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②…전국시대, 호복 차림으로 말타고 활 쏘다
흉노②…전국시대, 호복 차림으로 말타고 활 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2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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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 영토 확장하며 흉노와 대치…전쟁과 화친 통해 두 문화 교류

 

()나라 초기부터 흉노와 한족은 대치관계에 들어갔다. 여양산(呂梁山), 태행산(太行山)과 수양산(首陽山) 사이에 갇혀 있는 골짜기는 흉노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 한족이 이 곳으로 진출하면서 두 종족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BC 11세기쯤 서주(西周) 2대 성왕(成王) 희송(姬誦)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어린 천자는 놀이를 하다가 오동나무 잎을 주워 동생 숙우(淑虞)에게 너를 제후로 봉하노라고 말했다. 섭정을 맡고 있던 숙부 주공(周公)이 깜짝 놀라 천자는 함부로 농담을 해서는 아니되옵니다고 했다. 성왕은 숙부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성왕은 나이가 들어 어렸을 때 한 말을 이행해 동생 숙우를 제후로 봉했으니, 흉노의 유목지 당()이란 곳이었다. 당의 제후가 된 숙우는 그곳에 진수(晉水)가 흐른다고 하여, 그곳을 진()이라고 이름지었다. 지금의 오르도스 지역이다.

 

주나라가 흉노의 거점에 봉국을 정한 것은 남의 땅을 뺏은 것이나 다름 없다. 초기 서주는 흉노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서주의 봉국 진은 전투에 승리해 포로로 자븐 흉노족을 노예로 만들었고, 한족(=華夏)의 문화를 이식했다. 진의 문공(文公, 재위 BC 636~628))은 흉노와 싸울 때 양가죽을 걸쳐 입고 기세를 자랑했다.

진나라는 오르도스 지역에 계이하정 강이융색’(啓以夏政 疆以戎索)의 정책을 취했다. 즉 화하족의 통치술로 흉노의 영토를 다스렸다. 흉노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진나라는 마냥 흉노와 전쟁을 치르지는 않았다. 융적(戎狄)과는 화전양면 전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흉노의 땅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제압할 힘이 없었고, 다른 열국과 전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배후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진 도공(悼公, 재위 BC 586~558)은 위장자(魏莊子)의 의견을 받아들여 화융(和絨) 정책을 시도했다. 진 도공의 화융정책의 골자는 중원의 산해진미와 미녀를 흉노의 말과 모피와 교환하며, 서로에게 부족한 물자를 채워준다 동맹관계를 맺어 충돌과 대립을 방지한다 상호 통혼해 두 왕실간에 친족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었다.

 

중국 전국시대 7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중국 전국시대 7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이때부터 시작된 한족 정권의 화융정책은 후대로 이어진다. 화전 양면전술의 한 축인 화친 정책은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거나 통혼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화융정책의 목적은 소수민족을 달래고 그곳에서 전략물자를 얻기 위한 것이다. 농경지역인 중원에는 옷과 비단, 식량이 풍부하다. 이에 비해 유목지대에선 말과 소가 넘쳐났다. 결국 한족은 먹고 입을 것을 주어 소수민족에게 중국 문물을 배우게 하고 그들에게서 전쟁물자를 구해 그들을 방어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이 오랜 관습은 중국내 다수의 민족을 한족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BC 369년에 진()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한((()로 갈라진다. 이중 조()나라가 가장 북쪽에 위치해 흉노와 국경을 접했다. 조나라와 흉노는 수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BC 307년 조나라 무령왕(武寧王)은 호복기사(胡服騎射)의 개혁을 단행했다. 오랭캐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이 전략은 사이제이(師夷制夷) 정책의 일환이다. 즉 오랑캐에서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것이다. 흉노와 한족의 화친은 서로 다른 두 문화가 교류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호복기사상 /위키피디아(중국어판)
호복기사상 /위키피디아(중국어판)

 

진의 무령왕은 시야가 넓고 담이 큰 군주였다. 어느 날, 무령왕은 대신 누완(樓緩)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동쪽에는 제()제나라와 중산(中山)이 있고, 북쪽에는 연나라와 동호(東胡)가 있고, 서쪽에는 진((누번(樓煩)이 있는데 우리가 강대해지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큰 재화를 입게 될 것이오. 지금부터라도 분발해서 한시 바삐 제도를 개혁하고 강성대국을 만들어야 할 것이오.

