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家④…피에로의 추방, 지오반니의 귀환
메디치家④…피에로의 추방, 지오반니의 귀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12 1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겁한 피에로, 피렌체서 추방…동생 지오반니, 교황군 이끌고 18년만에 귀환

 

위대한 로렌조의 장남 피에로(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2~1503)불운의 피에로’(Piero the Unfortunat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는 아버지 로렌조가 1492년 죽은뒤 스무살의 나이에 가문을 이어받았으나, 피렌체에서 추방당해 해외를 떠돌다가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부잣집 아들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버릇이 없고 성질이 급했다. 판단력도 부족했고, 때론 겁이 많았다. 난폭하고 오만불손하다는 평도 있다. 사촌형제들과 반목하는 바람에 가문의 단합을 깨뜨렸고 은행업무는 아예 가문의 어른에게 맡겨 파산하도록 방치했다.

 

피에로가 피렌체의 지도자를 이어받았을 무렵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라는 수사가 궤변을 늘어놓으며 피렌체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이 수도사의 미사에 교회가 포화될 정도로 신도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설교는 피렌체에 큰 소동을 일으켰다. 사보나롤라는 자신이 미래를 내다보는 현안이 있으며, 자신의 말은 모두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며, 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구원을 얻는 길이며, 메디치 가문의 타락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4949월 프랑스 국왕 샤를 8(Charles VIII)가 나폴리 왕국의 상속권을 주장하며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다. 프랑스군은 롬바르디아를 점령하고 밀라노를 장악했다. 베네치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샤를 8세는 피렌체에 길을 나폴리로 가는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피렌체는 피에로의 아버지 로렌조가 나폴리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폴리를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샤를이 도와주지 않을 경우 피렌체를 집어삼킬 태세였기에 중립으로 돌아섰다. 샤를은 피렌체의 중립도 허용하지 않았다. 피에로는 용병을 동원해 국경을 수비했다. 피렌체 전역에 파멸의 기운이 돌았다. 피에로의 사촌들은 프랑스군과 맞서 싸워 승산이 없고 프랑스에 동조하자고 주장했다.

피에로 메디치 /위키피디아
피에로 메디치 /위키피디아

 

결국 가문의 적장자인 피에로가 나서 샤를 8세의 캠프로 갔다. 피에로는 너무나 성급하게 항복했다. 그는 샤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전쟁 배상금을 물기로 약속했다. 피에로는 어쨌든 전쟁의 참화를 막았으니, 시뇨리아(의회)가 승인할줄 알았다.

하지만 피렌체 의회는 냉담했다. 그는 의회 입구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의회의 수장은 나팔을 울려 군중들을 모았다. 군중들은 비겁하게 항복한 피에로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 다음날 피에로는 아내와 자식, 사촌들과 함께 귀중품을 챙겨 베네치아로 도망쳤다. 피렌체 의회는 메디치가를 시에서 영구히 추방시키고 피에로와 그의 동생 지오반니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시에 남아있던 친척들은 성을 갈고 집에 붙어 있는 문장도 제거했다. 폭도들은 메디치가의 저택들에 들어가 보석이며 가구들을 약탈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도시로 한발한발 다가오면서 피렌체 시민들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몰살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때 수사 사보나롤라가 군중들에게 설교했다. 이 병적인 수사는 프랑스 국왕에 대해 , 왕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하느님의 사제로, 정의의 사제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즐거운 마음으로 반가운 얼굴로 맞이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메디치가의 비겁함을 규탄하던 군중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사제의 말에 동조했다. 그해 1117일 프랑스 국왕은 개선장군처럼 피렌체에 입성했다. 사보나롤라의 무조건적인 항복에 프랑스군은 피렌체에 대한 약탈을 금지하고 대신에 전쟁비용을 물렸다. 결국 피렌체는 피에로가 프랑스에 제시한 것과 다를 게 없는 항복조건을 제시하고 굴복하고 만 것이다. 샤를은 로마를 거쳐 나폴리로 진군해 항복을 받았다.

 

교황 알렉산드르 6(Alexander VI)는 프랑스에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듬해인 14953월 프랑스군을 격퇴하기 위해 신성동맹(Holy League)을 체결했다. 동맹에는 밀라노, 베네치아,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아라곤이 참여했다. 반프랑스 연합전선이 구축되자 샤를 8세는 병력 일부를 나폴리에 남겨두고 절반을 이끌고 느린 속도로 북상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승기를 잡은 교황 알렉산드르는 피렌체의 권력을 잡은 수사 사보나롤라를 파문했다. 수사는 강하게 반발했다. 교황의 파문 조치는 효과가 있었다. 피렌체 폭도들은 더 이상 광기의 수사 말을 듣지 않고 그를 투옥했다. 사보나롤라는 화형에 처해졌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피에로와 메디치 가문은 유럽 곳곳을 떠돌았다. 피에로는 용병을 사서 피렌체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메디치를 지지하는 세력이 역부족이었다. 피에로는 1503년 나폴리 왕국의 주도권을 놓고 프랑스와 스페인이 벌인 전쟁에 프랑스 편을 들어 참전했다가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홍수로 범람한 가릴리아노 강에 빠져 익사했다.

