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⑩…호한야, 漢에 굴복하고 왕소군을 얻다
흉노⑩…호한야, 漢에 굴복하고 왕소군을 얻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30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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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흉노, 한나라에 산하 자청하며 화친 제의…漢, 공주 대신에 궁녀를 주다

 

흉노 14대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 재위 BC 58~31))는 허려권거선우(虛閭權渠單于)의 둘째 아들로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한 악연구제선우(握衍朐鞮單于)를 뒤엎고 반란에 성공했다. 하지만 호한야는 재임기간 내내 분열과 내란을 겪었다. 어느 해엔 다섯 선우가 병립하는가 하면, 세 명의 선우가 등장해 나라를 분할했다. 마지막엔 친형 호도오사(呼屠吾斯)가 독립해 질지선우(郅支單于)라 칭하는 바람에 늘 수세에 몰렸다.

 

호한야는 새로운 동맹자를 찾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이때 신하 가운데 좌이질자왕(左伊秩訾王)이 한()나라에 신하를 자청하고 지원을 요청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한나라는 두만선우 이래 2백년 가까이 숙적이었다. 지금은 약해져 몽골 초원으로 쫓겨다니지만 한때 한족정권에게서 조공을 받고 공주를 상납받았던 입장에서 그런 중차대한 사안을 선우 혼자 결정할수 없었다.

호한야는 대인회의를 열었다. 찬반 양론에 격렬했다. 대다수 신하들은 강경론을 지지했다. 너느 신하는 본디 흉가 강한 기마병을 가진 나라로 한나라와 버금가는 제국이라며 화친을 반대했다. 또 일단 한나라에 머리를 숙이면 지방 제후들이 떨어져 나가 자멸할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또다른 이는 한족에 투항할 바에에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자고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비분강개해도 서쪽의 질지선우 세력을 이기려면 더 강한 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강경론은 목청만 높을 뿐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현실론도 강경론에 못지 않게 설득력을 가졌다.

<한서> 흉노전에는 좌이질자왕의 형세판단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라의 강약에 때가 있다. 지금의 강국은 한나라다. 오손(烏孫)을 비롯해 여러나라가 모두 한나라에 칭신(稱臣)했다. 차제후선우(且鞮侯單于) 이래로 약한 기세가 회복되지 않아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지금 우리가 한나라를 섬기려 함은 멸망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길이다. 다른 방도가 없다.”

대신들의 찬반 양론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호한야선우가 최종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그는 현실론을 택했다. 질지선우와 전면전을 벌여 모든 것을 잃기 보다는 현재의 힘을 유지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한나라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BC 53년 호한야는 아들인 우현왕 수루거당(銖婁渠堂)과 아우인 좌현왕을 한나라에 보내 한조(漢朝)에 입조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질지선우도 아들인 우대장 구어리(駒於利)를 한조에 입시(入侍)하게 했다. 두 선우가 경쟁적으로 한족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화친을 제의한 것이다.

호한야는 다급해 졌다. 한나라가 서흉노 질지와 손을 잡으면 모든 게 끝장난다. 결국 선우가 몸소 한 황제를 찾아가 입조하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호한야선우는 입조할 것을 청원해 한의 허락을 받았다. BC 51년 호한야가 입조하자 한의 선제(宣帝)는 감천궁(甘泉宮)에서 호한야선우를 맞았다. 흉노 선우로는 중원 황제에 대해 첫 입조였다. 황제와 선우의 회담은 화기애애했고, 선우는 칭신할 것을 다짐하자 황제는 호한야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바오터우시(包頭市) 위치 /위키피디아
바오터우시(包頭市) 위치 /위키피디아

 

한 선제는 호한야선우에게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라고 새겨진 도장을 만들어 주었고, 관대와 마차, 재물, 비단등을 하사했다. 중원에서 새()는 도장이란 뜻인데, 황제의 도장에만 사용하는 특수한자다. 진시황이 황제 인장에 새() 자를 처음으로 썼고, 이는 전국새(傳國璽) 또는 전국옥새(傳國玉璽)라 불리며 천자(天子)를 상징했다. 그런 새를 흉노에도 만들어 줬으니, 흉노의 선우는 제후왕보다 격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선우의 새는 황금으로 제작해 옥()으로 만든 황제의 새와 달리했다. 이는 황제보다 한 등급 낮은 단계라는 것을 의미했다. , 선우는 중원의 제후보다는 높지만 황제보다 낮다는 뜻이었다 호한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을 얻었으므로 만족했다.

