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문화콘텐츠③…삼척의 역사인물소재
동해안 문화콘텐츠③…삼척의 역사인물소재
  • 문대홍 PD
  • 승인 2020.03.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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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조상 목조, 고려 문신 이승휴·심동로 등…사람 이야기 발굴해야

 

지방 소멸의 시대에 삼척시는 다각도로 생존의 방향을 설정하고, 분야별로 다양한 사업을 왕성하게 진행하고 있다. 그 중 현재 진행형인 문화관광 관련 콘텐츠를 역사인물, 문화재, 관광지, 축제로 나누어 살펴보고 특히 이사부 관련 콘텐츠에 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삼척시청 홈페이지 기준)

 

<< 역사인물 >>

김위옹(金渭翁)

생몰년미상, 일명 위웅(尉雄),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경순왕 부()의 손()이다.

어사대부지군사(御史大夫知郡事검교(檢校사농경(司農卿)을 거쳐 은청광록대부상주국좌승상(銀靑光綠大夫上柱國左丞相)의 벼슬을 지냈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과 실직군(悉直君)으로 책봉되었고, 후에 군왕(郡王)으로 책봉되었다.

 

목 조(穆 祖)

1274(원종 15),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

본명은 이안사(李安社), 본관은 전주(全州), 장군(將軍) 양무(陽茂)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齊)의 딸이다.

목조는 전주의 토호(土豪)였는데, 전주를 떠나게 된 것은 관기(官妓)를 둘러싸고 지주(知州;知全州事) 및 산성별감(山城別監)의 비위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벌 받을 것을 눈치채고 이를 피하여 가솔과 토착인 170여호를 거느리고 삼척(三陟)의 활기동(活耆洞)에 이주하였다. 여기서 1231(고종 18) 5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노동(蘆洞)에 장사를 지냈고, 또 모친상을 당하여 동산(東山)에 장사하였다.

그리고 삼척에 이주해 온 이안사는 배를 건조하여 왜구를 방어하였으며, 1253(고종 40) 몽고의 4차 침입에 대항하여 두타산성에서 항전하였다. 그런데 삼척에 정착한 지 얼마 뒤에 이곳에 부임하는 안렴사(安廉使)가 공교롭게도 전주에 있을 때 산성별감이었음으로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함길도(咸吉道)의 의주 용주리(宜州 湧州里) 곧 지금의 덕원(德源)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에서 따라온 170여호뿐만 아니라 삼척과 덕원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서 큰 족단(族團)을 이루었는데, 고려정부는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의주병마사로 삼았다. 그뒤 원나라가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안사가 머물고 있던 의주도 이에 소속되었다. 따라서 이안사가 와서 그가 거느린 집단은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에 편입되어 원나라 장수 산길(散吉)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다. 산길은 이곳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이안사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회유하여 의주에서 개원로 남경(南京)의 오동(斡東)으로 옮기게 하고 오천호소(五千戶所)의 수천호(首千戶)로서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관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여진족까지 다스리면서 그 세력 기반을 대를 이어 물려 주어 증손 이자춘(李子春 ; 桓祖)까지 몽고의 벼슬을 하였다.

그의 능은 덕릉(德陵)으로 처음 경흥성(慶興城) 남쪽에 있었으나 1410(태종 10) 함흥 서북쪽으로 옮겼다.

 

심동로(沈東老)

고려 때 문신. 본관은 삼척(三陟). 초명(初名)은 한(). 호는 신재(信齋), 문림랑군기주부(文林郞軍器主簿) 적충(迪沖)의 현손(玄孫)이고 검교(檢校) 수문(秀文)의 아들.

일찍 등과(登科)하여 직한림(直翰林)에 있다가 부모가 늙어 지방수령이 되기를 원하여 1352(公民王 1)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내서사인(內書舍人)이 되었다. 고려말 해이된 정사를 바로 잡으려 하다가 권문귀족측에 거슬려 벼슬을 버리고 고향 삼척(三陟)으로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왕은 그 뜻을 높혀 노인이 동쪽으로 간다하여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내렸다.

