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⑧…소무와 이릉, 절개 지킨 자와 투항한 자
흉노⑧…소무와 이릉, 절개 지킨 자와 투항한 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28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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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인생스토리…사마천, 이릉 두둔하다 궁형, 후에 ‘사기’ 저술

 

소무(蘇武)와 이릉(李陵), 그리고 사마천(司馬遷). 이 세 사람이 얽힌 스토리는 후대에 깊은 감명을 준다.

때는 한()나라의 무제(武帝), 흉노에선 차제후(且鞮侯) 선우 시절이었다. BC 100(한무제 41), 흉노는 한조(漢朝)에 화친을 제의하며 사신을 보냈다. 무제는 쾌히 승낙하고 흉노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소무를 단장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동행케 했다. 소무의 임무는 오랜 전쟁에서 잡혀간 한족 병사들을 데려 오는 것이었다.

소무는 장승(張勝)과 상혜(常惠)라는 조수를 대동하고 1백명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선우의 막사(單于庭)에 도착했다. 그런데 선우는 진정으로 한나라와 화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끌며 전력을 보강한 후에 한나라를 다시 침략하려는 의도에서 사절단을 이끌고 온 소무를 냉랭하게 대했다.

소무가 사절로 오기 전에 위율(衛律)이라는 한조의 사신이 흉노에 투항해, 선우가 그를 중용해 왕으로 봉해 주었다. 하지만 위율의 조수 우상(虞常)은 마음 속으로 흉노에 투항하지 않았다. 그는 상관인 위율을 죽이고 한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상과 장승은 오랜 친구였다. 우상은 장승에게 위율을 죽이는데 도와달라고 했고, 장승은 기꺼이 응했다. 그런데 그 음모가 발각되어 우상은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에 장사가 없다. 우상은 동조자로 장승을 언급했다.

소무는 부하가 음모에 휘말려 적진에서 심문을 받고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장승과 상혜 두 조수가 달려들어 칼을 빼앗았다.

위율은 장승에 대한 공소장을 선우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선우는 그걸 이용해 소무를 투항케 하라고 지시했다. 위율이 소무를 만나 투항하라고 권유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소무는 칼을 빼 목을 베었다. 소무는 중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위율이 얼른 의원을 불러 소무를 치료케 해 소무는 회복되었다. 장승은 구금되었다.

선우는 소무의 소식을 듣고 탄복하며 위율에게 그가 회복하면 다시 투항을 설득하라고 했다. 위율은 소무의 부하 장승을 처형하는 자리에 소무를 참석케 했다. 위율이 칼을 들어 치려는 순간에 장승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투항했다. 그 자리에서 위율은 소무에게 당신의 부하가 죽을 죄를 지었으니, 당신도 투항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말했다.

위율이 소무를 칼로 내리치려 하자, 소무는 목을 쑥 내밀었고, 소무는 도리어 칼을 내려 놓았다. 위율은 소무를 설득했다.

나도 흉노에 투항한 사림이오. 나는 왕이 되어 수많은 노예와 말을 가지고 부유한 생활을 하오. 소 선생도 더 이상 고집을 하지 말고 투항하면 나처럼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소. 목숨까지 내놓을 필요가 있소. 내가 권하는 대로 하면 우리 서로 결의형제가 될 것이오.”

그러자 소무는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너 이놈. 한조의 신하로 치욕스럽게 적에 투항해 벼슬을 하느냐. 나는 투항하지 않는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

선우는 소무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목숨만은 살려 두었다. 선우는 소무를 북해(北海, 바이칼)로 보내 양을 방목케 했다. 또 투항하지 않은 조수 상혜를 소무와 갈라 추방했다.

소무는 북해에서 나물도 캐고, 들쥐를 잡아 먹으면서 생명을 부지했다. 하지만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꿋꿋하게 절의를 지켰다. 그는 사신의 부절을 늘 몸에 지니며 한조의 사절임을 잊지 않았다.

 

소무가 양을 기르는 모습(蘇武牧羊圖) /위키피디아
소무가 양을 기르는 모습(蘇武牧羊圖) /위키피디아

 

한나라 조정에는 이릉이라는 소무의 친한 벗이 있었다. 소무가 사절로 떠난 이듬해인 BC 99, 한 무제는 이릉에게 5천의 병사를 주어 흉노를 치게 했다. 흉노의 선우는 친히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릉의 군사를 포위했다. 이릉은 흉노와 처절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그가 포위를 뚫고 나왔을 때 4백명만 남았다. 이릉은 포로로 잡혔고, 이어 투항했다.

이릉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제는 대로해 이릉의 모친과 아내를 감옥에 잡아 넣었다. 무제는 대신들을 불러 놓고 이릉의 죄값을 물었다. 신하들은 이구동성, 이릉을 비난했다.

사마천 /위키피디아
사마천 /위키피디아

 

하지만 유독 한사람, 태사령(太史令) 사마천만이 이릉을 비호했다. “이릉이 비록 패전했지만 많은 적들을 살상했으니, 체면은 유지했습니다. 이릉이 그 자리에서 죽어야 마땅하나 살아 있는 것은 다른 생각이 있을 듯합니다. 아마도 속죄하며 황제의 은덕을 보답하려는 뜻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무제는 사마천에게 투항한 사람을 변호하다니, 태사령은 조정에 반대하는 것이냐며 버럭 화를 냈다.

