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⑧…갈릴레이 보호한 페르디난도 2세
메디치가⑧…갈릴레이 보호한 페르디난도 2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1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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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과학자 후원하고 양성…가족관리에 실패, 재정 악화에 직면

 

코지모 1세가 죽고 1611년에 투스카니 대공국의 다섯 번째 군주가 된 인물은 그의 장남 페르디난도 2(Ferdinando II de' Medici). 페르디난도 2세가 대공이 되었을 때, 서양식 나이로 열 살이었다. 그는 1670년 죽을 때까지 49년간 투스카니를 지배했다. 그가 50년 가까이 대공으로 재임할 때 투스카니와 그 수도 피렌체의 경제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학에 열정을 가지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보호하며 세계 천문학사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페르디난도는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할머니 크리스티나(Christina)와 어머니 마리아 마달레나(Maria Maddalena)에게 맡겼다. 17살 되던 해에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견문을 넓혔고, 18살부터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할머니 크리스티나는 1636년 죽을 때까지 국정을 간섭했다.

그는 성실했고 검소했다. 1630년 이탈리아에 역병(페스트)가 크게 돌아 피렌체 인구의 10%가 죽는 위기에도 다른 귀족들은 도망치기 바빴지만 공작령을 지키고 질병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

 

페르디난도 2세 /위키피디아
페르디난도 2세 /위키피디아

 

페르디난도 2세의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과학 지원이었다. 그의 동생 레오폴도(Leopoldo de' Medici)는 일찍이 성직에 나가 추기경이 되었지만 과학적 열정이 대단해 시간만 나면 과학도서를 탐독했다. 레오폴도는 1657년에 피렌체에 치멘토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라는 과학실험실을 만들어 과학자들을 양성했다. 아카데미에 참여한 과학자는 천문학자 갈릴레오, 물리학자 지오반니 알폰소 보렐리(Giovanni Alfonso Borelli), 수학자 빈센조 비비아니(Vincenzo Viviani) 등이었다.

페르디난도는 이 아카데미의 주요 후원자였다. 대공은 직접 실험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특히 물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아카데미에서는 기압계를 연구하고 망원렌즈등 과학 도구로 직접 실험하거나 온도계, 천문관측기구, 습도계, 열량계 등의 정교한 기계장치를 주문하기도 했다.

페르디난도 2세는 과학자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는 그는 지질학자 니콜라우스 스테노(Nicolaus Steno)가 자신의 저택에서 머물면서 연구를 하도록 했고,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고, 많은 미술품들을 수집했다.

특히 페르디난도는 세기의 천문학자 갈릴레이를 끝까지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파문을 당했다. 페르디난도는 종교 법정에 참관하며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에 종신형을 받았다가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자, 피렌체로 데려가서 연구작업에 몰두하게 했다. 이때 갈릴레이가 발명한 것이 오늘날의 알콜 온도계의 원조인 유리관 온도계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 총독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그림 /위키피디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베네치아 총독에게 망원경을 보여주는 그림 /위키피디아

 

하지만 페르디난도 대공은 가족 관리에는 실패했다.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뜻에 따라 1633년 사촌여동생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Vittoria della Rovere)와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에는 곧바로 아이가 들어섰는데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모두 하루도 살지 못하고 죽었다.

마침내 결혼 9년만에 낳은 아이가 장남 코지모 3(Cosimo III de' Medici)였다. 아들을 낳은 후에도 부부 사이는 좋아지지 않았다. 페르디난도는 집안의 내력인 동성애 기질이 있었다. 여자보다 미소년을 좋아했다. 그는 잘생긴 시종과 놀아나다가 들켜버렸다. 부부 사이는 거의 남남처럼 지냈고, 거의 20년 가까이 그렇게 보내면서 어쩌다 낳은 아들이 둘째 프란체스코 마리아(Francesco Maria de' Medici). 첫째와 둘째 사이에 나이 차는 18살이다.

