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⑤…유방의 굴욕, 묵돌에 패해 공주 보내다
흉노⑤…유방의 굴욕, 묵돌에 패해 공주 보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5 14: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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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와 형제 조약 맺고 조공…여태후에게 조롱조 서신 보내기도

 

진한(秦漢) 교체기에 중원의 한족 세력은 서로 대권을 쟁취하는데 몰두하느라 북방 흉노에 대처할 겨를이 없었다. 이 시기에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는 동으로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그 잔여세력인 오환선비(烏桓鮮卑)를 대흥안령으로 몰아냈다. 또 월지(月支)를 격파해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빼앗고 중앙아시아로 내쫓았다. 하서주랑은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로 동쪽 오초령(烏鞘嶺)에서 서쪽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 남북으로 남산(南山)과 북산(北山) 사이에 펼쳐진 9km의 평지를 말한다. 묵돌은 또 북방의 정령(丁零), 견곤(堅昆)의 부족을 정복해 세력을 바이칼 일대로 확대했다. 남쪽으로는 진()나라 장수 몽염(蒙恬)에게 빼앗겼던 하투평원(河套平原, 오르도스)를 되찾았다. 이어 진시황이 그토록 매달렸던 만리장성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한족 지역인 화북지대인 마읍(馬邑), 태원(太原), 진양(晉陽)까지 공격했다.

묵돌 시대에 흉노의 영토는 동쪽으로 요동, 북쪽으로 예니세이강 상류, 서쪽으로 신장(新疆)지역, 남쪽으로 오르도스와 칭하이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흉노의 위협은 이제 막 중원을 통일한 한()의 유방에게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한나라 제후였던 제후 한왕(韓王) ()마저 묵돌에게 투항했다. 흉노는 자신들을 활을 쏘는 병사라며 공현지사(控弦之士) 30만명을 확보하고 있다고 호언했다.

 

하서주랑이 있는 간쑤성 /위키피디아
하서주랑이 있는 간쑤성 /위키피디아

 

중원을 통일한 유방(劉邦)은 흉노를 정벌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진시황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흉노를 정벌해 크게 성공했다. 나도 항우를 무찌르고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니, 진시황보다 못할 것이 없지 않는가.”라고 생각했다.

BC 20010, 북방은 이미 겨울에 접어들었다. 한고조 유방은 3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혹독한 추위와 맞서며 북쪽으로 진군했다. 흉노의 선봉은 한때 동료였다가 배신한 한왕 신이었다. 신은 곧 등을 돌려 퇴각했다. 묵돌은 좌현왕과 우현왕의 군대를 보내 한왕을 지원했다. 두나라 군대는 진양성에서 접전을 벌였는데, 흉노가 밀렸고, 한군은 흉노 점령지역에서 대량의 가축을 포획했다.

한고조 유방 /위키피디아
한고조 유방 /위키피디아

 

초전의 승리가 유방의 기대를 잔뜩 부풀렸다. 이 역시 묵돌의 작전이었다. 유방은 여세를 몰아 북상할 채비를 서둘렀다. 유방은 교활하게 군신들을 다룰줄 알았지만 군사 적전에는 무지한 사람이었다.

유방은 일단 정찰병을 파견했다. 묵돌은 이 계획을 역이용했다. 흉노의 정예부대와 살진 가축들을 숨겨 놓고 본진에는 오합지졸과 병들고 약한 가축들을 남겨 두었다. 한의 정찰병들은 돌아와 흉노를 무너뜨릴수 있다고 보고했다.

유방은 믿기지 않아 신하 유경(劉敬)을 보내 재정찰을 하게 했다. 그런데 유경의 보고는 달랐다. 유경은 전쟁을 할 경우 대개는 군대의 규모를 과장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흉노의 노약한 군사와 가축들만 보였으니, 이는 분명히 우리를 속이고 매복시킨 연막전술입니다. 흉노를 공격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유방은 앞서의 정찰 보고를 믿고 이미 출병을 명령한 상태였다. 황제는 유경이 군심을 동요시키고 있다고 호통을 치고, 그를 감금시켰다.

유방은 출병 명령을 내렸다. 자신이 기병대를 이끌고 선두에 섰다. 연이어 폭설과 혹한이 반복되었고, 땅은 얼어붙고 병사들은 손가락까지 동상에 걸렸다. 이런 난관을 뚫고 유방의 기병대는 평성(平城, 지금의 大同市)에 도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나라 군대는 보병이었기 때문에 멀리 쳐졌고, 선두 기병대와 합류하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이때를 기다려 묵돌의 흉노군이 사면에서 공격했다. 유방의 군대는 백등산(白登山)에 올라가 후방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백등산은 선세가 험준하고 방어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흉노군은 백등산을 겹겹이 에워싸고 공격은 하지 않았다. 유방의 군대를 굶겨죽이기로 한 것이다.