 

형 피에로가 죽은후 아들 로렌조 2(Lorenzo di Piero de 'Medici)11살의 어린 아이여서, 가문은 동생 지오반니(Giovanni di Lorenzo de' Medici)가 주도하게 되었다. 지오반니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로렌조의 소망에 따라 성직자가 되었다. 로렌조는 메디치 가문에서 교회의 왕이 되면 가문에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라 생각해 둘째아들 지오반니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는 여덟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작은 수도원장이 되었고 13살에 부제 추기경(cardinal-deacon), 18살에 정식 추기경이 되었다. 물론 아버지 로렌조가 프랑스 국왕과 교황청에 여러 채널로 손을 쓴 덕분이었다.

1503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죽고 후임 피우스 3(Pius III)가 이어받았으나 26일만에 죽고 율리우스 2(Julius II)가 교황에 올랐다.

율리우스는 성직자라기보다 군인으로 불리길 좋아했다. 그가 자신의 존호를 율리우스라 정한 것은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를 흠모했기 때문이다. 그는 1508년 교황령을 넓히기 위해 캄브라이 연맹(League of Cambrai)을 조직했다. 연맹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7(Louis XII),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1(Ferdinand I),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 I)가 참여했다. 그들의 공격대상지는 베네치아였다. 각국의 이해관계는 당대 지중해 해상권을 쥐고 있던 베네치아를 나눠먹자는 것이었다. 1509년 베네치아는 연합군대에 패주하고, 교황은 영토를 넓혔다. 이제 교황은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서 나가주길 바랬다. 율리우스는 프랑스군을 내쫓기 위해 이번엔 나폴리를 장악한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다.

 

1494년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1494년의 이탈리아 /위키피디아

 

메디치가의 추기경 지오반니는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적극 동조했다. 그는 사비를 털어서 교황의 전쟁에 참여했다. 교황은 반대급부로 교황령이 확대되면 피렌체와 아말피의 추기경 자리를 주며, 피렌체의 통치권을 메디치가에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반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잡고 있던 피렌체는 중립을 선언했다. 추기경 지오반니는 용병을 조직해 대프랑스전에 참여했다. 1512년 라벤나 전투(Battle of Ravenna)에서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지오반니는 곧 탈출해 군대를 지휘했다.

지오반니는 스페인군의 지원을 얻어 피렌체로 향했다. 동맹군 내부에는 피렌체 원정에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르비노 공작은 대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자 지오반니 추기경이 대포를 직접 구입하여 보강했다. 스페인군이 식량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지오반니는 그 비용을 지불했다.

15128월 하순, 지오반니는 자신이 조직한 용병과 스페인군을 앞세워 피렌체 관문인 프라토(Prato)에 도착했다. 지오반니는 피렌체 정부에게 항복을 권했지만 종신 곤팔로니에레(수반)로 임명된 피에르 소데리니(Pier Soderini)가 거부했다. 이 때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가 등장한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하급관료로 봉사하면서 소데리나에 군사 및 외교 정책을 건의한다. 그의 건의로 조직된 것이 피렌체의 국민병 9천명이었다. 숫적으로는 교황 동맹군 6천명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오합지졸의 피렌체 국민병은 당대 최강의 스페인군을 이겨낼수 없었다.

829일에 전투가 벌어지자 피렌체의 국민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프라토는 곧 함락되었고 광분한 스페인 용병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파괴, 방화, 강간에 몰두했다. 지오반니가 부녀자들을 도피시킨후 바리케이트를 치고 교황군으로 막아선 후에 겁탈이 중단되었다. 이 때 프라토에서 3~6천명의 시민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프라토가 함락당한후 피렌체의 메디치 당파들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소데리니는 피렌체를 떠나 망명 길에 올랐다. 91, 지오반니가 15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했다. 1494년에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이후 18년만에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잽싸게 변신해 메디치가에 충성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메디치가가 그 변절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해 군주론을 저술했다.

 

메디치 가의 교황들. 레오 10세(재위 1513~1521), 클레멘스 7세(1523~1534), 피우스 4세(1559~1565), 레오11세(1605) /위키피디아
메디치 가의 교황들. 레오 10세(재위 1513~1521), 클레멘스 7세(1523~1534), 피우스 4세(1559~1565), 레오11세(1605) /위키피디아

 

15132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차기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conclave)가 열렸다. 선거에서 지오반니 추기경이 선출되어 교황 레오 10(Leo X)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첫 교황이었다.

메디치가문에서는 레오 10세 이외에도 1523년에 줄리오 메디치(Giulio di Giuliano de' Medici)가 클레멘스 7(Clemens VII)가 되었고, 1559년에 지오반니 안젤로 메디치(Giovanni Angelo Medici)가 피우스 4(Pius IV), 1605년에 알렉산드로 오타비아노 데 메디치(Alessandro Ottaviano de' Medici)가 레오 11(Leo XI)가 되는등 모두 4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