사업적 판단력이 빠르고 리더십도 있었다. 아버지가 일군 은행업은 그의 손에서 번창했다.

부친 지오반니는 사망하기 전인 1420년에 은행업에서 손을 떼고 아들들에게 사업을 맡겼고, 죽을 때 18만 플로린이라는 어머어마한 유산을 남겼다. 은행의 수입 가운데 3분의2가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서 나왔고, 피렌체에서는 10%, 나머지는 베네치아에서 나왔다. 게다가 무젤로를 포함해 여러 곳에 많은 토지가 상속되었다.

 

코지모 데 메디치 /위키피디아
코지모 데 메디치 /위키피디아

 

아버지 지오반니가 정치에 끼어들기 싫어했던 것과 달리, 코지모는 막대한 재력을 활용해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도시국가 피렌체의 의회격인 시뇨리아(Signoria)에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겉으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점잔을 뺐다. 하지만 후에 교황 피우스 2(Pius II)가 되는 시에나 수사의 표현에 따르면, 피렌체의 정치문제는 코지모의 집에서 논의되었고, 코지모가 관리를 임명하고, 전쟁과 평화의 여부를 결정했다고 한다.

코지모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당시 피렌체 정치의 주류였던 알비찌 가문(Albizzi family)의 눈에는 메디치 가문이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옛 세력과 신흥세력의 권력투쟁이 시작된다.

 

1432년 리날도 알비찌(Rinaldo degli Albizzi)가 알비찌 가문의 수장이 되면서 메디치가에 대한 음모가 본격화되었다. 그들은 코지모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렸다. “코지모가 나쁜 방식으로 재산을 긁어 모았다. 메디치 가문은 눈먼 고리대금업자다. 메디치는 자금을 조달한 건물에 가문의 문장을 눈에 띠게 장식한다. 심지어 승려의 변소에도 그들의 문장을 장식한다.”

가진 자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대중은 소문에 분노했다. 알비찌가의 리날도는 시뇨리아 의원 9명 중 7명을 포섭해 코지모 제거 작업에 돌입했다.

코지모는 소문을 해명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피렌체를 떠나 무젤로 지방의 영지에 머물며 소문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하지만 리날도의 공격은 코지모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14339월초 페렌체 공화국 수반인 곤팔로니에레(Gonfaloniere)로부터 소환명령을 받았다. 97일 시의회로 들어가려던 코지모는 경비대장에 의해 체포되어 비좁은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알비찌가문은 코지모에 대한 인민재판을 준비했다. 9일 시의회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였다. 루머에 들떠 있던 군중들은 코지모의 처형을 요구했다. 하지만 알비찌 가문은 대중의 요구대로 코지모를 사형에 처할수 없었다. 국제적으로 압력이 들어왔다.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쓴 페라라(Ferrara)의 후작은 재판 중재역을 자처하며 피렌체로 들어왔다. 메디치와 거래가 많은 베네치아도 대사를 보내 재판의 조정을 요구했다.

코지모도 가만 있지 않았다. 곤팔로니에레에게 뇌물을 주었다. 재판에 간여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돈과 조언이 오갔다. 코지모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그의 동생 로렌조(Lorenzo de' Medici)와 친척들이 무젤로에 모여 군대를 모집했다. 코지모 석방을 위한 군대는 피렌체를 향해 이동하다가 혹여 알비찌가 군중을 선동해 코지모를 살해할 것을 우려해 일단 전진을 멈췄다.

결정적인 한방은 교황 유제니우스 4(Eugenius IV)가 대리인을 피렌체에 보내 구명운동을 벌인 것이다. 유제니우스 4세는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려썼던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이었다.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코지모 /위키피디아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코지모 /위키피디아

 

코지모를 죽이려던 알비찌 가문은 추방형으로 형량을 낮췄다. 코지모는 10년간 파도바로, 사촌 아베라르도는 10년간 나폴리로, 동생 로렌조는 4년간 베네치아로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코지모는 파도바(Padova)로 추방되었다. 파도바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왔다며 그를 국빈으로 대우했다.

알비찌 가문은 코지모의 목숨은 살려주었지만 재산을 빼앗아 파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코지모는 이미 유가증권과 금화 등을 빼돌린 상태였다. 남은 것은 건물 등 부동산인데 권력을 잡으면 언제라도 되찾을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동생 로렌조가 있는 베네치아로 건너갔다. 그는 자신의 구명을 위해 힘쓴 사람들을 위해 돈을 물씬 썼다. 교황 유제니우스 4세가 수사 시절에 애착을 가졌던 수도원에 새 도서관을 건립하는데 자금을 제공했다. 도서관 건축 설계에는 그를 따라온 건축가 미켈로쪼 미켈리찌(Michelozzo Michelozzi)에게 맡겼다.

