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⑪…질지, 로마 병사 만나다…여간촌의 비밀
흉노⑪…질지, 로마 병사 만나다…여간촌의 비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3.3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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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패잔병, 중앙아시아서 흉노와 연합했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견해

 

질지선우(郅支單于)는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형이지만 정통은 아니다. 선우의 정통은 대인회의에서 추대받은 호한야이고, 질지는 동생에 반기를 든 대립선우일 뿐이었다. 두 형제가 흉노를 동서로 갈라 대립했다.

BC 51년 호한야가 수세에 몰려 한()나라와 동맹을 맺자, 질지가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BC 49년 질지선우는 호한야와 한나라가 연합해서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했다. 서쪽 천산(天山)산맥 너머 페르가나(Ferghana) 분지에는 오손(烏孫)이 버티고 있었다.

오손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최강국으로, 중원의 한나라와 북방의 흉노가 서로 손을 내밀어 제휴를 희망했다. 천산산맥 서쪽과 이식쿨(Issyk-kul) 호수 주변은 현재 키르키즈스탄의 영토인데, 초원이 비옥해 유목민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 흉노에 쫓긴 월지족이 이곳을 차지했다가 다시 흉노가 월지족을 내쫓고 오손이 살도록 했다. 오손은 이시쿨호 남쪽에 적곡성(赤谷城)을 쌓아 중원과 흉노의 공격에 대비했다.

 

질지는 천산산맥을 넘어 오손을 쳐들어가 이식쿨 호수 유역을 차지했다. 이어 서쪽의 견곤(堅昆)과 북쪽의 정령(丁零)도 굴복시켜 견곤에 선우의 천막을 치고 수도로 삼았다. 질지선우는 서천해서도 세력을 키워 동쪽의 호한야를 쳐 고토를 회복할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손은 서흉노에게 땅을 뺏기자 한나라에 지원을 요청지만 한나라는 군사를 동원할 여력이 없어 사신을 보내 조정을 시도했다. 질지는 한의 사신 강내시(江乃始)를 죽여 버렸다. 질지는 한의 사절을 죽이고 나서 겁이 났다. 그는 한나라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 다시 서쪽의 강거(康居)로 이주하겠다고 강거 왕에게 요청했다.

강거는 동쪽으로 오손, 서쪽으로 파르티아(페르시아)라는 강국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강거 왕은 질지가 서흉노군을 이끌고 와주길 바랬다.

질지의 군대가 이동한 시기는 엄동설한이었다. 출발할 때 3만명이었지만, 나흘 밤낮으로 몰아치는 무지막지한 눈보라로 많은 병력이 동사하고 1만명이 남았다. 또다시 강행군을 했다. 더 강한 눈보라와 혹한이 다쳤다.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버렸다.

BC 44년초, 마침내 질지와 그의 군사는 마라칸다에 도착했다. 마라칸다(Maracanda)는 그리스 알렉산더 대왕이 BC 329에 이곳을 공격했을 때 정한 지명으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 이때 끝까지 살아남은 흉노 병사는 3천명이었다.

강거 왕은 10만쯤 될줄 알았던 흉노 병사가 3천명으로 줄어든 사실을 알고 실망했지만, 흉노군의 용맹을 알기 때문에 반갑게 맞았다. 강거 왕은 탈라스강(Talas River, 한자어로 都賴水) 주변의 비옥한 초원을 질지에게 내주어 머물도록 했다. 게다가 강거 왕은 딸을 질지에게 주었고, 질지도 딸을 강거 왕에게 주어 상호 혼인동맹을 맺었다.

질지가 서쪽으로 이동하자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오손이 다시 영토를 회복했다. 질지선우는 기력을 회복한 다음에 강거 왕의 도움을 얻어 수시로 오손을 공격해 적곡성까지 쳐들어갔다. 오손은 황급히 한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한나라는 사신을 보냈지만 질지는 한의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거의 위치 /위키피디아
강거의 위치 /위키피디아

 

이 무렵 질지는 낯선 이방인 병사들을 만난다. 이들 이방인은 파르티아에서 건너왔다. 그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병사들이었는데,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중앙아시아로 도주해 질지선우를 만났다는 설이 있다.

이 가설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영국인 중국학자 호머 더브스(Homer H. Dubs). 더브스는 1940년대에 중국 간쑤성(甘肅省) 여간촌(驪靬村)이란 마을의 주민들이 로마군단 투항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로마인들이 질지선우의 군대에 편입되어 한나라 군사와 싸우다가 패배한후 중국에 살겠다고 요청해 여간촌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로마병사의 이동로 /김현민
로마병사의 이동로 /김현민

 

그러면 이 로마인들은 어떻게 멀리 중국에 들어와 정착촌을 만들었을까. 로마 공화정 말기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3두 체제를 구성했다. 이중 한 사람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가 카이사르와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파르티아 공격에 나섰다.

BC 53년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은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 근처인 카레(Carrhae)에서 오로데스 2(Orodes II) 국왕이 이끄는 파르티아 군에 무참하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병사 2만병이 전사하고 1만명이 포로로 잡힌다.

여기에서 두가지 가설이 나온다.

첫 번째는 이 때 크라수스의 맏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Publius Licinius Crassus)가 이끄는 6천명의 군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뚤었는데, 그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지 33년후 로마와 파르티아가 평화협정을 맺고 포로를 교환하면서 사라진 6천명의 종적을 찾았는데, 끝내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파르티아 군을 피해 중앙아시아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질지가 사마르칸트에 도착한 시기는 BC 44년이고 로마군단의 카레 패배 시기는 BC 53년으로, 9년의 차이가 난다. 아마 이때 파르티아에서 도주한 로마병사들이 사마르칸트에서 질지를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게 호머 더브스의 견해다.

