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①…미인 포사의 미소가 부른 늑대의 공격
흉노①…미인 포사의 미소가 부른 늑대의 공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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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族과 함께 중국 역사의 쌍생아…견융의 침공, 중국 고왕조 周의 東遷

 

흉노(匈奴)를 한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오랑캐놈이란 뜻이다.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역사관에서 흉노는 중국 변방의 미개인으로 그려졌고, 고대 유럽사에서 훈족(Huns)은 야만인으로 서술되어 있다.

흉노는 중국 고대사에 한족과 함께 쌍생아로 태어났다. 흉노는 중국 고왕조 하··(夏殷周) 시대부터 한족과 대치했고, 중국 문명이 시작되는 한조(漢朝)에는 중국 대륙을 놓고 한족과 본격적인 패권전쟁을 벌인다. 흉노는 한() 왕조를 내내 괴롭혔지만, 마침내 한족에 의해 패배하게 된다. 그후 분열을 거듭하다가 516국 시대에 잠시 등장한 후 중국 역사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흉노의 일부는 서쪽으로 진출해 유라시아 대륙 서쪽으로 진출해 훈족이란 이름으로 고대 로마를 침공했다. 그 유명한 아틸라(Attila)는 흉노, 훈족의 수장이다.

또 흉노의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한반도에 내려와 우리나라 성씨 중 가장 많은 김()씨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남쪽으로 내겨간 일부는 고대 인도의 종족인 후나(Huna) 족이었다는 역사학계의 주장이 있다.

흉노는 고대아시아의 종족으로, 투르크족, 몽골족, 우랄족, 한족(韓族)으로 파생되었다는 언어학계의 주장도 신빙성이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흉노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른다.

그 흉노의 뿌리와 활동, 소멸의 과정을 짚어보기로 하자.

 

BC 205년의 흉노 강역 /위키피디아
BC 205년의 흉노 강역 /위키피디아

 

흉노의 옛이름은 귀방(鬼方) 또는 험윤(玁狁)으로, 중국 역사상 첫왕조로 기록되는 은(또는 ) 왕조 때부터 등장한다. 주역(周易)에 은왕 무정(武丁)귀방을 토벌해 3년동안 정복했다고 나와 았다. BC 12~13세기 쯤으로 추정된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들어섰을 때 귀방과 험윤 대신에 견융(犬戎)이 등장한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견융을 토벌해 네 마리의 늑대와 흰 사슴을 획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BC 10세기 때의 일이다. 견융이 귀방 또는 험윤과 동일 종족인지는 사료의 불투명함으로 확실치 않지만 중국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같은 종족으로 본다.

주 목왕은 견융을 무찌른후 그들 일부를 주나라와 가까운 영하고원(寧夏固原)과 감숙성 평량(甘肅省 平凉) 일대로 이주시켰다. 그런데 그 정책이 화근을 불러 일으켰다.

 

포사(褒姒) /바이두 백과
포사(褒姒) /바이두 백과

 

주나라 유왕(幽王)은 남쪽에 있는 포국(褒國)을 정벌했는데, 포나라 사람이 천하절색의 미인을 바쳤다. 그 여인이 중국 역사의 4대 미인의 하나인 포사(褒姒). 유왕은 왕비가 있는데도 포사를 사랑했다.

포사는 좀처럼 웃지 않았다고 한다.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는데, 현상금까지 내걸면서까지 포사를 웃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현상금을 노린 어느 신하가 봉화를 피워보자는 의견을 냈고, 그의 말을 따라 유왕은 위급하지도 않은데도 봉화를 피워 올려 제후들을 도읍으로 불렀다. 봉화를 피우자 제후와 군대가 허둥대며 달려왔고,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이후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 수시로 봉화를 피웠고, 매번 거짓말에 속은 제후들은 봉화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포사는 백복(伯服)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유왕은 정실왕비인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황후로, 포사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신후의 아버지 신후(申侯)가 격분해 BC 771년 오랑캐 견융(犬戎)족과 연합해 쳐들어 왔다. 유왕이 봉화를 피워 올렸지만, 제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에 신후가 유왕과 백복을 죽이고, 자신의 외손주 의구를 주왕에 올렸으니, 그가 평왕(平王)이다. 평왕은 이듬해 견융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도읍을 호경(鎬京)에서 낙읍(洛邑, 낙양)으로 옮겼다. 포사는 납치되어 견융의 여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자들은 BC 770년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을 서주(西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른다. 포사에 빠져 견융의 침공을 부른 유왕은 서주의 마지막 임금이었다.