목은 이색(李穡)이 학사승지(學士承旨)가 되었을 때 왕에게 말하기를 "沈東老는 학식이 신보다 났고, 나이도 신보다 많으며 벼슬길에 오르기도 먼저니 신의 직책을 그에게 내리십시요"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했다. 김구용(金九容)이 안사(按使)가 되어 삼척에 왔을때 동로(東老)를 찾아 그가 거처하는 집에 신재(信齋)라는 편액(扁額)을 써서 걸었다. 삼척에 은거한 뒤에는 날마다 죽서루(竹西樓)와 해암정(海岩亭)에서 풍월을 읊는 것으로 일을 삼고 한편 사람에게 글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 조정에서 예의판서(禮儀判書)와 집현전제학(集賢殿提學)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했다. 예빈시승(禮賓侍丞) 이구(李球)가 시를 지어 동로(東老)에게 준 시에 [三陟官樓是竹西 樓中佳客沈中書 如今白首能詩酒 暇日相遊爲說余]라 했다.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문화재청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적 /문화재청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충렬왕 26), 고려의 문신.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며,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 가리현(京山 加利縣 ; 지금의 경북 성주)출신으로 가리(加利) 이씨(李氏)의 시조이다. 그런데 이승휴는 부친을 일찍 여윈 관계로 외가인 삼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그의 행적은 가리현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삼척에서만 대부분이 나타나고 있다. 이승휴는 1224(고종 11)에 태어났다. 9(1232)에 독서를 시작하여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당시의 명유(名儒) 신서(?)에게서左傳周易등을 익혔다. 14(1237)에 부친상을 입고 종조모인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원씨(元氏)에게서 양육되었다.

그후 몽고군의 침입이 있자, 고려정부가 천도해 있던 강화도에 들어가 최충(崔沖)의 사학(私學) 9(九齋) 가운데 하나인 낙성재(樂聖齋) 도회소(都會所)에서 수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교유관계를 맺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이규보(李奎報), 김창(金敞) 등에 의해 그동안 유명무실해진 사학(私學) 12(十二徒)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는데, 이승휴 또한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가 지은 병과시(病課詩)에 의하면, 한번은 낙성재 도회소에서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연회를 갖다가 그만 술에 취해 울고 말았는데, 이것을 기롱한 교도(敎導) 홍열(洪烈)의 시()가 도하(都下)에 전파되어 주광(酒狂)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승휴는 최자(崔滋)에게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최자는 이규보의 대를 이어 당대에 문명(文名)을 떨친 인물이었다. 이승휴는 1252(고종 39)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최자가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주관한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이승휴는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현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1254(고종 41) 몽고의 5차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돌아가는 길이 막히게 되자, 이승휴는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대항하여 항쟁하였다. 그후 강화도에 돌아가고자 해도 최자와 돌보아주던 종조모가 세상을 떠나 의지할만한 곳이 없게 되었다.

이에 환도(還都)하지 못하고 삼척 두타산의 구동(龜洞)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는 동안 최씨 무인정권은 무너지고 고려정부는 몽고와 강화하게 되었다. 이승휴는 40세가 되는 1263(원종 4)에 당시 강원도 안집사(安集使)로 온 병부시랑(兵部侍郞) 이심(李深)의 주선으로 강화에 돌아가서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최윤개(崔允愷유천우(兪千遇원부(元傅허공(許珙박항(朴恒최수황(崔守璜)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보내는 등 관직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음해에 이장용과 유경의 천거를 받아 경흥도호부판관겸장서기(慶興都護府判官兼掌書記)에 보임되었다.

이후 1270(원종 11) 삼별초가 봉기하자, 이승휴는 군의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이 크게 일어나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들어 그 폐해를 극론하였다. 1273(원종 14)에는 식목녹사(式目錄事)로 있었는데, 당시 정부가 제배하는데 있어 초배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누차 제배받았던 인물들을 제외시키자 불만을 상소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것이 발각되어 문죄를 받게 되었을 때, 이승휴는 상소문의 기초자로 연루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원종(元宗)이 상부의 장의(狀意)와 방문(傍聞)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재조사를 시켜 누명이 벗겨졌는데, 이승휴는 양부(兩府)의 장론(狀論)에 실수의 오점을 남길 수 없다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해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하였는데, 그가 원나라에 가서 올린 진사선미(陳謝宣美)는 원나라의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으며, 동행하였던 송조국(宋祖國)'문장감중화자(文章感中華者)'라고 탄복하였다.

