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문화콘텐츠①…이사부 장군의 발자취
동해안 문화콘텐츠①…이사부 장군의 발자취
  • 문대홍 PD
  • 승인 2020.03.1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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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국 점령, 동해 제해권 확보, 신라의 한강유역 확보, 재상, 대가야 복속

 

이 글은 20191218일 강원도 삼척시에서 열린 이사부 선양 세미나에서 문화콘텐츠 전문가 문대홍씨의 발표내용이다. /편집자주

 

이사부의 발자취에 대한 막대한 연구는 이미 진행 되었고 앞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우선 이곳에서는 현재까지 진행된 다양한 연구의 초록을 통해 이사부 연구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삼척시청 홈페이지에는 이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이사부장군 영정 /삼척시청
이사부장군 영정 /삼척시청

 

이사부(異斯夫) 연보

생몰년 미상, 신라 진흥왕대에 크게 활약한 장군·정치가,

일명 태종(苔宗), 내물왕의 4대손으로 지증왕이래 법흥왕·진흥왕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며 신라왕실의 중신이다. 505(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이사부는 실직주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의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진흥왕 2)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의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요직의 하나였다. 그뒤 562(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54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을 틈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진흥왕 10) 전후에 이찬 이사부는 파진찬 두미(豆彌)와 아찬 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김유신의 조부)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이사부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시점은 2007년 삼척시민 주도로 이사부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되고 그해 10월 강원도민일보와 기념사업회가 함께 주최한 동해왕 이사부 재조명과 21세기 해양강국의 비전심포지엄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이사부와 관련된 몇 편의 논문 초록을 통해 최근 이사부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경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부 생애와 활동의 역사적 의의

이사부는 왕족 출신의 진골귀족으로, 나가서는 명장으로, 들어와서는 명재상으로 6세기 신라의 비약적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동해안 진출을 주도하고 가야 병탄을 완수한 명장이었으며, 병부령으로, 上臣으로 군정과 국정을 총괄하고 국사 편찬에도 힘을 쏟았던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동해안 진출의 업적은 그의 이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북방 문물의 유입로이자 고구려와 토착 말갈’() 세력의 침입로이기도 했던 동해안은 신라에겐 양날의 칼이었다. 신라가 일찍부터 동해안 진출을 시도했지만 동해안의 정세는 늘상 불안정했다. 그런 동해안에 대한 안정적인 편제의 기틀을 마련한 자가 바로 이사부였다.

실직주 군주와 하슬라주 군주를 연임 하면서 동해안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우산국 정벌을 통해서 동해 제해권 장악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육상과 해상에서 동해안을 장악함으로써 동해안의 불안정성을 크게 해소했던 것이다. 그의 우산국 정벌 과정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목사자를 앞세운 그의 우산국 정벌 이야기는 이후 인구에 회자되었고 저명한 학인들의 저서에 오르내렸다. 민속놀이 狻猊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막강 해상세력 우산국 우해왕 설화의 핵심 소재가 되었다. 대중가요 독도는 우리 땅을 통해 이사부의 이야기는 오늘도 노래되고 있다.

--- 강봉룡(2010),이사부 생애와 활동의 역사적 의의

 

三國時代 新羅 異斯夫軍事 活動

삼국사기列傳에는 이사부의 군사 활동으로 于山國(지금의 강원 울릉도) 정벌 및 한강하류 유역의 도살과 금현공취 내용만이 전한다. 아마도 삼국사기의 찬자들은 이들 두 군사 활동이 이사부의 업적 중 가장 현저한 것이며, 신라의 대외 팽창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가장 큰 것이라 판단한 듯하다.

