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가⑨…몰락의 기로에 접어든 코지모 3세
메디치가⑨…몰락의 기로에 접어든 코지모 3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1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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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사회 지배, 유태교 탄압…후손 단절되면서 사후에 곧 메지치가 붕괴

 

메디치가의 제6대 투스카니 대공작은 코시모 3(Cosimo III de' Medici, 1642~ 1723). 그는 1670년 부친 페르디난도 2(Ferdinando II)가 죽고 대공작에 오를 때 나이가 38세였고, 172381세로 사망할 때까지 53년간 재위했다. 7대에 걸친 메디치가 투스카니 대공 중 가장 장수했고, 가장 재임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그는 공작령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종교가 정치 위에 지배하게 했고, 이교도인 유태인들을 탄압했다. 재정이 고갈되는 상황에서 과도한 세금을 물렸고, 아들과 딸은 낳았지만 후손이 끊겨 대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그가 죽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메디치가는 곧바로 붕괴되었다.

 

코지모 3세가 권력을 물려 받았을 때, 공작령의 경제상황은 꺾어지고 있었다. 유럽에 본격적인 대서양 시대가 열리면서 지중해 중심의 피렌체 무역은 급감하고 재정도 악화되었다. 수시로 전염병이 돌고 농업구조는 후진적이었고, 인구는 감소했다.

그는 카톨릭에는 독실했지만 외교와 내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처음에는 의욕을 부렸지만 곧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판단하고 어두운 예배당에 처박혀 정치는 어머니 비토리아 델라 로베레(Vittoria Della Rovere)와 친구들에게 맡겼다.

 

후계자 시절인 1660년 코지모 3세 /위키피디아
후계자 시절인 1660년 코지모 3세 /위키피디아

 

그는 대공 자리에 오른후 부친의 엄명으로 별거하지 못했던 부인 마르그리트 루이즈(Marguerite Louis)와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했다. 프랑스 왕가에서 온 마르그리트는 1671년 둘째 아들을 낳은 후 아들 이름을 지안 가스토네(Gian Gastone)라고 지었다. 아기의 외할아버지 가스통 오를레앙(Gaston of Orléans)의 이름을 따른 것이었다. 대공은 자기 허락 없이 아들 이름을 프랑스 식으로 짓자 대공비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마르그리트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자 프랑스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마침내 사촌오빠인 프랑스 국왕 루이 14(Louis XIV)가 이를 허용했다. 남편인 코지모 3세는 부인과의 결별을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흔쾌히 승낙했다. 마르그리트는 1675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코지모 3세는 정치에는 관심 없었지만 종교에는 엄격했다. 그는 이단, 특히 유태교에 대해선 가혹하리만큼 탄압했다. 유태인과 기독교도 사이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유태인 포주에 고용되어 있는 기독교인 창녀에게 많은 벌금을 물렸다. 유대인 주인 밑에서 일하는 기독교인에게도 벌금이 부과되었고, 벌금을 내지 못하면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과학자와 철학자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과거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 대우받던 과학자는 더이상 존중받지 못했다. 피사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시대 원자론을 설파한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철학을 강의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투스카니의 대학생들이 다른 지역의 대학에서 이런 이론을 배울까 두려워 대공령 이외의 지역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

코지모는 또 이교도적인 메이데이 축제를 금지시키고, 거리에서 5월의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에게 매질을 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창가에서 놀면 강간 및 임신의 위험이 있다며 금지시켰다. 코지모의 집안에 동성애의 피가 내려왔지만, 투스카니에선 동성애자에게 교수형을 이 선고되었고, 공공장소에서 행해진 사형이 1년에 2천회를 넘었다고 한다.

 

마르그리트 대공비 /위키피디아
마르그리트 대공비 /위키피디아

 

그는 빈약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세금을 가혹하게 매겼다. 새로운 과세제도가 끊임 없이 만들어졌고, 세율도 올라갔다. 세금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벌금, 세외수입도 만들어 냈다.

심지어 밤에 거리를 다닐 때는 허가증을 사야 했고, 횃불을 들고 다니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했다. 상인들에게 밀가루와 소금 독점 판매권을 팔면서도 독점권을 피할수 있는 특별 허가증도 만들어 팔았다. 그렇지만 성직자는 세금을 면제받았다. 가장 무거운 세금을 물게 된 사람들은 창녀들이었다. 창녀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시 수입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코지모는 예술과 학문에 관심이 없었다. 메디치 가의 역대 군주들이 아낌없이 지원했던 예술과 학문은 그의 재위 기간에 시들해 졌다.