나는 우선 복장부터 개혁하려 하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두루마기는 소매가 넓고 옷자락이 길어서 일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 불편한 점이 적지 않소. 이에 비해 호복(胡服)은 소매가 좁고 옷자락이 짧아서 일하기도 좋고 전장에서 창칼을 쓰기도 좋소. 그래서 과인은 우리의 의복도 호복처럼 고쳤으면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떻소

()는 흉노를 지칭하는 말이고 호복은 흉노의 복장이다. 이에 누완은 대답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우리가 호복을 본떠 의복을 고치면 그들의 싸우는 재주도 배우기 수월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령왕의 복장개혁에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다. 가장 완고한 사람은 숙부인 공자 성()이었다. 무령왕은 숙부를 찾아가 마침내 설득에 성공했다. 공자 성이 호복을 입자 대신들은 군주가 하자는 대로 옷을 고쳐 입었다.

얼마후 무령왕은 온 국민에게 흉노와 같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배우게 했다. 1년도 안되어 조나라는 막강한 기병을 훈련해 냈다.

BC 305, 무령왕은 기병대를 직접 거느리고 중산을 격파하고, 동호와 인근의 몇몇 부락들을 정복했다. 호복을 입은 지 7년 만에 조나라는 중산, 임호(林胡), 누번을 정복했다.

조나라는 북쪽으로 영토를 1천여리 넓히게 되었다. 이어 조나라는 북쪽에 내외 장성 두 가닥을 쌓았다. 내장성은 임호와 누번을 방어하기 위함이었고, 외장성은 바깥에 있는 흉노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장성이 후에 진시황(秦始皇) 때 만리장성으로 연결된다.

 

임호와 누번을 정복한 후 조나라와 흉노는 장성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조나라는 전국시대 7국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흉노에 대해 수비 위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조나라는 국경(장성)에 봉화대를 만들고 흉노 내부에 첩자를 파견해 흉노기병의 급습에 대비했다.

 

조나라의 명장 이목(李牧)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방어 위주의 전투를 하다가 주군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 그 자리에 다른 장수가 와 공격적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한번도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잃고 패하고 말았다. 조나라 왕은 다시 이목에게 변경 수비를 맡겼다.

이목은 적이 교만해져 있을 때를 기다려 기회를 포착했다. BC 265년에 수차례 조군을 이긴 흉노는 병력 수의 우위를 믿고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목은 전차 13백대, 기병 13, 보명 5, 궁수 10만명을 보이지 않게 숨겨두었다. 자신만만하게 쳐들어오던 흉노가 마침내 조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이 전투에서 흉노는 10만명의 기병을 잃었다.

이목의 군대는 기세를 몰아 북진해 동호를 정벌하고 임호를 굴복시켰다. 이 전투 이후 흉노는 10년가까이 변방을 침범하지 못했다.

 

진시황의 공격로 /위키피디아
진시황의 공격로 /위키피디아

 

조나라는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국력을 상당부분 소모해야 했다. 어쩌면 흉노는 조나라의 이웃 진()이 중원을 통일하는 조력자였다고 할수 있다.

 

진시황은 BC 230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10년 동안 조(), (), (), (), ()나라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BC 221년에 분열된 한족을 통일한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를 천하통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확히는 황하(黃河) 일대의 중원통일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다는 바로 그 무렵에 북방의 초원과 사막에는 흉노의 두만선우(頭曼單于)가 등장해 북방에 대제국을 형성한다. 이른바 중국 천하는 북방의 흉노와 남방의 진()의 두 개 제국이 대치하게 된다. 천하 쟁탈전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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