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家⑩…동성애자 가스토네, 후계 없어 단절
메디치家⑩…동성애자 가스토네, 후계 없어 단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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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앤 잘해보려 했지만 곧 타락…대가 끊기자 합스부르크 속령으로

 

그는 군주가 되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그럴 자격도 없었다. 지안 가스토네(Gian Gastone de' Medici, 1671~1737)는 마지못해 투스카니 대공국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형 페르디난도(Ferdinando)가 자식이 없이 아버지보다 10년 일찍 죽었다. 아버지는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Anna Maria Luisa)에게 대공 지위를 물려주려 했지만 당대 최강국인 합스부르크가가 투스카니를 신성로마제국의 봉국임을 내세워 여자에게 상속하면 안 된다고 했다. 가스토네는 어쩔수 없이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제7대 대공(Grand Duke)이 되었지만, 메디치가로는 마지막이었다.

 

가스토네는 4살 때 프랑스 왕녀인 어머니 마르그리트 루이즈(Marguerite Louise)가 남편과의 불화로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어머니의 정이 받지 못하고 자랐다. 게다가 아버지 코지모 3(Cosimo III)는 장남과 딸을 편애하면서 막내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내성적이고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연회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식물과 골동품 연구, 외국어 공부를 즐겼다.

가스토네는 대를 이을 후손을 낳기 위해 아버지와 누나의 권유로 독일 삭스-라우엔부르크(Saxe-Lauenburg) 선제후의 공주 안나 마리아 프란체스카(Anna Maria Franziska)와 결혼해 보헤미아 지방에 살았다. 동성애자인 그는 부인과 정을 붙이지 못하고 1708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부부가 10년을 함께 살았지만 그 사이에 지식이 없었다.

 

젊은 시절의 지안 가스토네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지안 가스토네 /위키피디아

 

그는 철저한 동성애자였다. 결혼 생활 도중에도 파리, 프라하로 여행을 하면서 남성 파트너이자 시종인 줄리아노 다미(Giuliano Dami)와 동행했다. 그는 거기서 도박을 하고 가난한 학생이나 길거리 소년들과 동성애를 즐기고 술에 취해 자신을 비관했다. 그런 사실이 아버지에게 보고되어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는 귀챦은 일은 하지 않았다. 편지를 쓰거나 문서에 서명하는 일조차 시종 다미에게 맡겼다.

아버지 코지모 3세는 딸에게 군주권을 상속해 여대공(女大公)으로 만들 계획도 추진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이 반대해 하는수 없이 가스토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7377월에 죽었다.

 

침대에서 생활하는 지안 가스토네 /위키피디아
침대에서 생활하는 지안 가스토네 /위키피디아

 

가스토네가 투스카니의 군주가 되었을 때 나이는 52세였다. 그가 물려받은 투스카니는 파산 직전의 상태였다. 거리에는 거지로 가득 찼고, 방랑객, 승려들이 구걸행각을 하며 떠돌아 다녔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Montesquieu)가 방문하고는 피렌체보다 낙후된 도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때 지중해 문화를 이끌었던 도시에는 인적이 끊겼고, 사람들은 버려지고 가난하게 되었다.

아버지 코지모 3세가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새로운 세금을 걷었기 때문에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마저 파산 위기에 몰렸다. 귀족들이 집에서 연회를 열 때도 간단한 카드놀이나 하고 커피나 차 정도 대접할 뿐 예전처럼 아이스크림은 내놓을수 없었다.

가스토네는 집권초기에 도시를 살리기 위해 나름 의욕을 보였다. 아버지 시대의 과도한 세금을 완화하고, 옥수수 가격도 내렸다. 공개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거지에게도 일자리를 제공했다. 게다가 아버지 시대에 억압하던 유태인들에게도 차별대우를 금지하고 복권시켰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얼마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세상이 귀챦아 졌다. 정무는 형수인 비올란테 베아트리체(Violante Beatrice)에게 맡겨 버렸다. 그러자 누나인 안나 마리아 루이즈가 불만을 가졌다.

가스토네는 정무에서 손을 떼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그의 시종 다미는 그가 원치 않는 방문객을 따돌렸다.

그는 침대에서 식사를 했다. 오후 다섯시에 점심을 먹고 저녁은 새벽 두시에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꼭 만나야 할 방문객을 어쩌다 한번 만났다. 그는 베개에 기대어 일어나지 않았고, 옷도 갈아 입기 싫어 했다. 방안에는 늘상 고약한 냄새가 났고, 악취를 감추기 위해 많은 양의 장미로 방을 가득 채웠다.