 

흉노의 원종족인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를 옮긴 후(東遷) 주 왕실은 지방과 제후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흉노라는 이름은 전국시대인 BC 4세기경에 중국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중원을 흐르는 황하(黃河)는 동쪽으로 흐르다가 중유지방에서 북쪽으로 흘러 다시 남하해 서쪽으로 흘러드는데, 이 만곡부를 당시 하투(河套)라고 했다. 지금의 내몽골 오르도스(Ordos, 鄂爾多斯) 지역이다.

오르도스 일대는 초목이 무성하고 야생동물이 많아 묵축과 수렵에 종사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흉노는 이곳에 이동하며 유목생활을 했다. 일찍부터 농경생활을 하던 한족과는 인종과 생업에서 큰 차이를 드러냈다.

흉노는 자신의 문자가 없었다. 따라서 중국 사서에 흉노의 신화와와 설화를 의존해야 한다. 위서 고차전(魏書 高車傳)에 흉노 신화의 흔적이 나타난다.

흉노 선우(單于)에게 곱고 아름다운 두 딸이 있었다. 선우는 두 딸이 인간에게 줄수 없어 천신(天神)의 아내로 바치기로 했다. 그는 높은 단을 쌓아 두 딸을 올려 놓고 기도를 드렸다. 4년이 지나도록 천신의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늑대 한 마리가 꼼짝하지 않고 밤낮으로 단 주위를 지키고 있었다. 선우의 딸들은 그 늑대가 천신이라 생각하고 뒤를 따라가 후손을 낳았다.”

이 신화는 흉노가 늑대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꾸민 토템신앙으로 해석된다. 흉노는 그야말로 초원의 늑대였다.

 

오르도스 지방 /위키피디아
오르도스 지방 /위키피디아

 

한족은 주위의 다른 종족을 방위별로 구분해 사이(四夷)라고 불렀다.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 그것이다. 서쪽의 오랑캐 흉노를 개과의 늑대로 보아 견융(犬戎)이라 불렀던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 흉노전에서 흉노의 선조는 하후(夏候)씨의 후예라고 썼다. 516국 시대(304~439)에 흉노족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자신들이 고대 하()나라를 계승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몽골의 가옥 유르트(yurt) /위키피디아
몽골의 가옥 유르트(yurt) /위키피디아

 

흉노는 초원과 사막의 종족이었다. 그들은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물과 풀이 풍부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이동하기 쉬운 천막(게르)에서 생활했다. 나무로 골조를 짜고 그 위에 가죽으로 덮어 씌워 거주지를 만들었다. 부락은 추장이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고 지위와 서열에 따라 안에서 바깥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 주변에는 말과 마차가 둥그렇게 에워 쌓는다.

남자들은 주로 방목과 수렵을 하고 여자들은 소와 말의 젖을 짜고 가족과 동물의 털로 옷을 만들었다. 전쟁이 나면 부락 전체가 움직였다. 청장년은 전투에 나가고 부녀자들은 짐을 챙기고 가족을 관리했다.

전쟁터에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가족 문제는 여성의 권한이 컸다. 또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동생이 이어받는 수계혼(收繼婚) 제도를 행했다. 농경민족인 한족들은 흉노의 수계혼 제도를 비난했지만 유목민족에게는 일종의 종족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흉노는 또 분권체제를 유지했다. 인구밀도가 낮고 먼 지역을 떠돌며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중앙권력이 먼 지역을 통치하기 어려웠다. 좌현왕, 우현왕, 좌곡려왕, 우곡려왕과 같은 제도는 초원과 사막지대를 통치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부족 단위의 세습체제가 이어졌다.

 

흉노의 세력화는 한족 권력의 강화와 맞물려 전개되었다. 100여개 나라로 분열된 춘추시대가 칠웅(七雄)의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흉노는 중원의 분열을 적절히 이용하며 패권을 장악해 나간다. 전국시대의 7국 가운데 흉노와 접경한 진(), (), ()나라는 흉노의 침공에 대비해 각각 경계에 성을 쌓았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시초가 된다.

 

오르도스에서 발견된 흉노인의 모습(대영박물관) /위키피디아
오르도스에서 발견된 흉노인의 모습(대영박물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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