사마천은 감옥에 갇혔다. 당시 한나라에는 돈을 내면 죽음은 면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에겐 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본뜻이 그게 아니었음을 알리려면 자결을 했어야 했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다름 아닌, 역사서를 쓰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에 사기’(史記)를 쓰고 있었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을 당했다. 남자로선 치욕적인 형을 당한후 그는 자신의 일을 마무리했으니, 고대부터 한무제까지 25백년 중국과 주변민족의 역사를 포괄는 130권의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지금 소무와 이릉의 이 스토리도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한나라에는 이릉이 흉노를 도와 한조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이릉은 진정으로 흉노에 투항했다. 선우는 그에게 왕의 직책을 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흉노의 선우는 이릉이 소무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우는 이릉을 바이칼호에 보내 소무의 투항을 설득하게 한다.

이릉이 북해로 와 소무를 만났다. 이릉은 나는 이제 오랑캐 옷을 입었소라고 말했다. 이릉은 좌임(左袵)의 옷을 입었고, 소무는 우임(右袵)의 웃을 고집했다는 얘기다. 중국인은 옷깃을 오른쪽을 향해 여며 입고, 흉노족은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좌임의 방식을 취했다. 당시 옷을 보고 한족인지, 이민족인지를 구별했다.

이릉이 말했다. “소무 당신은 어차피 중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터인데, 여기서 이렇게 고생할 까닭이 있소? 당신이 아무리 청성한다 한들 누가 알아주겠다.”

소무가 대답했다. “나는 한조의 신하요. 나는 조상과 내 나라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겠소.”

그 다음날 이릉이 다시 찾아와 권유했다. 소무가 짜증을 내며, “난 진작부터 죽기를 각오하고 있소. 대왕(이릉)이 나를 투항하라고 협박하면, 당신 앞에 죽어 버리겠소.”

이릉은 벗이 흉노의 왕이 된 자신을 대왕이라 지칭하며 완고하게 나오자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 이릉은 돌아와 소무에게 약간의 먹을 것을 대주며 도와주었다.

 

이릉이 소무를 배웅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릉이 소무를 배웅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한 무제는 말년에 43년에 걸친 흉노와의 전쟁에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을 반성하며 더 이상 원정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BC 87년 무제가 죽고 그의 아들이 소제(昭帝)로 즉위했다. 소무가 억류되어 있는 동안에 흉노에서도 차제후(且鞮侯)에 이어 호록고(狐鹿姑), 호연제(壺衍鞮)로 선우의 대가 바뀌었다.

한의 소제는 흉노에 화친 사절단을 보냈다. 소무의 조수로 다른 곳에 억류되어 있던 상혜가 그 소식을 듣고 선우의 부하를 매수해 한의 사신을 만났다. 상혜는 소무가 북해에 추방되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조 사신들은 소무의 귀환을 요구했다. 선우는 소무와 상해가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의 사신은 선우에게 항의했다.

선우께서 진심으로 화친하려면 한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황제께서 기러기 한 마리를 쏘아 잡았는데, 그 기러기 다리에 소무가 쓴 친필 편지가 매여 있었습니다. 소무는 편지에 지금 북해에 양을 방목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우께서는 그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우는 깜짝 놀라 사신에게 잘못 했다고 사과하고 소무를 돌려보내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소무는 BC 81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흉노 땅에 온지 19년만이다.

 

소무가 돌아가는 길에 이릉을 만났다. 소무는 이릉에게 같이 귀국할 것을 권하지만 이릉은 거절하고 흉노 땅에 그대로 남겠다고 했다.

소무와 이릉은 석별의 정을 나누면서 서로가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석별하면서 나눈 시와 귀국후 교신한 사연들은 후대에까지 전해 내려와 후세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던져주고 있다.

 

이릉과 소무 /바이두백과, 위키피디아
이릉과 소무 /바이두백과, 위키피디아

 

이릉이 고국으로 떠나는 소무에게 쓴 시의 하나다.

 

攜手上河梁(서로 손을 잡고 다리에 오르네) /游子暮何之Z(떠나는 사람아, 저녁 늦게 어디로 가는가) /徘徊蹊路側(길가를 서성이며 배회하며) /悢悢不能辭(한스럽고 한스러워 말을 잇지 못하네) /行人難久留(가는 사람은 오래 머물 수 없어) /各言長相思(서로 늘 잊지 말자 하네) /安知非日月(어찌 해와 달이 아님을 알리오) /弦望自有時(스스로 차고 기우는 때가 있음을) /努力崇明德(밝은 덕을 모시기로 노력하고) /皓首以爲期(백발이 되어도 만날 것을 기약하네)

 

소무가 이릉에게 화답했다.

 

雙鳧俱北飛(두 마리 오리가 함께 북녘을 날다가) /一鳧獨南翔(하나만 홀로 남으로 날아가네) /子當留斯館(그대는 마땅히 집에 머물겠지만) /我當歸故鄕(나도 마땅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네) /一別如秦胡(한번 헤어지면 중국과 흉노로 갈라서니) /會見何渠央(다시 만남은 멀기만 하구려) /愴恨切中懷(슬픔으로 마음이 찢어져 나가) /不覺淚霑裳(눈물이 옷깃에 젖는데도 알지 못하네) /願子長努力(원컨데 자네는 항상 노력하여) /言笑莫相忘(서로 잊지 말자 웃으면서 말해 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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