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흉노②…철불부 혁련발발이 세운 大夏
최후의 흉노②…철불부 혁련발발이 세운 大夏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0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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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의 하나로 북위와 싸우다 3대 25년만에 멸망

 

서기 329년 흉노족이 세운 전조(前趙)가 멸망했지만, 또다른 흉노 부족이 오르도스 지역에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철불부(鐵弗部)였다. 전조의 건국자 유연(劉淵)의 부족은 도객부(屠客部)였는데, 도객 흉노가 순수 흉노족이라면 철불 흉노는 선비족(鮮卑族)의 피가 섞인 일종의 혼혈족이었다.

철불부와 도객부는 한 조상에서 내려온 뿌리라고 한다. 남흉노의 어부라선우(於夫羅單于)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좌현왕이었던 장자 유표(劉豹)의 후손이 도객부이고, 우현왕 유거비(劉去卑)의 후손이 철불부라는 것이다.

철불 흉노는 유연의 도객흉노가 중원으로 내려가 한()을 세울 때에도 오르도스에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객부가 종원으로 내려가 오호십육국의 첫 제국을 세웠을 때 철불부의 귀족들은 한 또는 후조에 충성을 했고, 도객부도 그들을 종실로 대우했다. 한조(漢朝) 유총(劉聰) 때 유호(劉虎)가 철불부 촐신이었다.

유호는 전조가 멸망한후 철불 흉노를 이끌고 오르도스 일대에 군벌로 세력을 유지했다. 유호는 북쪽의 선비족 탁발(拓跋)씨가 세운 대()와 씨우다가 중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때부터 철불흉노와 탁발선비는 원수가 된다.

유호가 죽은후 철불 흉노는 갈족의 후조(後趙)에 의지하기도 하고, 저족 부견(符堅)이 세운 전진(前秦)에 기대기도 하면서 부족의 생명을 유지해 갔다.

 

383, 북방을 통일한 부견의 전진이 남조의 동진(東晋)과 일대 결전을 벌였으니, 비수전투(淝水戰鬪)였다. 이 전투에서 전진은 참패하고, 북방이 다시 군벌들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386년 북방에는 선비족 탈발규(拓跋珪)가 강력한 북위(北魏) 정권 수립에 성공했다. 이 틈을 비집고 유호의 손자로 철불흉노를 이끌고 있던 유위진(劉衛辰)은 오르도스 일대 삭방(朔方)의 패자가 되었다. 유위진은 북위와 전쟁을 치렀지만 참패하고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유희진의 종친을 비롯해 철불부 5천명이 탁발규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 대량학살의 와중에 살아남아 도망친 사람이 유위진의 셋째 아들 유발발(劉勃勃)이었다.

 

유발발은 또다른 선비족이 세운 후진(後秦)에 몸을 피했다. 선비족 다란부(多蘭部)의 수령 몰혁간(沒奕干)은 유발발을 보호해주면서 자신의 딸을 주었다. 후진의 황제는 유발발을 안북장군에 임명해 삭방에 주둔하게 했다.

그런데 후진마저 북위와 손잡고 화북 일대를 평정해 나가자, 북위에 원한이 맺혀 있던 유발발은 화가 났다. 유발발은 407년에 3만의 기병을 이끌고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준 장인 몰혁간을 죽였다. 배신의 시대였다. 유발발은 장인의 부족도 장악해 대하(大夏)를 건국했다.

대하는 흉노, 갈족, 선비, 저족, 강족의 오호(五胡)개 세운 16국의 하나다. ()나라는 중국 역사에 나오는 첫 왕조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흉노가 하나라의 후손이라고 기록했다. 이에 유발발은 나라 이름을 대하라고 정하고 대선우가 되었다. 대하를 세운후 유발발은 밝은 빛이 이어진다는 의미로 혁련(赫連)으로 성씨를 바꾸었다. 또 다른 친족들 성씨도 철벌(鐵伐)로 바꾸었는데, “쇠와 같이 남을 정벌한다는 의미다.

 

423년 중원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423년 중원의 형세도 /위키피디아

 

혁련발발(赫連勃勃)은 거칠고 난폭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명을 어긴 신하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무기 제조과정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의 무자비한 통치는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기여했고, 대하의 세력은 확대되었다. 마침 후진 사람 왕매덕(王買德)이 투항해 그에게 유능한 전략전술을 가르쳤다.

혁련발발은 413년에 산시성(陝西省) 유림현에 아주 견고한 통만성(統萬城)을 건설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흉노족의 유일한 성터다. 흙을 쪄서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송곳으로 찔러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통만성이란 이름도 천하를 통일하려는 그의 꿈에서 붙여졌다.

혁련발발은 북연(北燕), 북량(北涼)과 동맹을 맺어 영토를 확장하며 장안(長安)에 접근했다. 장안은 남조의 동진(東晋)이 먼저 점령했다. 그러자 418년 혁련발발은 두 아들에게 군사를 주어 동진을 내쫓고 장안을 점령했다. 장안을 점령한 후 그해 11월 혁련발발은 정식으로 황제에 올랐다.

혁련발발은 신하들에겐 가혹하게 군림했지만 가족은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말년에 태자 혁련궤가 숙부 혁련륜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죽여버렸다. 이에 화가 난 동생 혁련창(赫連昌)이 군사를 이끌고 형 혁련궤를 살해했다. 혁련발발은 아들과 동생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의 승자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425년에 세상을 떠났다.

 

혁련발발이 건설한 통만성 유적 /위키피디아
혁련발발이 건설한 통만성 유적 /위키피디아

 

곧이어 혁련창이 즉위했다.

2대 혁련창의 대하는 내리막길이었다. 북위가 장안을 빼앗고, 통만성을 포위했다. 철옹성으로 지어진 통만성도 혁련창이 북위의 계략에 속아 성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함락되었다. 혁련창은 도주해 안정(安定)을 수도로 삼아 재기를 도모했지만 428년에 북위군과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로 잡혔다.

북위의 3대 황제 탁발도(拓跋燾)는 혁련창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진왕에 봉하고 자신의 여동생도 주었다.

 

혁련창이 잡힌 후에 그의 또다른 동생 혁련정(赫連定)이 제위에 올라 장안을 되찾았다. 혁련정은 남조의 송()과 손잡고 북위에 전쟁을 걸었지만 번번히 패했다. 혁련정은 세력이 약한 서진(西秦)을 공격해 멸망시킨 후 북량(北涼)을 공격하러 가던 중에 몽골계 토욕혼(吐谷渾) 기병대의 습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토욕혼은 혁련정을 북위에 넘겼고, 북위의 탁발도는 그를 살해했다. 혁련정이 살해될 당시 형 혁련창은 북위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혁련창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반란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434년에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대하국은 혁련발발이 수립한 407년부터 혁련정이 포로로 집힌 431년까지 25년간 3대를 끝으로 멸망했다. 대하의 철불 흉노는 중국 북방의 주도권을 놓고 북위와 선비족과 투쟁했지만, 토욕혼이라는 또다른 북방종족에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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