 

그의 망명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알비찌 가문은 무력했다. 메디치가의 돈줄이 끊기면서 피렌체는 용병 모집이 어려웠다. 1434년 여름에 밀라노가 쳐들어오자 피렌체 군은 쉽게 무너졌다. 알비찌 가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메디치 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시뇨리아의 다수석을 차지했다. 의회는 코지모의 추방령을 해제하고 귀국을 종용했다.

피렌체에는 알비찌 가문 지지자와 메디치 가문 지지자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해 졌다. 의회는 알비찌의 리날도에 소환령을 내렸고, 리날도는 소환에 불응하며 군대를 동원했다. 일촉 즉발의 상황에 교황이 개입했다. 교황 유제니우스 4세는 메디치가에 동정적이었다. 교황은 리날도를 불러 스스로 물러나라고 권고했다. 리날도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1434928일 코지모는 3백명의 베네치아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피렌체로 향했다. 추방된지 1년만에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온 코지모는 정적들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리날도를 비롯해 알비찌 가문은 피렌체에서 떠나야 했고, 지도층 인사들 중 상당수가 도시를 떠나야 했다.

코지모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미 피렌체는 자신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동원해 콘실리오 마지오레라는 행정조직을 만들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때부터 1464년 죽을 때까지 30년간 그는 피렌체 정치의 실세로 자리 잡는다.

 

코지모는 수십년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부유하고 관대하고 친근한 은행가 행세를 했다. 세 번만 1년 임기의 곤팔로니에레를 역임했을 뿐 행정직은 갖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피렌체라는 국가의 지배자가 되었다. 정치 현안은 그의 집에서 해결되었고, 그가 뽑은 사람이 관리가 되었다. 그는 이름만 빼고 모든 면에서 국왕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밀라노 정치에 개입했다. 1447년 밀라노의 지배자였던 비스콘티 가문의 필리포 마리아( Filippo Maria Visconti) 공작이 죽자 이탈리아 군인 출신의 프란세스코 스포르자(Francesco Sforza)를 보내 밀라노를 지배하게 했다. 피렌체의 개입에 베네치아와 나폴리가 연합전선을 펴서 반격했지만, 코지모는 밀라노의 동맹을 통해 북부 이탈리아를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는 교회일에도 개입했다. 비잔틴제국(동로마)이 멸망하기 직전인 1439년에 그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통합을 논의하는 공의회를 피렌체에서 열었다.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지만 시의 무역업에 도움이 되거나 그리스 학자들이 피렌체로 몰리면서 고전 문서, 역사, 미술, 철학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보티텔리의 다비드상 /위키피디아
보티텔리의 다비드상 /위키피디아

 

코지모가 이끈 평화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유발했다.

그는 대리인을 유럽, 근동에 파견해 그리스, 로마 시대의 희귀본, 귀중본, 원고들을 사서 자신의 도서관에 쌓아 두었다. 또 피렌체와 인근 지역의 교회, 수도원의 건축과 복원에도 힘을 쏟았다. 피렌체에 수많은 그리스 학자가 몰리면서 플레톤 아카데미를 세워 그리스 철학을 배우게 했다. 또 조각가 도나텔로에게 일감이 떨어지지 않게 배려했다.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은 그의 도움으로 제작되었다.

 

그는 메디치 은행도 키워 파리, 런던, 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리용 등 10여 개 도시에 지점을 운영했고, 로마 지점은 교황청의 금고 역할을 하며 막대한 자금을 운용했다.

메디치 은행은 은행 업무 외에 상사 역할을 했다. 양탄자 공급, 유물과 말, 노예 채색판, 성가대, 기린까지도 매매하고, 향신료와 비단, 모직물을 교역하고 후추와 설탕, 올리브 기름, 감귤류와 열매, 아몬드, 모피, 능라, 염료, 보석 등도 취급했다. 광물성 소금인 병반도 거래했는데, 명반은 염료, 유리, 가죽 생산에 사용되었다. 당대 프랑스 역사가 필리페 드 코뮌은 메디치 은행이 유럽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조직이며, 최대의 상사라고 평가했다. 메디치라는 이름은 엄청난 신용을 주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피렌체의 시뇨리아로부터 공화국의 지도자’(capo de la republica)라는 칭호를 받았다. 1464년 그가 죽은 후에 시뇨리아는 그를 피렌체의 국부’(國父, Pater Patriae)로 부르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로마시대 키케로에 붙여졌던 칭호였다.

 

코지모가 죽은 후 메디치 가문은 그의 장남 피에로에게 맡겨졌다. 코지모는 두 아들을 주었지만 둘째 아들 지오반니는 코지모가 사망하기 1년전에 죽었다. 피에로(Piero di Cosimo de' Medici)는 통풍에 걸려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5년간 가문을 이끌다가 지병으로 숨졌다.

피에로의 이어 그의 아들 로렌조가 가문을 이어받아, ‘위대한 로렌조’(Lorenzo the Magnificent)의 시가 열리게 된다.

 

‘국부’ 코지모 상(피렌체) /위키피디아
‘국부’ 코지모 상(피렌체) /위키피디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