유방의 한군은 7일 밤과 낮을 포위당해 식량이 끊겨 전멸의 위기에 놓였다. 보급물자는 후방 부대가 올 때까지 기대려야 했다. 병사들은 마무것도 먹지 못해 활을 쏠 힘도 없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때 묵돌이 연지(閼氏, 부인)와 함께 군진을 지휘하는 모습이 한군에 포착되었다. 한의 진평(陳平)이란 자가 꾀를 내었다. 진평은 연지에게 밀사를 보내 값비싼 보석을 바쳤다. 연지는 마음이 동했다. 그때 밀사는 한폭의 미인도를 슬쩍 꺼냈다. 한나라가 그림에 그려진 미인을 선우에게 바칠 계획이라며 연지의 마음을 떠보았다. 연지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는 남편 묵돌에게 군대를 철수하자고 설득했다. 묵돌은 부인의 요청이 있는데다 한의 후방부대가 접근해 오고 있는데 대해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마침 한왕의 부장들이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한군과 공모했다고 의심하고 묵돌은 포위망 한쪽을 풀어주었다.

유방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위를 뚫고 나와 북상하는 후방부대와 합류했다. 이어 유방은 곧바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백등산 전투도 /바이두백과
백등산 전투도 /바이두백과

 

유방은 돌아와 자신에게 직언을 한 유경을 불러 흉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유경은 간했다. “흉노를 무력으로 제압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친을 위해 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묵돌이 폐하의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폐하의 외손자인 그의 아들이 선우가 될 것이니, 그들과 사돈이 되면 전쟁을 줄일 것입니다.”

한번 크게 혼이 난 유방은 더 이상 흉노와 싸우는게 진저리가 났다. 게다가 당시 한나라는 중원을 통일했지만 제후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란의 후유증도 아물지 않았다.

유방은 유경의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흉노와 화친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맺었다. 화친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출가시킨다.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한과 흉노가 형제의 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의 맹약은 흉노가 형이 되고, 한나라가 동생이 되는 것을 이른다. 한은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흉노에게 공녀를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입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한-흉노 백등산 전투 /바이두백과
한-흉노 백등산 전투 /바이두백과

 

유방은 공주를 보내야 했다. 유방은 여후(呂后)와의 사이에 공주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애지중지하는 딸을 묵돌에게 주긴 싫었다. 그는 황족 가운데 다른 공주를 물색해 묵돌에게 시집보냈다. 혼수로는 황금 천금을 주고 매년 솜과 고급비단, , 음식을 보낼 것을 약속했다. 또 국경에 시장을 열어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역하게 허락했다.

BC 198년 가을, 종실의 공주를 시집보낸 후 유방은 개국공신인 진희(陳豨)를 장군으로 삼아 변방을 감독케 했는데, 진희는 등을 돌려 흉노와 결탁해 그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대왕(代王)이라 칭했다. 유방은 진희를 제압하는데 애를 먹었다. 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주민 1만명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했다.

유방은 내란을 진압하는 가운데 병을 얻어 BC 195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방이 죽고 묵돌은 유방의 미망인인 여태후(呂太后)에게 희롱조의 서신을 보냈다.

그대는 혼자 된 몸이고 나 역시 쓸쓸히 홀로 있어 즐겁지 아니 하니, 두 군주가 스스로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채워봄이 어떠하겠소.”

말인즉, 나도 아내가 없고 당신도 남편을 잃었으니, 둘다 부부의 인연을 맺어 남은 인생을 함께 하자는 것이다. 여태후와 대신들은 묵돌이 일국의 국모를 모욕했다고 분기탱천했다.

용맹무쌍하기로 유명한 장군 번쾌(樊噲)가 얼굴을 붉히며 신에게 10만의 병사를 주면 당장 흉노를 토벌하고 오겠다고 했다.

번쾌는 유방을 따라 흉노를 공격했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당한 장수였다. 다른 대신들이 만류했다. “번쾌는 황제를 위험에 빠뜨리고도 이제 와서 큰소리치니, 이는 태후를 농락하는 것입니다.”

여태후는 여걸이었다. 남편이 죽고 한왕실의 실권을 잡고 여씨정권을 수립한 인물이다. 유방이 총애하던 후궁 척희(戚姬)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 아들인 여의(如意)도 독약을 먹여죽인 그런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태후는 현실적으로 판단했다. 그녀는 유화론을 펴는 신하들의 간언을 묵묵히 듣고는 묵돌을 달래는 답장을 썼다.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합니다. 선우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우께서 저를 찾아오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저희 나라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선우의 관용을 바랄 뿐입니다. 여기 어가 두 대와 준마 두 필을 바치니 필요할 때 사용하길 바랍니다.”

그러자 묵돌은 또다시 사자를 보내 정중히 사과하며 중국의 예절을 몰라 그런 불경을 저질렀으니, 용서를 빈다며 말을 선물했다. 쌍방은 다시 화친관계를 회복했다.

그후로도 한나라는 혜제, 문제 때에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냈다. 만리장성은 두나라의 국경이 되었다.

BC 174년 묵돌은 병사했다. 묵돌이 죽은후 아들 계육(稽粥)이 즉위했으니, 노상선우(老上單于).

흉노와 한나라의 화친은 그후 50년간 지속되었다. 그동안 한나라는 내부 반란을 진압하면서 군사를 정비하고 힘을 비축했다. 그 힘은 한 무제(武帝) 때에 위력을 보이게 된다.

 

한-흉노 강역도 /위키피디아
한-흉노 강역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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