호한야는 지원을 약속한 한 선제에 보답으로 현재 내몽골 지역인 광록새(光祿塞)에 머물며 변방을 지키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선제는 병력을 지원해 선우를 호송하고 쌀 34천 말()을 내주었다.

호한야는 지금의 내몽골 바오터우시(包頭市)에 선우정(單于庭) 막사를 설치하고 수도로 삼으면서 한의 변방 수비를 맡았다. 또한 한은 병력을 지원해 호한야를 지켜주었다. 북방의 늑대가 야성을 잃고 정주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족은 초원의 종족을 처음으로 지배하게 되었고, 또한 북호(北胡)로선 처음으로 중원에 순종하게 되었다.

 

호한야선우와 왕소군 상(像) /바이두백과
호한야선우와 왕소군 상(像) /바이두백과

 

서쪽 멀리서 동생 호한야의 동태를 지켜보던 질지선우는 한나라-동흉노의 연합이 자신을 조여올 것을 우려해 한나라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 평화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하지만 한나라는 두 마리 늑대를 모두 잡으려 하지 않았다. 한쪽은 분명히 잡되 다른 쪽과는 대치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흔히 중원의 민족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책을 채택했다. 한나라는 이 정책을 쓰지 않았다. 가까운 동흉노와 우호관계를 맺고 멀리 있는 서흉노와는 적대정책을 취했다. 한은 서흉노의 화친제의를 거절하고 동흉노와 화친을 지속했다.

 

유목민족이 정주하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한나라에 굽신거리는 것도 싫었거니와 주변에 사냥꺼리가 없었다. 부하들은 북족 초원으로 가 사냥도 하고 유목하며 살자고 졸라댔다. 호한야는 하는수 없이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한나라가 불편해 했다. 한나라는 흉노가 그냥 북방에 남아 방패막이가 되어 주길 바랬다. 북방에 주둔하던 한의 거기도위(車騎都尉) 한창(韓昌)과 광록대부(光祿大夫) 장맹(張猛)이 호한야에게 맹약을 체결하자고 요구했다. 호한야는 응했다. 백마를 죽여 제단에 바치고 그 피를 잔에 나눠 마셨다. 그 잔은 노상선우(老上單于, 재위 BC 174~160)가 월지 왕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해골로 것이었다. 흉노는 그 해골잔을 백년 이상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의 조정은 한창과 장맹이 흉노와 대등한 관계에서 동맹을 맺은 것에 화를 냈다. 흉노는 신하국인데 변방의 장군들이 황제의 허락도 없이 예법을 어기며 동맹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두 장수는 그 이유로 벌을 받았다. 하지만 한에 원제(元帝)가 즉위하면서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동맹을 인정했다.

 

서흉노의 질지선우는 한나라-호한야선우의 연합에 협공을 받아 중앙아시아로 이동했으며, BC 36, 한나라의 서역도호(西域都護) 감연수(甘延壽)와 서역부교위(西域副校尉) 진탕(陳湯)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호한야는 기뻐하면서 BC 33년에 한조에 다시 입조했다. 한의 원제는 호한야의 입조에 크게 기뻐하며 궁녀가운데 마음에 드는 여인을 간택하라고 했다.