 

부부는 자녀 교육에는 서로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웠다. 대공은 코지모에게 현대식 교육을 시켜 과학 발전에 기여하게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공비는 아들을 카톨릭식으로 키울 것을 주장했다. 결국은 남편에게 버림 받은 어머니가 아들 교육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코지모 3세는 교조적 신앙심으로 성장하게 된다. 또 둘째 프란체스코 마리아는 성직으로 나가 추기경이 된다.

대공 후계자 코지모 3세는 편협한 기독교 세계관에 몰두해 당시 세계의 과학적 발전을 멀리하게 되고, 치멘토 아카데미의 업적들을 무시한다. 코지모가 16살이었을 땐 이미 기괴한 신앙심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 음악을 제외하고는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극장보다 예배당을 좋아했다. 관료들보다 수도사와 얘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큰 코지모 3세는 후에 투스카니 공작령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된다.

 

페르디난도 2세의 부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위키피디아
페르디난도 2세의 부인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 /위키피디아

 

코지모 3세가 성장해 결혼 적령기가 되면서 페르디난도 대공은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사촌 여동생 마르그리트 루이즈(Marguerite Louise d'Orléans)를 며느리로 점 찍었다. 프랑스 왕실에서도 메디치가와의 혼사를 승인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 왕녀는 메디치가의 결혼을 완강히 저항했다.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 대단한 자존심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이탈리아인과 결혼해 가난한 공국의 후계자와 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녀는 사촌 오빠인 루이 14세에게 결혼을 파기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프랑스 국왕은 이미 정해진 혼사를 거둘 수 없었다.

1661417일 파리에서 마르그리트와 코지모 3세의 대리결혼식이 열렸다. 코지모는 홍역으로 피렌체에 있었고, 마르그리트는 15세였다. 피렌체로 온 신부는 신랑과 만나 입맞춤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왕녀는 메디치 궁에서 골치덩어리였다. 마르그리트는 언제나 향수에 젖어 슬퍼하고 이탈리아에서의 삶을 지루해 했으며, 변덕을 부렸다. 그녀는 결혼전에 마음을 둔 로렝의 샤를 공작이 피렌체를 방문하자 그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샤를 공작에게 편지를 보냈다가 답장이 없자 난동을 부렸다. 프랑스 왕녀는 늘 우쭐대며 자신이 지체가 낮은 남자와 결혼했다고 말하며 투덜거렸다.

시아버지인 페르디난도 대공은 며느리에게 그러면 수녀원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잠시뿐 그녀의 억센 기질을 꺾지 못했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을 조롱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 그녀는 프랑스로 되돌려 보내달라고 애원했다.

그런 소문이 프랑스 루이 14세의 귀에 들어갔다. 루이 국왕인 만약 그녀가 프랑스로 돌아오면 바스티유 감옥에 쳐넣겠다면서 책망하는 내용의 편지를 사절을 통해 보내왔다.

어쨌든 마르그리트는 메디치 가문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아 주었다. 첫째는 아들 페르디난도(1663~1713), 둘째는 딸 안나 마리아 루이자(1667~1743), 셋째는 지안 가스티네(1771~1737).

 

동양 속담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가정평화가 중요하다는 의미지만, 군주국에서 군주 가문의 평화가 곧 나라의 평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페르디난도 2세는 가문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것처럼 나라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대공은 외교나 내정에서 골치 아픈 일은 피하려고 했다.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2세가 죽었을 때 교황이 우르비노를 교황령으로 삼으려 하자, 감히 대들지 않고 우르비노를 내주었다. 추기경인 동생 지안 카를로가 염문을 뿌리며 스캔들을 만들었을 때도 모른척 넘어갔다.

1643년에 카스트로 전쟁(Wars of Castro)에 참여했다가 패전하면서 용병비를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대공국의 재정은 악화되었다. 채권을 발행해 재정을 메웠는데, 채권은 지급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그의 집권 말기에 투스카니의 경제는 극도로 혼미해졌다. 그는 1670523일 뇌졸중 쓰러져 숨졌을 때 나이 60이었다. 그 때 투스카니 공국의 인구는 73만명으로 줄어들었고, 길거리에는 깨진 유리가 흐트려지고 피사의 빌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가 죽고 그의 장남 코지모 3세가 대공을 이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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