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③…두만선우와 진시황제, 두 제국의 충돌
흉노③…두만선우와 진시황제, 두 제국의 충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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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의 중원 통일에 맞춰 흉노도 단일제국 형성…몽념의 북벌에 패배

 

진왕(秦王) ()BC 230년부터 10년에 걸쳐 한(), (), (), (), (), ()6국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BC 221년에 마침내 중원의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에 즉위한다. 그 무렵 북방 흉노의 각부족들은 한족의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몽골족의 쿠릴타이에 해당하는 부족회의를 열어 가장 강력한자를 선우(單于)로 추대하니, 두만선우(頭曼單于).

사마천(司馬遷)은 두만을 흉노의 초대선우라고 설명했다. 두만이 선우로 추대된 시기는 사마천이 정확히 기술하지 않았으니, 후대에서 알길은 없다. 다만 진왕이 중원을 통일하고 황제로 즉위하기 전후였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다. 통일 한족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흉노족도 세력을 규합해 단일국가체제로 전환한 것으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서>(漢書)에 선우는 흉노어 텡그리구투선우(撐犁孤塗單于)의 준말로, 텡그리는 하늘(), 구투는 아들(), 하늘의 아들이란 뜻이다. 한족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천자(天子)라고 부른 것과 같이, 흉노족들은 자신의 언어로 선우란 호칭을 선택한 것이다. 언어학자들은 두만(頭曼)을 만인장(萬人長)을 의미하는 투르크어 투멘(Tümen)으로 유추해 군의 수뇌(軍長)로 해석한다. 즉 두만선우는 부족장 연합의 군통수권자로, 하늘이 내려준 군주란 의미로 보면 무방할 것 같다. 흉노의 입장에서 한족 정권이 황제를 지칭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군주를 선출해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두만선우 /바이두백과
두만선우 /바이두백과

 

한족이 치열한 전쟁을 통해 통일한 것과 달리 흉노는 부족회의를 통해 단일권력체계를 형성한 것이 이채롭다. 각 부족은 자율권을 갖고 한족과의 전쟁에 선우의 지휘 아래 병력을 보내 단일대오로 전투를 하는 유목민 특유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역으로 부족에게 배려한 자치권은 후에 극심한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다.

어찌되었든 진()과 흉노는 동시에 각각의 제국을 형성한다. 진시황의 황제 재위기긴이 BC 221~210년이고 두만선우의 재위가 BC 220(추정)~209년이니, 거의 비슷한 시기에 두 영웅은 서로 자웅을 겨룬 것이다.

두만을 선우로 추대한 흉노는 지금의 내몽골, 외몽골, 오르도스를 포함하는 광대한 국가체를 형성했고, 동쪽엔 동호(東胡), 서쪽엔 월지(月支)와 접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 /위키피디아
진시황릉의 병마용 /위키피디아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亡秦者胡也)는 참언(讒言)을 듣게 되었다. 신하 이사(李斯)는 참언에서 이르는 호()가 북방의 오랑캐, 즉 흉노를 지칭한다고 해석하자, 진시황은 반드시 흉노를 격멸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당시 흉노는 오르도스를 점령해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위협했다.

진시황은 두만선우가 움직이기 전에 선제공격을 시도했다.

이사는 반대했다. “아니되옵니다. 흉노는 정해진 곳에 성곽을 쌓거나 식량을 쌓으면서 거주하거나 수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새처럼 이동하고 있으니, 간단히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적중에 깊이 들어가면 식량이 떨어지고 행군이 더디어 도달하지 못합니다. 흉노의 땅을 얻었다고 해도 별 이익이 없으며, 흉노를 포로로 잡아도 언제까지 사역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장군 몽염(蒙恬)에게 30만 병사를 주어 흉노 정벌에 나서라고 명했다.

 

진대의 만리장성 /위키피디아
진대의 만리장성 /위키피디아

 

몽념은 전쟁 준비를 갖추어 이듬해인 BC 214년에 오르도스로 진격했다. 두만선우의 흉노군은 의외로 약했다. 두만은 오르도스를 내주고 북쪽 몽골고원으로 도망쳤다.