 

줄리아노 다미 /위키피디아
줄리아노 다미 /위키피디아

 

사악한 시종 다미는 주인의 성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일에 충실했다. 다미는 피렌체의 가난한 층에서 잘생긴 소년을 골라 대공에게 바쳤다. 소년들은 재롱을 피우고 말동무를 하고 대공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럴 때면 가스토네는 루스피(ruspi)라는 동전을 몇 개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그놈들에게 조롱조로 루스판티(Ruspanti)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동전의 성노예들을 위해 대공은 수시로 화려한 만찬을 베풀고, 장난 삼아 장관이나 대작의 이름을 붙여 호명했다. 만찬이 끝나면 그들에게 서로 성행위를 하라고 요구하고 대공은 그걸 보며 낄낄거리며 재미 있어 했다고 한다.

루스판티들은 어쩌다 대공이 돈이 없어 동전을 던져 주지 못하면 보볼리 정원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음식점이나 시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다미는 대공의 권력을 이용해 귀족과 관리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

 

형수 비올란테는 시동생의 비행을 보다 못해 품위 있는 사람들과 만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애를 썼다. 형수는 연회를 열어 세련된 사람들과 만나도록 주선했지만 가스토네는 술에 취해 사람들에게 욕설을 하고 식사 도중에 트림을 하며 지루해 했다. 한번은 음식을 냅킨에 토한후 가발을 벗어 입을 닦아 참석자들을 무안하게 한 일도 있었다.

그는 형수를 존경했다. 비올란테가 1731년 사망하자 형수의 죽음을 애도해 루스판티의 행각을 중단했다고 한다.

 

지안 가스토네 대공작 /위키피디아
지안 가스토네 대공작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무렵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는 침대에 쳐박혀 나가지 않았다. 시중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다. 그는 그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번 외출했다가 쓰려져 들것에 실려 오기도 했다.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합스부르크가였다. 합스부르크는 당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을 지배하고,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를 배출하고 있었다.

가스토네가 후계자 없이 병약해 지면서 투스카니 문제는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1731년 빈 조약(Treaty of Vienna)에서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4(Karl IV)는 투스카니 대공령이 합스부르크의 영지임을 확인했다. 조약 당사자인 합스부르크와 영국은 가스토네에게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카를 4세는 곧바로 스페인군 3천명을 투스카니에 진주시키고 대리통치자를 보냈다.

1733년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졌을 때 카를 4세는 스페인군을 남하시켜 나폴리와 시칠리를 점령했다. 그리고 로렌(Lorraine)의 공작 프랑수아 1(François I)를 투스카니 대공 후계자로 지명했다.

17377월초 가스토네가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피렌체에 파견된 프랑수아의 대리자는 대공이 곧 죽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카를 4세는 곧바로 오스트리아 병사 6천을 파견해 알프스를 넘어 피렌체를 향하라고 명령했다.

79일 가스토네는 65세의 나이로 숨졌다. 곧바로 오스트리아 군이 피렌체를 점령하고 투스카니는 합스부르크의 속령이 되었다.

가스토네가 죽고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빨간 공(펠레)가 지워지고 로렌가의 십자가로 대체되었다. 또 국부 코지모의 생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등극일, 코지모 1세의 선출일, 그밖에 메디치가와 관련된 모든 축제일이 폐지되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 /위키피디아
안나 마리아 루이자 /위키피디아

 

누나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가스토네보다 6년을 더 살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을 대우해 메디치 가문의 재산을 안나 마리아가 관리하도록 했다. 오랜 기간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모은 방대한 컬렉션은 안나가 상속받게 되었다.

안나 마리아 루이자는 17432187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안나는 죽기 전 유언에서 메디치가의 수집품들을 모두 토스카나 정부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다만 그녀는 이들 컬렉션을 피렌체에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300여년간 피렌체와 투스카니를 지배하면서 메디치가가 모은 재산과 궁전, 별장, 그림, 조각, 보석, 가구, , 원고, 그리고 다양한 예술품은 그대로 피렌체에 남아 있다. 메디치 가의 컬렉션은 우피치 미술관(alleria degli Uffizi) 전시되고 있다. 메디치가는 몰락했지만, 그들의 유산과 유물은 오늘날 피렌체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투스카니 대공령 /위키피디아
투스카니 대공령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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