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⑦…漢과 43년 전쟁, 하서주랑-오르도스 잃다
흉노⑦…漢과 43년 전쟁, 하서주랑-오르도스 잃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7 14: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무제의 장기 소모전에 몽골고원으로 쫓겨나…최후 승자는 한족

 

()나라 제 7대 무제(武帝)16세에 황제에 올라(BC 141) 69세에 사망할 때(BC 87)까지 무려 53년간 재위했다. 그는 재위 기간에 북쪽의 흉노, 서쪽의 서역, 동쪽의 고조선, 남쪽의 민월(閩越)을 정복해 한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황제로 기록된다.

특히 그는 흉노와의 화친을 깨고 40년간 전쟁을 벌이며 흉노를 고비사막 북쪽으로 몰아냈다. BC 133년 마읍전투(馬邑之戰)에서 시작해 BC 90년 한의 장수 이광리(李廣利)가 흉노에 잡혀 투항할 때까지 43년의 한-흉노 전쟁은 한 무제의 재위기간을 거의 관통했다. 그사이에 흉노에서는 군신(軍臣), 이치사(伊稚斜), 오유(烏維), (), 구리호(呴犁湖), 차제후(且鞮侯), 호록고(狐鹿姑) 7대의 선우(單于)가 교체되었다.

애초에 한무제는 장기전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흉노가 끈질기기 저항하는 바람에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숱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냈다. 또한 수많은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이 기나긴 전쟁을 통해 중원의 한족은 중국 대륙의 절대적 지배 종족이 되었고,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주류 종족을 한족(漢族)이라 하고, 그들의 문자를 한자(漢子)라고 하는 것도 이때 형성되었다. 한족이 중화의 중심이 된 것도 한 무제가 흉노를 밀어내고 주변의 소수민족들을 제압했기 때문이고,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착각하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40여년간의 긴 전쟁에서 한은 흉노에게서 하서주랑(河西走廊)과 하투평원(河套平原, 오르도스)를 빼앗았다.

하서주랑은 흉노의 중요한 목축기지이며, 언지산(焉支山)에서 나는 염료(紅藍)는 부녀자들이 연지(臙脂)를 찍을 때 쓰는 화장품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 지역을 잃게 된 후 흉노인들은 너무나 상심해 기련산(祁連山)을 잃었으니, 내 가축들이 쉴 곳이 없구나. 내 언지산을 잃었으니, 우리 아녀자들은 염료도 쓸수 없겠구나하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지금의 간쑤성(甘肃省)에 위치한 하서주랑은 신장(新疆)은 물론 중앙아시아를 통하는 비단길(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한족 정권이 탈취함으로써 서역으로 세력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오르도스는 흉노의 발원지로 목축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중원의 중심부인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 가까워, 한족 정권으로서는 국방을 강화하게 되었고, 흉노로서는 주요 경제활동지역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서주랑의 서쪽 끝, 돈황(敦煌)의 고대 유적지 /위키피디아
하서주랑의 서쪽 끝, 돈황(敦煌)의 고대 유적지 /위키피디아

 

-흉 전쟁은 일승일퇴를 거듭했다. 하지만 장기전에서 끝내 한족이 승리했다. 일찍이 흉노에 투항한 한족 중항열(中行說)은 기병 중심의 흉노가 속전속결에는 능하지만 장기전에는 질 것이라고 염려한 바가 있다. 한 무제는 한족을 배신한 중항열의 우려를 이용했다. 오랜 시간 소모전으로 전쟁을 끌고 가면 흉노는 인구와 경제력에서 압도적 한족 정권을 이길 수 없었다.