그후 이승휴는 원나라의 사행의 공으로 잡직서령겸도병마록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에 보임되었다. 다음해에 이승휴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기 위해 또 한번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는데, 그는 당시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호복(胡服)을 입고 장례를 치를 것을 염려하여 상복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권유하였다. 충렬왕 때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으며, 이때 시정의 득실을 15개조로 나누어 간쟁하였다. 그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양광도(楊廣道충청도(忠淸道)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어서는 장리(臟吏) 7인을 탄핵하고 그들의 가산을 몰수하였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東州;지금의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일컬었다.

그리고 얼마후 전중시사(殿中侍史)로 다시 임명되었다. 충렬왕은 즉위 초기에 문신 재추관료들과 결합하여 원나라 및 부원세력(附元勢力)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자신이 태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측근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이승휴는 1280(충렬왕 6) 감찰사(監察司)의 관원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를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

이승휴는 파면당한 뒤 다시 삼척의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당호(堂號)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있는 '심용슬지역안(審容膝之易安)'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국사(國事)와 세론(世論)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자 하였으며, 도연명과 같이 전원의 일민(逸民)을 자기의 이상으로 삼고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이곳에서 이승휴는 <<帝王韻紀>><<內典錄>>을 저술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충선왕은 충렬왕의 정치에 대한 대다수 관료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기의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하였다. 이에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이전의 충렬왕 측근과 대립하였던 자들을 특별히 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승휴도 특별히 기용되어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충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 左諫議大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임명되었으며, 곧 사림시독학사 시비서감 좌간의대부(詞林侍讀學士 試秘書監 左諫議大夫)를 거쳐 동첨자정원사 판비서시사 숭문관학사(同簽資政院事 判秘書寺事 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정치에는 충렬왕대에 국왕의 측근세력과 타협하면서 성장하였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이승휴는 70세가 넘어 현관(顯官)에 제수되는 것이 국가의 제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구실로 거듭 사직을 요청하여 마침내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치사하였다. 그후 1300(충렬왕 26)7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 삼국시대 >>

김위옹(金渭翁), 범 일(梵 日), 이사부(異斯夫), 자 장(慈 藏)

 

<< 고려시대 >>

김윤성(金允成), 김인궤(金仁軌), 김의궤(金義軌), 김정휘(金正暉), 목 조(穆 祖), 박원경(朴元慶), 박준제(朴準提), 심동로(沈東老), 이강제(李康濟), 이승휴(李承休), 이연종(?), 이임종(李林宗), 진 경(陳 鏡), 진 의(陳 懿), 진자사(陳予俟), 진의귀(陳義貴), 진인서(陣仁?), 진 학(秦 鶴), 진 희(陳 羲), 최유의(崔有?), 홍 준(洪 濬)

 

