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의 비밀③…성한왕(成漢王) 미스터리
신라 김씨의 비밀③…성한왕(成漢王) 미스터리
  • 아틀라스
  • 승인 2019.04.1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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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에는 나오지 않지만, 다양한 비문에 나오는 신라김씨의 선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신라의 김씨 왕조의 시조가 김알지라고 서술하며 설화를 소개했다.

 

탈해 9(65) 3, 임금이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날이 샐 무렵에 호공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나뭇가지에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를 아뢰자, 임금은 사람을 보내 그 궤짝을 가져오게 했다.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뛰어났다. (삼국사기)

탈해왕(脫解王) 때 일이다. 영평(永平) 3년 경신(60) 84일 밤에, 호공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始林) 속에서 매우 커다란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다.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삼국유사)

 

하지만 금석문에서는 김알지에 대한 언급이 없고, 김씨 왕조의 시조로 성한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성한왕을 언급하는 금석문은 문무왕릉비를 비롯해 5곳이다.

 

15대 조상은 성한왕(成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를 개창하여... 문무대왕비(662년 건립)

태조 한왕(韓王)은 천년의 를 열고... 김인문비(695년 건립)

태조 성한(星漢). 흥덕대왕비(872년 직후 건립)

대사의 법명은 이엄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계림인이다. 그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니 실로 성한(成漢)의 먼 자손(實星漢之苗)이다. 해주 광조사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937년 건립)

⑤ □운은 속성이 김씨이니 계림인이다. 그 선조는 성한(聖韓)으로부터 내려와 나물(那勿)에서 크게 일어났다. 풍기 비로암진공대사보법탑비(939년 건립)

 

5개 금석문 중 앞의 3개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졌고, 뒤의 2개는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고려 왕건에게 바친(935) 직후에 건립됐다. 모두 신라때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신라때 만들어진 비문에는 김씨 왕조의 시조를 성한왕이라고 하는데 비해 고려때 쓰여진 두 사서엔 김알지라고 하며 신화화했다. 그러면 신라때 성한왕이 고려때 김알지로 둔갑한 것일까.

알지에서 13대 미추이사금까지 계보에 대해

삼국사기에선 알지 - 세한(勢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味鄒)라고 했고,

삼국유사에선 알지 열한(熱漢) -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부(郁部) - 구도(俱道)[혹은 仇刀] - 미추(未鄒)라고 했다. 두 사서의 계보도 거의 일치한다.

 

경주시 양북면 대왕암의 문무대왕릉 /문화재청
경주시 양북면 대왕암의 문무대왕릉 /문화재청

 

그러면 김알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신화를 통해 탄생했고, 비슷한 음이 있는 세한(삼국사기) 또는 열한(삼국유사)이 성한왕일 가능성도 있다. 문무왕릉비에 15대조가 성한이라고 했는데, 김씨 왕조 계보상 일치한다고 한다.

학계에선 김알지가 성한왕이라고 보는 설과 알지는 신화적 인물이고 실재한 세한이 성한왕으로 보는 설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당대에 쓰여진 금석문과 후대에 쓰여진 사서에 차이점이 발견될 때엔, 당대의 자료를 우선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성한왕이 김씨 왕조의 시조이며, 알지는 신라시대 김씨 집단에 떠돌던 설화가 고려시대에 부활하면서 사서에 기록됐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민족 모두가 단군의 아들이라는 신화가 일제때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임을 감안할 때, 알지 신화도 1천년 후 가공의 인물을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흉노족의 후손을 정리해보자.

흉노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성한왕이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북쪽 충청도 일대와 남쪽 경상북도 일대에 본거지를 형성했다. 성한왕의 후손들이 백제에 밀려 경주로 내려갔지만, 당장에 왕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박씨와 석씨 사이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힘을 길러 미추 때, 임금을 한번 세운후 내물이사금 이후 김씨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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