 

시의 재정이 악화되는데도 그는 자신의 관심사항과 기호사항에는 돈을 마구 써댔다. 비싼 향수를 사고 영국제 고급 술을 선물하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성골을 매입했다. 코지모는 대식가로 폭음·폭식을 즐겼다. 언제나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다.

그의 동생이자 추기경인 프란체스코 마리아(Francesco Maria de' Medici)도 형의 사치에 못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호화로운 별장을 지어 그곳에 향수 제조실을 꾸미고, 젊은 남자들을 옆에 두고 돈을 마구 뿌렸다. 그러다기 돈이 모자라면 성직을 매매해서 돈을 구했다.

 

코지모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감이 시달렸다. 그러면서 후계자에 집착했다.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지만, 모두 아이를 낳지 못했다.

장남 페르디난도(Ferdinando)는 지적이고 예술적이며 스스로 판단력을 갖춘 훌륭한 후계자였다. 스스로 하프시코드 연주자였고, 작곡가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문의 피에 흐르는 동성애자였다. 그는 남자 가수들과 껴안고 키스를 하다가 들켜버렸다.

아버지는 장남을 빨리 결혼시키려 서둘렀다. 결혼 상대는 독일 바바리아 공작의 딸 비올란테 베아트리체(Violante Beatrice) 공주였다. 그런데 비올란테는 불임이었다. 게다가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에 갔다가 매독에 걸렸고, 젊은 애인들 데리고 피렌체로 돌아와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코지모는 페르디난도가 후계자를 낳을수 없게 되자, 장남을 포기하고 그보다 18살 아래인 차남 지안 가스토네에게 관심을 가졌다. 가스토네는 형보다 더 강렬한 동성애자였고 여자를 혐오했다. 그렇더라도 결혼하면 달라지겠지, 생각하고 아버지는 가스토네의 결혼을 추진했다. 배우자는 독일 삭스-라우엔베르크 공작의 딸 안나 마리아(Anna Maria Franziska)였다. 그녀는 이번이 두 번째 결혼이었는데, 첫 결혼에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가스토네는 동성애자인데다 부인과 접촉을 극도로 꺼렸다.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가스토네는 불능이었다고 한다.

 

결국 코지모는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Anna Maria Luisa de' Medici)에게 공작 자리를 물려 주고 대를 잇는 방법을 추진했다. 코지모는 딸의 배필을 찾아 유럽의 귀족 가문에 섭외를 하다가 크게 낙담했다. 유력 가문들이 모두 가난한 투스카니 공작 가문과의 혼사를 꺼렸기 때문이다. 마침내 찾아낸 사위가 선제후 팔라틴의 벨헬름(Johann Wilhelm II, Elector Palatine)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도 문제가 있었다. 빌헬름은 결혼후 성병에 걸려 부인을 감염시켰고, 그로 인해 안나는 여러번 유산했다.

딸 마리아 루이사에게서 후사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Karl IV)는 투스카니가 제국의 봉토이므로 여자에게 공작위를 물려줄수 없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코지모는 동생 프란체스코 마리아에게 대공 자리를 이어받으라고 했다. 추기경인 프란체스코는 성직자로서도 충분히 여인들과 만났기 때문에 결혼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형의 명령인데다 메디치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추기경 직을 내려놓고 결혼했다. 그는 마지못해 48세의 나이에 구아스탈라(Guastalla)의 딸 엘리오노라(Eleonora) 공주와 결혼했다. 엘리오노라도 남편을 혐오했다. 둘은 부부의 의무도 다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에 결혼 2년 후인 1711년에 프란체스코는 숨졌다.

 

코지모의 장남 페르디난도도 1713년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717년 딸 안나 마리아의 남편 빌헬름도 죽어 안나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이제 좋든 싫든 막내 아들 가스토네 밖에 남지 않았다.

말년에 코지모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러던 중 1723922일 경련이 일어나고 81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투스카니 대공은 둘째아들이자 메디치가의 마지막인 가스토네에게 계승되었다.

 

코지모 3세 대공 /위키피디아
코지모 3세 대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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