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의 비밀②…기마민족의 유습
신라 김씨의 비밀②…기마민족의 유습
  • 아틀라스
  • 승인 2019.04.14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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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김씨 왕족들, 신라에서 진골 대우…동복, 동성 결혼, 순장등 풍습 남아

 

외국인들에게서 한국에는 김씨만 있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김씨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이기 때문이다. 2000년 주택인구조사에서 전체 인구의 21.6%를 차지했고, 인구 1천만을 넘어 서울 인구를 상회한다. 거의 대부분 김씨 본관이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김씨의 뿌리를 찾는 연구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냈고, 김씨가 흉노족의 후예라는 주장이 단군의 자손으로 알고 있던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줄만했다.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가야 수로왕 후손과 신라의 김씨 왕족이 멀리 흉노에서 남하하다가 한쪽은 경주로, 다른 한쪽은 김해로 내려가 서로 다른 왕국을 건설했고, 신라에 의해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또다른 김씨의 나라인 금관가야는 신라에 병합된다. 하지만 마지막 임금 구해왕(구형왕)의 자손들은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신라에 고위관리직을 맡아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정복국가 신라가 금관국의 패망 왕조에 대해 특별 대우를 했다. 532년 금관국의 구해왕이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항복했다. 법흥왕은 구해왕에게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주변 국가를 무참하게 정복하며 국세를 키워온 신라가 패전국의 왕과 그 일족을 살려주고, 후하게 대접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구해왕의 아들 김무력과 무력의 손자 김유신은 신라의 1등 공신이 되고, 진골 대접을 받는다.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선조들은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어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였지만, 일단 가야김씨 쪽에서 항복을 선언하자, 신라 김씨 쪽에서 화해를 선택한 것이다. 한뿌리 에서 나왔다는 핏줄 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신라와 가야의 김씨 왕족이 흉노족 후예라는 점은 유적과 유물에서도 나타난다.

경주와 김해 등지에서 적석목곽분이 다수 발견되는데, 흉노의 무덤과 같은 방식이다.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목관을 안치하고,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 모양의 목곽을 만든다.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경주 황남동 대릉원에 가면 거대한 봉분을 볼수 있는데, 미추왕을 비롯, 천마총, 황남대총등 동산만한 고분 20여개가 모두 3세기 중반이후 김씨 왕릉이다.

경주와 김해의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도 흉노의 것과 비슷하다. 금관과 장신구, 금 허리띠, 띠 고리, 뿔잔, 보검등은 스키타이족 또는 흉노족이 쓰던 것과 유사하다. 말을 순장했고, 안장과 등자등 마구류가 다수 발굴되는 것도 비슷하다.

 

풍습면에서도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유학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면서 김씨 왕조의 풍습에서 흉노의 유습이 남아있음을 시사했다.

 

신라의 경우에는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해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풍속이 다르다고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 따진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그 어머니와 아들이 서로 간음하는 짓은 이보다 더욱 심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은 성은 김씨로, 어머니가 김씨 휴례부인(休禮夫人)이며, 왕비도 김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경주 김씨 출신에다 유학자인 김부식은 내물이사금의 가족관계를 설명하며, 흉노보다 심하지 않지만, 자신의 조상인 김씨 왕족들이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친족내 결혼이 성행함을 못마땅해 하며 한마디 한 것이다.

임금이 죽을 때 노비를 함께 메장하는 순장의 풍습도 흉노의 유습이다. 신라는 지증왕때 순장을 폐지했지만, 가야는 마지막 왕 때까지 순장 풍습을 남겼다.

 

국보 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 뒤에 동복이 실려 있다. /문화재청
국보 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말 뒤에 동복이 실려 있다. /문화재청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에선 유목민들이 사용하던 동복(銅鍑)이 나왔는데, 북방 초원지대에서 사용된 금속제 그릇과 유사하다. 동복의 기원은 스키타이계 유목민 문화에서 찾아지는데, 고대 중국에서도 유목민이 거주하는 북부에서는 출토됐다. 말의 뒤편에 솥을 매고 다니는 인형의 모습에서 신라인의 모습에서 몽골 사막의 유목민 인자를 발견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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