한 무제의 승리로 이끈 원동력은 인구였다. 당시 한나라 인구는 6천만명으로 추산되는데, 흉노의 인구는 1백만~150만 정도였다. 한족 사학자들은 한나라 군대의 사망자를 축소하고 흉노의 사망자를 과대포장하는 경향이 있지만, 서로 비슷하게 사망했다고 해도 흉노의 타격이 컸다. 역사에 기록된 사망자를 합치면 40여년 전투에서 흉노 병사는 20만명 이상 죽었다. 이는 전체인구의 15~20%에 해당한다. 하지만 한족 병사가 같은 비율로 전사했다고 해도 그 비율은 1%도 되지 않는다. 한족의 인해전술이 끝내 흉노를 궤멸 상태로 몰아 넣은 것이다.

경제력도 한나라가 우세했다. 한나라는 고조 유방이 BC 200년 백등산(白登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BC133년까지 흉노에 대항하지 않았다.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을 바치고 황실의 공주를 선우에 주는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무제 이전의 역대 황제는 60년간 내정에 충실했다.

무제가 등극한 초기에 한나라 곳간은 재화가 넘쳐났다. 세금으로 받은 곡물이 넘쳐 지난해 걷은 묵은 식량을 사용했고, 새로 걷은 식량이 또 쌓여 썩어서 묵은 쌀은 먹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동전을 오랫동안 쌓아 놓는 바람에 동전을 꿰었던 끊이 떨어져 흩어진 동전만 해도 수를 헤아릴수 없었다. 무제는 국가 곳간에 쌓인 식량과 돈을 전쟁 자금으로 썼다.

이에 비해 흉노는 주생산지인 오르도스와 하서주랑을 빼앗긴후 사막 벌판을 헤메야 했고, 그나마 흉노에 복속해 있던 오환(烏桓) 등이 한의 압박으로 조공을 끊는 바람에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메말라 갔다.

 

정건의 서역 행로와 한-흉노 전쟁도 /위키피디아
정건의 서역 행로와 한-흉노 전쟁도 /위키피디아

 

그러면 한-흉노의 긴 전쟁을 간략하게 정리한다.

한나라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은 BC 133년이다. 무제는 상인 섭일(聶壹)을 흉노에 투항케 해 군신선우를 꾀어 마읍(馬邑)으로 유인했다. 동시에 이광(李廣) 등에게 30만을 주어 매복시켰다. 군신선우는 10만 군사를 이끌고 내려오다 목동은 없고 가축들만 있는 것을 보고 의심을 품었다. 그는 순찰중이던 한의 병사를 추궁한 끝에 첩자의 꼬임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철수했다. 첫 번째 마읍전투(馬邑之戰)는 무승부였다.

BC 129, 무제는 이광, 공손오, 위청(衛靑) 등에게 군사를 주어 흉노를 협공케 했다. 이번에도 아무런 전과 없이 철수했다.

BC 127, 흉노도 반격했다. 군신선우는 요서 일대를 공격해 요서태수를 죽이고 한군 2천명을 잡아갔다. 흉노는 조양(造陽) 9백리를 점령했다.

무제는 흉노의 약한 고리를 치는 전술로 전환했다. 한군은 우현황의 주둔지인 고궐(高闕, 내몽골 지역)에 공격을 퍼부어 오르도스와의 연계를 차단했다. 그 후 오르도스로 방향을 돌려 빼앗았다. 무제는 그곳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했다. 한은 오르도스를 빼앗음으로써 흉노에 치명타를 주었다. 개전 이래 한군의 첫 승리였다.

군신선우가 죽고 동생인 이치사가 조카인 태자를 제압하고 선우가 되었다. 태자 어단(於單)은 한나라로 망명했고, 무제는 그를 섭안후(涉安侯)로 봉했다. BC 124년에 무제는 위청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흉노 우현왕의 근거지를 공격해 10명의 소왕(小王)15천의 백성을 포로로 잡고 1백만마리의 가축을 빼앗았다.

BC 123, 대장군 위청은 서역을 다녀온 장건(張騫)을 앞세워 출격했다.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곽거병(霍去病)이 흉노 귀족을 비롯해 수백명을 포로로 잡았다. 곽거병은 이때 18살이었다.

