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⑥…장건, 서역에서 인도 가는 길을 엿보다
흉노⑥…장건, 서역에서 인도 가는 길을 엿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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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지와 동맹 맺으러 서역 여행…군사동맹에 실패했지만 실크로드 개척

 

BC 174년 흉노의 영웅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병사하고 아들 계육(稽粥)이 이어받으니, 노상선우(老上單于). 재위기간은 BC 174~160년으로 14년간이다.

노상은 한 문제가 보낸 종실의 공주와 혼인하고, 공주를 따라온 한족 출신 환관 중항열(中行說)을 정치고문으로 삼았다. 중항렬은 한 조정의 요구로 마지못해 흉노로 끌려갔는데, 그는 내가 반드시 한의 재앙이 되리라고 앙심을 품고 흉노에 오자마자 투항했다. 그는 선우에게 한나라에서 보내오는 비단이나 음식을 받는 것이 흉노를 약화시키는 것이므로, 필요한 물품은 한나라를 쳐서 약탈해 오면 된다고 부추겼다. 노상은 중항열의 가르침대로 수시로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 변방을 침략해 약탈했다.

노상선우 시절에도 흉노는 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는 말년에 눈을 서쪽으로 돌려 지금의 신장(新疆) 지역에 남아 있던 월지(月支)를 공격했다. 월지는 이미 묵돌선우 시대에 흉노의 공격을 받아 왜소해져 있었다. 노상은 월지 왕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해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패전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참하다. 백성들은 무차별로 죽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끌려간다. 여자들은 성 노리개가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의 군왕은 살려두는 것이 승자의 아량이고 관례였다. 노상선우는 월지 왕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어 거기에다 술을 따라 마셨다. 오랑캐 치고는 잔인했다. 이 월지왕 해골 술잔은 흉노의 궁전에 대대로 보관되어 BC 43년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한나라와 맹약을 맺을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월지 사람들은 원한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어쩌랴. 힘없는 민족은 도망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살던 곳을 버리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지금 카자흐스탄의 이리(伊犁, Ili) 분지로 갔다. 그곳에는 대완(大宛)이란 나라가 있었다. 그곳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아무다리아강과 아랄해 사이의 초원에 자리를 잡고 나라이름을 대월지(大月支)라고 지었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이다. 월지족은 원래의 고향을 소월지라고 했다.

 

한무제 /위키피디아
한무제 /위키피디아

 

세월이 20여년 흘러 BC 141년에 한 무제(武帝)16살의 나이에 황제에 등극했다. 무제가 등극할 때 한나라는 안정되었다. 먹을 것아 남아돌아 버려질 정도였고, 길바닥에 돈을 뿌려도 누구 하나 줍는 이가 없었으며, 전투용 말이 30만필이나 늘어났다.

장건 상 /위키피디아
장건 상 /위키피디아

 

재위 초기에 무제는 투항한 흉노인으로부터 월지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월지는 원래 돈황(敦煌)과 대련산 사이에 살고 있었지만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쫒겨 났으며, 월지왕의 목을 베어 술을 담는 그릇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월지는 규수(媯水, 아무다리아강)로 가서 대월지를 세웠는데, 도움을 청할 곳이 없어 흉노에 원한은 갚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제는 알게 되었다.

한 무제는 규수라는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몰랐다. 아무튼 무제는 대월지와 연합해서 흉노를 협공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역(西域)으로 갈 사자를 모집할 것을 지시했다.

이 때 무제 앞에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이 한중(漢中) 사람으로 낭관(郎官) 지위에 있던 장건(張騫)이었다. 무제는 장건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사절단장을 맡기고 함께 수행할 모험가들을 대거 붙여 주었다.

BC 138, 장건은 흉노인 당읍부(堂邑父, 甘父라고도 함)를 비롯해 1백명의 무사들을 이끌고 월지를 찾아 나섰다. 장건 일행이 월지로 가려면 간쑤성(甘肃省)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지나야 했다. 하서주랑은 이미 흉노의 지배영역에 있었다. 장건의 사절단은 며칠째 조심스럽게 걷다가 흉노병들에게 포위되어 몽땅 포로가 되어 군신선우(軍臣單于)의 주둔지로 압송되었다. 다행히 장건 일행은 한의 사절이어서 흉노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흉노는 그들을 잡아 달아나지 못하게만 했다. 1백명을 뿔뿔이 흩어놓고 장건 곁에는 당읍부만 남겨 놓았다.

흉노는 장건이 달아나지 않도록 흉노의 여인을 아내로 맞게 했다. 장건은 처자식이 있음에도 사자의 부절을 항상 지니면서 황제의 사절임을 잊지 않았다.

그러길 10년째 되는 어느날, 흉노인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장건은 당읍부와 함께 도주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걷고 또 걸어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에 도착했다. 지금의 페르가나 분지(Fergana Valley)로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이 겹쳐 있는 곳이다.

 

대완 사람들은 동쪽의 한나라가 부강한 나라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교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장건이 도착하자 환영했다. 장건은 대완의 왕에게 월지까지 데려다 준다면 한으로 돌아가 풍성한 예물로 답례하겠다고 말했다.

대완 사람들은 장건 일행을 강거(康居)까지 안내했다. 강거는 소그디아나(Sogdiana) 족의 나라로, 대완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강거 사람들도 대완인들처럼 장건 일행을 환대하며 월지까지 안내해 주었다.