아울러 이사부가 진흥왕에게 신라 國史의 편찬을 진언한 것으로 보아, 이사부는 신라 전통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이 경우 신라의 `전통`이란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신라 고유의 무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사부는 지증왕 때 연변관으로서 悉直(지금의 강원 삼척)何瑟羅(지금의 강원강릉)軍主를 역임하였다. `연변`에 대한 군사 활동이 강조된 것으로 보아, 이사부는 해양군사 활동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兵法에도 능한 이사부가 큰 무력 충돌 없이 우산국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산국의 정벌은 신라로 하여금 동해 制海權의 확보와 함께 水牛(海豹; 물개) 등을 공납 받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군사적·경제적 측면에서 대외활동에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다. 이사부의 이러한 군사 활동이 결국 진흥왕 때 신라가 동해안방면에서 황초령과 마운령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한편 이사부의 신라 고유 전통 문화에 대한 애착이 불교를 수용하려던 법흥왕과 갈등을 빚게 만든 듯하다. 이로 인하여 법흥왕 때 이사부의 활동이 史書에 전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반면에 진흥왕은 사상적으로 무교와 불교를 모두 포용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법흥왕비의 영향이라 판단되지만, 진흥왕은 즉위 에 이사부를 兵部令으로 중용하였다. 진흥왕 때 이사부는 赤城(지금의 충북 단양) 지역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다. 그 직후 이사부는 550년에 한강 하류 진출의 교두보인 도살성과 금현성을 차지하고, 반격해 온 고구려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듭하여 이듬해에는 거칠부를 시켜 남한강 상류 유역 고구려의 10을 공취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군사 거점인 國原(지금의 충북 충주)無力化시키면서,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중앙을 장악한 것이다. 아울러 한강 하류 지역으로의 진출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이후 한강 유역 장악의 초석을 깔았다.

한편 가야 지역에 대해서는 70세 이상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5~16세의 혈기왕성한 사다함을 이끌고 대가야(지금의 경북 고령)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는 이사부와 사다함이 내물왕의 후손이라는 혈연적 유대와 함께, ·융합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는 공통점에 기인한 것 같다. 아울러 남한강 상류 유역 진출 시 居柒夫를 앞세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가야정벌에서는 젊은 사다함을 선봉으로 삼아 전투 경험을 익히게 해주려 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처럼 이사부의 군사 활동은 지증왕 때 삼척·강릉 지역 진출 및 울릉도 정벌로 시작되었다. 진흥왕때에는 단양 지역으로의 진출과 도살성·금현성 공취, 거칠부에 의한 남한강 상류유역고구려10군 공취를 비롯하여 대가야 정복으로 귀결된 가야 지역 정벌 등을 완수하였다. 이사부는 6세기 신라 영역 확장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삼국 통일 전쟁의 영웅이 김유신이라면, 100년 앞서 통일 전쟁의 초석을 깐 인물이 바로 이사부인 것이다.

--- 정운용(2016), 삼국시대 신라 이사부의 군사활동

 

이사부, 삼척 출항의 재조명

이사부 장군은 신라의 옛 영토를 탈환하기 위하여 육로로 진격하였고, 실직성을 탈환하여 지증왕 6(505) 실직군주가 되었다.

실직군주로서 신라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진을 잠시 멈추고 실직에서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였다. 이사부 함대는 실직의 오십천 하류 정라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동해안 전체를 보아도 이만한 조건을 갖춘 자연항은 없었다. 정라진 건너불은 우산국과 거리가 가깝고 정 동방향이며 송림으로 싸여있어 파도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또한 인근에서 선박재료를 오십천 강물을 이용하여 쉽게 옮길 수 있으며 배후도시인 실직 성과 실직 제일의 갑자평야가 있었다.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사부 장군은 북진정책을 잠시 멈추고 왜구의 피해를 막고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우산국 정벌을 먼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지증왕의 명령이었는지 아니면 이사부장군의 전략인지 알 수 없지만, 우산국을 복속시켜 공물을 바치게 하였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의 피해도 막을 수 있었으며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여 신라가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었다.