원제의 궁녀 가운데 왕소군(王昭君)이라는 절세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궁궐에 온지 몇해가 지났지만 황제의 눈에 띠지 않았다. 당시 화가가 궁녀의 얼굴을 그려 황제에 올리면 황제가 그림을 보고 궁녀를 선택해 침소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화공 모연수(毛延壽)가 그녀를 추하게 그렸다. 중국의 야사에 따르면 궁녀들은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화공에 뇌물을 주었다. 그런데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왕소군은 어차피 황제의 눈에 들지 못할 바에야 흉노의 선우에게 간택받기를 바랬다. 선우에 줄 여인을 간택하는 날, 왕소군은 곱게 치장하고 미모를 드러냈다. 호한야는 단번에 왕소군을 찍었다.

왕소군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서시(西施),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貂蟬), 당 현종을 어지럽게 한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중국 고대 4대 미녀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 여인을 흉노에 보내야 했으니, 원제는 화가 났다. 그런데 어찌하랴, 이미 선우에게 한 약속을 뒤집을 수 없었다. 황제는 화풀이로 화공 모연수를 죽여버렸다. 원제는 그녀의 소식이나마 전해 듣고자 왕소군의 동생을 따라 보냈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흉노에 평화를 가져 왔다는 의미에서 영호연지(寧胡閼氏)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호한야는 미녀를 얻었지만 지위는 궁녀였다. 한나라 초기 고조, 문제 때에는 종실의 딸을 선우의 첩으로 보냈다. 이젠 흉노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에 한나라는 더 이상 공주를 선우에 시집보내지 않고 궁녀를 보낸 것이다. 중국의 작가들은 왕소군이 국경을 건너 흉노 선우에게 시집갔다며 소군출새(昭君出塞)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북방 오랑캐에게 더 이상 황족의 여인을 줄수 없으니, 아름다운 궁녀에 만족하라는 숨은 뜻이 깔려 있다.

 

소군출세(昭君出塞) 그림 /바이두백과
소군출세(昭君出塞) 그림 /바이두백과

 

어쨌든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간 이후 흉노는 한나라와 지속적으로 화친을 맺었다. 호햔야 이후의 선우들도 한조에 입조하거나 조공을 하면서 화친을 유지했다.

왕소군은 호한야에게서 아들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를 낳았는데, 후에 그 아들은 우일축왕(右日逐王)이 되었다. 호한야가 죽은 후 그녀는 한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청을 넣었지만 한의 성제(成帝)가 흉노의 풍습을 따르라며 거절했다. 왕소군은 흉노의 풍습에 따라 복주루 선우와 결혼해 다시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은 오랫동안 추운 흉노 땅에 살면서 고향이 그리워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고 심정을 표현했는데, 그 시구가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 왕소군은 72세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한야는 호연왕(呼衍王)의 장녀를 전거연지(顓渠閼氏), 차녀를 대연지(大閼氏)로 들였다. 전거연지에게서 삼남 저막거(且莫車), 사남 낭지아사(曩知牙斯), 대연지에게 장남 조도막고(雕陶莫皋), 차남 저미서(且麋胥)를 보았다. 호한야는 전거연지가 낳은 3남 저막거를 아껴 후계자로 세우려 했지만, 전거연지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동생이 낳은 장남 조도막고를 후계자로 하자고 주장했다. 동생인 대연지는 자신이 언니보다 지위가 낮으므로 조도막고를 세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호한야는 전거연지의 말을 따라 조도막고를 먼저 선우로 세우고 동생들이 차례로 선우가 되게 했다.

호한야가 BC 31년 사망한후 맏이 조도막고가 복주류선우(復株絫單于)로 즉위하고, 그 뒤를 이어 형제 6명이 차례로 선우가 된다. 그 순서는 15대 복주류(재위 BC 31~20), 16대 수해(搜諧, BC 20~12), 17대 거아(車牙, BC 12~8), 18대 오주류(BC 8~AD 13), 19대 오루(AD 13~18), 20대 호소이다도고(AD 18~46)이다. 6명의 형제가 나란히 77년간 사이좋게 제위를 물려주면서 흉노를 통치한 것이다. 믿기는 어렵지만, 역사에는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왕소군도 /바이두백과
왕소군도 /바이두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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