이 무렵 월지족은 대하(大夏)족을 격파하고 안정된 나라를 꾸려가고 있었다. 월지족이 물리친 대하는 박트리아(Bactria)로 중앙아시아와 이란 북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지배하고 있던 나라였다.

월지족은 과거의 원한을 잊고 있었다. 이제 먼 곳에 와 주변의 적을 물리치고 편안한 땅을 얻었다. 장건과 당읍부는 대월지의 군주에게서 아주 정중한 예우를 받았지만 흉노의 정벌에 동참시키지는 못했다. 장건은 그곳에서 1년여 머물렀다.

장건은 하는수 없이 발걸음을 되돌렸다. 귀국길에도 하서주랑을 거치지 않을수 없었다. 이번에도 장건은 흉노병에게 붙잡혔다. 장건과 당읍부는 하는수 없이 흉노의 땅에 머물렀다. 1년후 흉노 내부에 내란이 일어났다. 군신선우가 죽고 태자와 이치사선우(伊稚斜單于)가 권력 다툼을 하면서 일대 혼란에 빠졌고, 장건은 그 틈을 타서 당읍부와 함께 도망쳤다. 처음 갈 때 백여명이었지만 13년후에 돌아올 때는 두 사람 뿐이었다. 장건은 BC 126년에 수도 장안(長安)에 도착해 한무제를 알현했다.

무제는 장건이 돌아오자 크게 기뻐했다. 무제는 그를 대중대부(大中大夫)로 봉하고 당읍부를 봉사군(奉使君)으로 봉했다.

 

장건 원정로 /김현민
장건 원정로 /김현민

 

대월지에서 돌아온 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衛青)이 이끄는 흉노 원정군에 참여해 그동안 익힌 흉노에 대한 정보를 활용해 승전에 기여한다. 위청의 건의로 장건은 박망후(博望侯)로 승진한다.

장건은 또다시 모험의 욕구에 불탔다. 그는 여행중에 들은 지식을 한무제에게 아뢰었다.

대하라는 나라에서 촉(, 쓰촨성)에서 만든 대나무 지팡이와 비단을 보았습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더니, 신독(身毒, 인도)에서 사왔다고 했습니다. 신독은 대하에서 동남쪽으로 몇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나라인데, 기후가 아주 더운 곳입니다. 그곳엔 전쟁에 코끼를 동원한다고 합니다. 이 길로 가면 촉()에서 서남쪽으로 가 신독을 거쳐 대하고 간다면 흉노를 거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장건은 윈난(雲南)에서 버마(미얀마)를 거쳐 인도를 갈수 있다고 보았다. 장건은 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오손(烏孫)과는 동맹을 맺을수 있을 것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했다.

무제의 명이 떨어졌다. 무제는 장건을 중랑으로 삼고 오손을 향하게 했다. 장건은 3백명을 인솧했고, 여러명의 부사(副使)를 두어 혀니에서 필요하면 주변 여러나라로 파견할 요량이었다.

BC 119년 장건은 두 번째 여행에 나서 오손에 도착했다. 오손은 내란 중이었고, 흉노와의 적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손은 한나라와 교류를 원했기 때문에 장건 일행을 극진히 대우하면서 자신들의 사자를 한나라에 파견했다. 장건은 두 번째 여행에서도 오손과의 동맹을 맺지 못했지만, 오손의 사자와 함께 BC 115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건은 두 번째 여행에서도 오손과의 군사동맹을 맺는 것을 실패했지만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무제는 조카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으로 시집보냈고, 이후에도 한나라는 오손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한무제 시대 한나라와 서역국가 /위키피디아
한무제 시대 한나라와 서역국가 /위키피디아

 

장건은 또 부사들을 대완, 강거, 대월지, 대하, 안식(安息, 페르시아), 신독, 우전(于闐), 우미 등 각지에 파견했다. 장건의 부사들 가운데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 남쪽을 따라 신독을 향해 남쪽으로 가던 부류는 윈난성 곤명(昆明)에서 현지 부족들에 의해 길을 차단당했다. 그들은 전국(전월)까지 갔지만 현지 부족에게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했다. 다른 부류는 각국의 사자들을 하나둘씩 데리고 돌아왔다.

무제는 비록 신독과 우호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서역의 여러나라와 교류를 하게 된 것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했다.

 

돈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에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 /위키피디아
돈황 막고굴 제323굴 북벽에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 /위키피디아

 

실크로드(silk road)라는 용어는 독일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1877년 출판한 중국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는 한나라 시대에 중앙아시아와 인도 사이에 비단 무역을 위주로 한 교통노선을 일컸는다. 이후 연구 결과, 이 길이 서쪽 지중해 서안과 소아시아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이 무역로는 장건이 2차 서역 방문 후에 뚫렸고, BC 60년 경에 비로서 원활하게 왕래가 이뤄졌다.

장건은 실크로드의 개척자로 통한다. 7세기에 돈황 막고굴(莫高窟) 323굴 북벽에 장건출사서역도’(張騫出使西域圖)라는 벽화가 그려졌다. 장건이 죽은지 8백년이 지난 뒤에 벽화가 그려질 정도로 실크로드 지역에 그의 명성은 드높았다.

 

실크로드 /위키피디아
실크로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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