1500년 전 울릉도로 간다는 것은 명령과 유망, 표류 셋 중 하나일 것이다. 이사부가 지혜 많은 젊은이고, 우산국 정복이 신라의 숙원사업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삼국시대의 선박 발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여 확인하기 어렵지만, 과연 이사부 전선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선에는 돛을 달았을까? 이사부 장군도 이 문제로 선박 기술자들과 많은 토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신라 전선은 돛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사부 전선은 신라 전선 최초로 돛을 달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목우사자를 계획할 이사부 장군이라면 당연히 비밀병기인 전선 제작에 다른 나라의 최신정보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산국을 정벌하기 까지 6~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걸렸는데 여기에는 전선을 만들기 위하 여 여러 번의 시행착오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사부 장군은 실직에서 전선을 만든 후, 하슬라를 탈환하여 국경을 넓히고 하슬라 군주가 되었다. 그 후 군사와 군비를 보충하여 실직의 군사와 함께 5126, 이사부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가서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은 우산국을 복속하여 공물을 얻는 것 보다,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신라의 숙원인 왜구들의 침략을 근절 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남해의 이순신 장군이 2323승의 불패 신화와 거북선의 신화가 있다면, 동해의 이사부장군은 한 번의 승전으로 200년간 신라를 평온케 한 목우사자의 신화를 창조하였다. 이사부 장군의 현명한 판단과 지략이 오늘날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와 함께 12해리의 영토와 200 해리의 경제수역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이 영토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 이효웅(2016), 이사부, 삼척 출항의 재조명

 

異斯夫家系政治的 位相

본 논고는 이사부의 가계와 진흥왕대 그의 정치적 위상 변화를 살핀 것이다. 이사부는 눌지왕의 둘째 아들인 파호갈문왕의 손자였다. 이사부는 지증왕대 초반에 가야국을 습격하여 취하였고, 505년부터 512년까지 悉直軍主何瑟羅軍主로서 동해안지역에 주둔한 정군단을 지휘하며 고구려의 남진과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법흥왕대인 529년에 3천의 군사를 이끌고 金官(김해시) 4촌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진흥왕 즉위 이후 지소태후 섭정기와 진흥왕대 친정기 초반에 이사부가 병부령과 상대등을 겸직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다. 551년부터 진흥왕이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고 친정체제를 구축하며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이때 이사부는 진골귀족의 대표로서 진흥왕의 국정운영을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568년 이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틈이 벌어지자, 진흥왕은 더 이상의 영토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수호하고,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는 정책을 폈다. 570년대에 이사부는 이미 사망하였거나 생존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령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였을 것이다.

570년 무렵부터 진지왕대까지 이사부를 대신하여 거칠부가 국정운영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전덕재(2014), 이사부의 가계와 정치적 위상

 

삼척 지역의 海港도시적 성격과 金異斯夫 선단의 출항지 검토

동아시아는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접점에 있으며 우리민족이 활동한 역사활동의 터는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의 해양이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지닌 곳이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접변지역은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해는 남해나 황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역사의 중심부에서 멀었으며 주체적인 역할을 하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에게는 일본열도 진출의 거점으로 중요한 측면이 있었으며, 신라에게는 해양진출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 및 방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신라는 소위 해륙정책을 추진하면서 동해 중부지역 및 해역의 중요성이 커졌으며, 거점도시의 육성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삼척 및 강릉지역을 중요하게 여겨 고구려를 비롯한 여러 세력들과 갈등을 벌이면서 자기 세력권하의 거점도시로 육성 하였다. 삼척지역은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상과 경제적 측면, 신앙 기능 등은 물론이고, 항구, 방어체제, 교통망 등의 도시구조면에서도海港都市의 성격과 범주에 적합했다.

신라는 국가정책과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우산국을 복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동해를 횡단하여 독립적인 해상왕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거두려면 강력한 해양력과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훈련된 수군병력이 필요하다. 그와 함께 장기간에 걸친 전쟁준비를 추진하는 능력을 갖춘 거점의 확보가 필요하고, 또한 대군이 발진하는 장소인 軍港의 선정과 활용은 절대적이다. 본고는 삼척이 해항도시 및 군항으로서 타당성이 높은가에 대해서 다양한 입장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 삼척은 김이사부 선단의 발진기지와 군항으로서 필요한 조건들을 갖추었으며, 동해중부지역에서는 실제 출항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도시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당시에 벌어진 전쟁의 중요도와 규모와 작전의 성격 등을 고려하고, 동해중부지역의 자연환경 및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삼척지역 만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오히려 삼척을 주력발진기지로 삼으면서 북쪽의 강릉지역 및 남쪽의 울진 등과 유기적인 연합체제를 갖추면서 역할분담을 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 윤명철(2010), 삼척지역의 해항도시적 성격과 김이사부 선단의 출항지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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