하지만 한나라 장수도 두명 전사하고 제후인 흡후(翕侯) 조신(趙信)이 흉노에 투항했다. 조신은 한군의 전략전술을 흉노에게 전해 주었다.

BC 121, 무제는 어린 곽거병의 용맹함에 감탄해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임명하고 기병 1만을 주어 하서주랑으로 보냈다. 곽거병은 후방보급 부대가 없었으므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곽거병은 25백명을 포로로 잡고 32천명을 죽였으며, 휴도왕이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제천금인상을 노획했다.

이치사 선우는 손야왕과 휴도왕이 참패한데 대해 책임을 묻겠다며 선우가 주재하는 막사(單于庭)으로 소환했다. 선우의 소환은 죽음을 의미했다. 혼야왕(渾耶王)과 휴도왕(休屠王)은 한에 투항하기로 약속하고 무제에게 사신을 보냈다. 이때 휴도왕은 마음을 바꿔 항복을 취소했다. 그러자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4만의 병사와 함께 투항했다. 그때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와 동생 윤(), 모친 연지(閼氏)가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 김일제가 한국의 김씨 원조라고 한다.

이해 전투에서 한나라는 하서주랑을 획득하게 된다. 무제는 이 곳에 군현을 설치하고 명마를 사육했다. 흉노는 하서주랑을 잃고 고비사막 북쪽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BC 119, 위청과 곽거병은 각각 5만의 군사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북쪽으로 향했다. 무제는 이번에 흉노를 완전히 뿌리뽑으려 했다. 이치사 선우는 기병 1만으로 대항했지만 패퇴하고 서북쪽으로 도망쳤다. 곽거병은 우현왕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곽거병은 오염된 물을 마신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위청은 선우를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 무제의 냉대를 받았고, 무제의 큰처남 이광리(李廣利)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후에도 한군의 공격이 계속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BC 111년에 공손하(公孫賀)와 조파노(趙破奴)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2천리를 행군했지만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BC 110년에도 무제가 직접 18만 군대를 이끌고 출전했지만 선우는 대응하지 않았다.

BC 103, 조파노가 3만의 군대를 끌고 갔지만 전멸했다.

BC 99년 이광리가 우현왕과 천산에서 전투를 벌여 흉노 1만을 죽였지만, 한군도 2만명을 잃었다. 이 때 이릉(李陵)이 흉노에 항복했다.

BC 97, 이광리 등이 24만군을 이끌고 출격했지만 흉토에 포위당해 큰 타격을 입었다.

BC 90, 이광리 등이 14만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흉노의 매복에 걸려 이광리가 잡혀 투항했다.

 

AD 1세기의 한-흉노 세력권 /위키피디아
AD 1세기의 한-흉노 세력권 /위키피디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흉노는 몽골고원으로 쫓겨났지만, 한나라의 피해도 엄청났다. 특히 한나라의 기병이 큰 손실을 입었는데, 그후 전쟁은 대부분 보병에 의지해야 했다. 보병으로는 흉노를 상대하기 힘들었다. 지나친 원정은 국력을 소진시키고 백성의 생활을 곤궁의 나락에 빠뜨렸다.

한 무제는 BC 89년 더 이상 원정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담은 윤대(輪臺)의 조서를 발표하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다. 그후 문제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슬픔에 빠져 있다가 BC 87년 세상을 하직했다.

 

한 무제는 흉노를 제압한 후 동서남북의 이민족을 침략해 영토를 넓혔고, 그 영토가 후대에 한족 정권인 당()나라를 거쳐 오늘날 중국에 이어지고 있다. 한 무제는 한반도 북부에도 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 무제가 확보한 중국 영토 가운데 그후 독립해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한 곳은 유독 한반도밖에 없다. 우리 역사가 자랑스러운 이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