또 다른 가설은 푸불리우스의 군대가 아니라, 로마인 포로 1만명이 파르티아에서 액문(扼門)이라는 굴욕을 당해 로마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중앙아시아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액문은 창을 가로로 세워 포로가 그 아래로 지나가면 살려주는 방식인데, 로마인들은 액문을 통과해 목숨을 구걸한 패잔병을 국내로 받아들이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파르티아에서 굴욕을 당한 로마의 포로들은 로마로 돌아갈수 없어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파르티아의 영역 /위키피디아
파르티아의 영역 /위키피디아

 

어쨌든 질지가 강거에서 만난 이방인이 로마병사였다는 가설을 전제로 스토리를 전개해 보자. 사마르칸트의 지배자 강거 왕은 파르티아를 견제하기 위해 로마 병사들을 받아들였고, 질지선우가 건너오자 로마인들을 소개했다. 로마인들은 강거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불어나 젊은 대표를 선출해 로마 왕자라고 불렀다. 질지는 로마인을 반갑게 맞았다. 질지는 딸을 로마왕자에게 시집보냈고, 로마 군단은 질지의 부대에 편입되었다. 질지는 오손과의 전투에 로마군단을 참전시켰다.

 

질지선우는 자기세력을 구축한후 교만해 졌다. 강거 왕이 예를 다하지 않는다며 자신에게 시집온 강거 공주와 말다툼을 벌이다 아내를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강거인들이 분노해 시비를 가리자며 질지성으로 찾아왔다. 그는 강거 귀족과 강거인 수백명을 죽이고 탈라스강에 던졌다.

질지는 강거 왕의 보복이 두려워 질지는 탈라스 강변에 성을 쌓았는데, 그 성을 질지성(郅支城)이라 한다.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탈라스시 근처다. 이 성은 외성에 3중의 목책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다리를 연결하고 내성을 연결하는 지하도를 건설했다. <한서>(漢書)에는 이 성을 중목성(重木城)이라고 표현했다. 이 성의 양식은 로마 성벽과 비슷한데, 로마병사들이 참여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여간촌의 동상 /바이두백과
여간촌의 동상 /바이두백과

 

질지는 주변의 소국을 정복하고, 힘을 키워 호한야의 동흉노를 공격할 태세를 보였다. 그러자 호한야와 동맹을 맺은 한나라가 긴장했다.

BC 37, 한나라 서역도호에 감연수(甘延壽), 부도호에 진탕(陳湯)이 부임했다. 그들은 조정에 질지를 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감연수와 진탕은 황제의 칙령을 위조(假託)해 서역 각지의 군사 4만명을 모아 질지성으로 쳐들어 갔다.

BC 36년에 벌어진 이 질지 전투(郅支之戰)는 서기 751년 고구려 후예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이슬람 세력과 붙은 탈라스 전투에 앞서 8백년 전에 있었던 한족 정권의 서역전쟁이다.

한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질지는 흉노 특유의 유인전술을 포기하고 성내에서 농성전을 펼쳤다. 질지의 중목성은 의외로 견고했다.

이 때 흉노는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한서>에 나오는 얘기다. 어린진은 방패를 촘촘히 붙여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진을 쳐 화살과 창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술로, 로마 군단의 전형적인 전투방식이다.

목책과 어린진의 방어에 고전한 한군은 화공(火攻) 작전을 펼쳤다. 불화살이 날라가 목책을 태워버렸다.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날씨는 목책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성태의 흉노군은 화염에 질식사했다.

성벽이 뚤리고 한의 병사들이 앞을 다투어 성내로 진입했다. 질지는 전사했고, 질지의 가족과 장수 등 1,518명이 살해되었고, 145명이 포로로 잡히고, 천여 명이 항복했다. 항복한 흉노인들은 주변 15개 소국에 분산되었다.

질지는 두가지 불명예를 기록했다. 흉노의 선우로는 처음으로 전사했고, 죽은후 머리가 잘려 시신이 한곳에 매장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어린진 /중국 사이트
어린진 /중국 사이트

 

질지성 전투에 참여한 로마 병사들은 한나라 장수 진탕과 교섭해 중국으로 건너가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로마인 4천여명은 한나라의 승인을 얻어 간쑤성으로 이동해 옛 흉노 절란왕(折蘭王)의 봉토에 거주지를 마련했고, 한나라는 그곳에 여간현(驪靬縣)을 두었다. 여간(驪靬)은 한나라때 로마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방인들은 이 곳을 자래채(者來寨)라 불렀는데, 절란의 음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최근 중국인들은 로마군단과의 관련성이 부각되면서 옛지명을 되살려 자리채를 여간촌으로 바꾸었다.

 

로마 병사 모습을 한 여간촌 사람들 /每日頭條
로마 병사 모습을 한 여간촌 사람들 /每日頭條

 

여간촌에는 현재 4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다수가 유럽인 얼굴을 하고 있다. 여간촌 사람들은 키가 크고 눈동자가 푸르고, 눈언저리가 움푹 패이고 갈색 또는 노랑 머리에 피부에 붉은 기가 돌며 솜털이 길다. 이곳 사람들은 주위에서 황모(黃毛)라 불렀는데, 바깥 출입을 되도록 피했고, 꼭 나가야 할 때는 머리를 검게 물들여 외부인들의 시선을 피했다고 한다.

현대의 유전학자들이 고대의 유물을 토대로 DNA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서 여간현 사람들이 로마인의 후예일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유명한 사학자 레프 구밀레프(Lev Gumilev)는 로마인 가설을 지지했다. 2011년 호주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매튜(Christopher Anthony Matthew)는 이방인 전사는 로마인이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일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여간촌의 정자. 로마식이다. /바이두백과
여간촌의 정자. 로마식이다. /바이두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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