몽념은 흉노에게서 1천리 땅을 빼앗아 황하강 이남(下南) 오르도스를 장악하고, 그곳에 44개 현을 설치했다. 또 남쪽에 살던 한족 3만명을 이주시켜 농사와 국방을 겸하도록 했다. 진시황은 그곳에 태자 부소(扶蘇)를 파견했다. 태자는 솔직하게 간하는 바람에 진시황에게서 미움을 받아 북쪽 변방의 군단을 감독하게 되었다.

몽염은 그후 10여년 동안 북방을 방어하며 상군(上郡)에 주둔했는데, 흉노는 몽염의 위세에 눌려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몽념에게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험준한 지형을 따라 만리장성을 쌓도록 지시했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장성은 엄청난 인력과 물자가 소요되었다. 노역에 가담한 인력의 60%가 목숨을 잃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불로장생의 약초를 찾아 헤메던 진시황도 자연의 섭리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BC 210년 진시황이 죽고 둘째 아들 호해(胡亥)2대 황제로 즉위한다. 호해의 집권으로 장남이자 태자였던 부소와 그의 편에 섰던 몽념이 죽음을 맞았다.

진시황과 몽념이 죽자 10년간 북방을 떠돌던 두만선우가 황하를 건너 오르도스 지역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두만은 오르도스에 집중하지 못했다. 동쪽에서 동호가 기세를 올렸고, 서쪽에서 월지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빼앗아 흉노에게 볼모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북쪽의 정령(丁零)도 남쪽의 흉노를 수시로 공격해왔다.

 

북방에 다시 긴장감이 돌자 호해는 지방의 백성을 차출해 변방의 병력을 강화하도록 했다.

진시황이 죽은지 다음해인 BC 209년 옛 초()나라 땅이던 양성(허난성)이란 곳에 농민 9백명을 징발해 어양(漁陽, 베이징 근처)을 지키라는 명령이 조정에서 하달되었다. 징발된 농민 중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리더십이 있어 부대를 관리하는 둔장(屯長)을 맡았다.

농민들은 안후이성 대택향(大澤鄕)이란 곳에서 도달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오도가도 못했다. 그들은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데, 관리들은 빨리 이동하라고 재촉했다. 당시 진나라 법에 기한 내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면 사형시키도록 되어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도망칠 것도 궁리했지만, 도망을 치다 잡히면 사형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럴 바에야 차리라 들고 일어나 진나라의 천하를 뒤엎어보자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징발된 사람들 앞에 섰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해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다면 다시 고향 땅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명대의 만리장성 /위키피디아
명대의 만리장성 /위키피디아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진승과 오승의 선동에 농민들은 봉기했고, 그들의 봉기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진승과 오광은 대초(大楚)의 장군과 도위(都尉)를 자처하며 농민반란군을 이끌었다. 농민군의 세력은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진승은 곧이어 왕위에 올라,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오광은 가왕(假王)이 되었다.

농민군은 오래가지 못했다. 봉기 6개월후 농민군 내부에 동요가 일어나 진승과 오광은 살해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으로 기록되는 진승-오광의 난은 진나라의 몰락을 초래했다.

진에 병합되었던 조, , 연나라에 왕을 자처하는 자가 등장하고, 곧이어 초나라의 항우(項羽) ()나라의 유방()이 등장했다.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환관 조고(趙高)는 승상 이사를 모함해 제거하고, BC 207년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황제 호해를 자결에 이르게 했다. 조고는 스스로 왕이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嬰)을 왕으로 세웠다. 자영은 왕이 된지 40여일만에 유방에게 항복하면서, 최초의 한족 통일국가 진나라는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다시 진시황 때의 참언으로 돌아가 보자. 중국 역사가들은 亡秦者胡也는 흉노가 아니라 2대 황제 호해(胡亥)라고 해석한다. 진시황이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사의 해석이 옳았다고 본다. 는 호해가 아니라 흉노였다. ()은 흉노()와 대적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고 백성들을 징발하는 바람에 반란이 일어나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이다.

진이 멸망한 직후에 흉노에서도 궁중반란이 일어난다. BC 209년에 두만선우의 장남 묵돌(冒頓)이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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