<< 조선시대 >>

강 연(姜 演), 김경건(金景鍵), 김경언(金景彦), 김경정(金景淨), 김계건(金啓鍵), 김 긍(金 兢), 김기영(金麒榮), 김난손(金蘭孫), 김달준(金達埈), 김득대(金得大), 김몽학(金夢鶴), 김병소(金秉韶), 김병수(金秉洙), 김병탁(金秉鐸), 김보영(金寶榮), 김복경(金福景), 김상구(金尙矩), 김성구(金星樞), 김성건(金誠鍵), 김세민(金世敏), 김시성(金始聲), 김시진(金始振), 김언지(金彦之), 김연정(金演政), 김연철(金演哲), 김 열(金 烈), 김영순(金永淳), 김운룡(金雲龍), 김원식(金源式), 김원욱(金源彧), 김원태(金源泰), 김원흘(金元屹), 김유인(金繼仁), 김윤성(金允聲), 김인복(金仁福), 김인우(金麟雨), 김인지(金仁祉), 김자현(金子鉉), 김진석(金辰錫), 김천갑(金天甲), 김취장(金就章), 김치구(金致求), 김치현(金致賢), 김태경(金台卿), 김태명(金台命), 김학문(金學文), 김학순(金學淳), 김학호(金學鎬), 김한경(金漢卿), 김헌경(金憲卿), 김현좌(金顯佐), 김현하(金顯河), 김형진(金炯晋), 김 희(金 熙), 남규벽(南奎碧), 남 석(南 奭), 남 식(南 湜), 박문익(朴文益), 박신산(?), 박여량(朴汝樑), 박영옥(朴永玉), 박인두(朴寅斗), 박제영(朴齊榮), 박홍규(朴鴻逵), 신보은(辛輔殷), 신한경(申漢卿), 심가보(沈家甫), 심덕화(沈悳和), 심언광(沈彦光), 심언경(沈彦慶), 심옥서(沈玉瑞), 심희전(沈希佺), 우상호(禹相鎬), 우중학(禹重學), 이계종(李啓鍾), 이계철(李啓喆), 이근직(李根直), 이근태(李根泰), 이동익(李東翼), 이병은(李炳殷).이사순(李士純), 이인하(李寅賀), 이인호(李寅顥), 이종득(李宗得), 이휘순(李徽純), 장병규(張秉奎), 장병익(張秉翼), 장석홍(張錫鴻), 장세우(張世佑), 전방경(全方慶), 정기손(鄭奇孫), 정 도(鄭 渡), 정도복(鄭道復), 정두한(鄭斗漢), 정두형(鄭斗亨), 정사교(鄭師僑), 정인상(鄭麟祥), 정인서(鄭麟瑞), 정장희(鄭長晞), 정취욱(鄭就郁), 진가헌(陳嘉猷), 진 관(陳 瓘), 진상립(陳尙立), 진상점(陳尙漸), 진 억(?), 진응참(秦應參), 진호신(秦好信), 최극강(崔克康), 최극녕(崔克寧), 최동섭(崔東燮), 최문발(崔文發), 최붕동(崔鵬東), 최 린(崔 麟), 최상각(崔尙恪), 최상요(崔相堯), 최성만(崔聖萬), 최세익(崔世益), 최세필(崔世弼), 최세휘(崔世徽), 최 수(崔 修), 최순령(崔舜齡), 최운서(崔雲緖), 최원각(崔元角), 최원준(崔元峻), 최유혁(崔有赫), 최윤태(崔潤泰), 최응수(崔應壽), 최제남(崔悌男), 최종원(崔鍾遠), 최중륜(崔重崙), 최진방(崔鎭邦), 최창근(崔昌瑾), 최창순(崔昌淳), 최창현(崔昌玹), 최치규(崔致奎), 최한보(崔漢輔), 최한생(崔漢生), 최한정(崔漢鼎), 함재식(咸在軾), 홍갑섭(洪甲燮), 홍긍섭(洪兢燮), 홍 대(?), 홍병관(洪秉實), 홍사영(洪士英), 홍상연(洪尙淵), 홍여해(洪汝海), 홍 옥(洪 沃), 홍 온(洪 溫), 홍우검(洪禹儉), 홍우명(洪遇溟), 홍우평(洪禹平), 홍원해(洪源海), 홍윤해(洪潤海), 홍익필(洪益弼), 홍인조(洪寅祚), 홍 자(洪 字), 홍재주(洪在疇), 홍진해(洪振海), 홍택섭(洪宅燮), 홍 해(洪 海),황후경(黃厚敬)

 

<< 근대현대 >>

김동호(金東鎬), 김상태(金尙台), 김진구(金振九), 민용호(閔龍鎬), 심지황(沈之潢), 임용순(任容淳), 진인탁(陳仁鐸), 최인희(崔寅熙), 최중희(崔中熙), 홍낙섭(洪樂燮), 홍석표(洪晳杓)

 

이상 삼척시청 홈페이지에는 197명의 삼척 출신 인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역사는 자연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197명의 인물 속에는 197가지, 어쩌면 그 이상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한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알라딘의 이야기 천일야화가 우리 속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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