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흉노③…저거몽손 후손들, 서역으로 가다
최후의 흉노③…저거몽손 후손들, 서역으로 가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0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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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십육국의 마지막 흉노정권…멸망한후 흉노, 중국대륙서 소멸

 

중국 역사에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시대가 있었다. 흉노(匈奴(선비(鮮卑(()족 등 북방의 다섯 개 소수민족이 한족정권인 진()나라를 남쪽으로 내쫓고 중원에서 혈투를 벌이던 시기다. 흉노의 일족인 유연(劉淵)304년 한()을 세우면서 시작되는데, 선비족인 북위(北魏)439년에 북조를 통일하면서 끝난다. 130여년에 걸쳐 5개 종족은 서로 물고 뜯으며 우후죽순처럼 열여섯 나라를 세운다.

이 중 흉노족이 세운 나라는 유연의 한(후에 前趙),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세운 대하(大夏),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세운 북량(北涼)등 세 개다. 흉노계 북량이 439년에 마지막으로 북위에 멸망함으로써 오호십륙국 시대는 흉노에서 시작해 흉노의 퇴각으로 끝나고 만다.

유연은 흉노족 가운데 도객부(屠客部)이고, 혁련발발은 철불부(鐵弗部) 출신이다. 이에 비해 저거몽손은 노수호(盧水胡)라는 부족 출신이다. 노수호 부족은 월지족(月支族)이란 설도 있지만 간쑤성(甘肃省) 일대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근거지로 했기 때문에 선주민이었던 월지족과 피가 섞인 흉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전성기의 북량 /위키피디아
전성기의 북량 /위키피디아

 

저거몽손의 북량(北涼) 정권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결과로 수립된다.

저족 출신인 부견(符堅)의 전진(前秦)이 하북 지방을 통일한후 하남의 동진(東晋)과 일대결전을 준비할 때 하서주랑을 수비하던 여광(呂光) 장군이 부견을 배신하고 후량(後凉) 정권을 수립한다. 흉노계 저거씨들은 후량의 고위 관직을 맡으며 여광에 충성했다.

그런데 여광이 동생 여연(呂延)에게 군사를 주어 선비족의 서진(西秦)을 정벌케 했는데, 여연은 서진의 매복에 걸려 죽었다. 이 때 저거몽손의 백부 저거나구(沮渠羅仇)와 저거국죽(沮渠麴粥)이 함께 참전했는데, 황제 여광이 여연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거짓 제보를 믿고 두 백부를 죽여 버렸다.

이에 저거몽손과 사촌형 저거남성(沮渠男成)은 분노로 치를 떨며 반란을 도모했다. 397년 두 사촌형제는 쿠데타에 성공해 후량에서 독립해 북량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데 저거씨들은 자신의 부족에서 군주를 내지 않고 한족 출신인 단업(段業)을 왕으로 추대하고, 저거몽손은 장액태수(張掖太守), 저거남성은 보국장군(輔國將軍)이 되었다.

그런데 단업이 저거씨의 도움으로 왕이 된 후 마음이 달라졌다. 실권을 쥐고 있는 저거씨 사촌형제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왕권이 흔들릴 것을 우려했다. 401년에 단업은 저거남성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죽여버렸다. 이에 저거몽손은 반란을 일으켜 단업을 살해하고 북량의 2대 왕이 되었다.

 

북량(北涼) 시대에 건축된 미륵불 /위키피디아
북량(北涼) 시대에 건축된 미륵불 /위키피디아

 

저거몽손은 남량(南凉)과 손을 잡고 후량을 압박해 멸망시키고, 이후 남량과 대립했다. 411, 저거몽손은 남량의 주요 거점인 고장(姑臧)을 점령하여 남량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412년에는 고장으로 천도하여 하서왕(河西王)을 자칭했다. 414년 이후 남량을 멸망시키고, 서진(西秦)과 대립했다. 421년에는 서량(西凉)을 멸망시키고 돈황(敦煌)를 장악했다.

저거몽손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에 관한 식견이 있었고, 천문도 이해했다. 당시 하서주랑을 통해 인도의 불교가 전해졌는데, 저거몽손은 불교에 심취했다. 그는 인도에서 온 승려 담무참(曇無讖)을 스승으로 모시고 고견을 듣기도 했다. 이 인도 승려는 북위(北魏)에도 불교를 전파했는데, 이에 북위와의 관계를 의심한 저거몽손에 의해 서역에서 피살되었다.

저거몽손은 한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백성들을 편안하게 통치했다고 한다.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백성들이 누구나 진언을 할수 있도록 했다. 또 법을 엄격히 이행해 백성을 해치는 행위는 일체 금지시켰다. 저거몽손은 재위 기간 중에 민생 안정에 힘쓴 결과, 나라의 힘이 부강해 졌다.

특히 돈황을 차지한 후 서역과의 길이 트였다. 서역국가들은 북량에 조공을 바치며 교역의 물꼬를 텄다. 이 무역로는 나중에 북량이 멸망한후 도피하는 길이 된다.

북량이 차지한 하서주랑은 산물이 풍부하지 않는데다 인구도 많지 않아 국력 팽창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북량 정권은 서쪽의 북위와 남조 정권에 조공을 하며 볼모를 보내 친선을 유지했다.

 

실크로드 선성의 돈황과 고창 /위키피디아
실크로드 선성의 돈황과 고창 /위키피디아

 

433년 저거몽손은 병사하고, 그의 아들 저거목건(沮渠牧犍)이 뒤를 이었다. 저거목건(沮渠牧犍)은 하서왕을 자칭하고 문치(文治)을 펼쳤으나, 여색을 밝혔다.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拓跋燾)가 서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저거목건이 도와주었다. 탁발도는 이를 고맙게 여겨 저거목건의 여동생 흥평공주(興平公主)를 후궁으로 맞고, 자신의 여동생 무위공주(武威公主)를 저거목건의 왕후로 주었다.

흉노족은 형이 죽으면 형의 부인을 동생이 취하는 관습이 있었다. 목건은 미모가 뛰어난 형수 이씨(李氏)도 부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씨는 목건 부부를 갈라 놓기 위해 무위공주에게 독을 먹였다. 다행히 무위공주는 살아나 오빠 탁발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탁발도는 분노해 이씨를 사사하도록 요구했지만, 목건은 이를 거부하고 이씨를 피신시켰다.

이에 439, 북위의 황제 탁발도는 군사를 이끌고 북량을 쳐들어 왔다. 북량의 군사는 전투도 제대로 한번 하지 못한채 수도를 내어주었고, 저거목건은 포로로 잡혔다.

북위에 끌려온 저거목건은 황족에 준하는 대우로서 중용되었으나, 그가 항복 전에 수도 고장에서 보물을 몰래 빼돌린 사실이 들통나 탁발도는 저거목건과 그의 여동생, 자신의 누이 모두를 사사토록 했다.

이로써 북량은 멸망하고, 북량의 멸망으로 오호십육국 시대는 끝나게 된다.

 

중국 산장성 고창(高昌)의 고대유적 /위키피디아
중국 산장성 고창(高昌)의 고대유적 /위키피디아

 

이후 목건의 동생 저거무휘(沮渠無諱)가 주천(酒泉)에서 반란을 일으켜 돈황을 점령해 북위와 맞섰다. 하지만 북방의 강자 북위를 이겨낼수는 없었다.

저거무휘 일당은 결국 그들의 선조가 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442년 저거무휘는 1만여 부락민을 이끌고 서역으로 건너가 타클라마칸 사막 북동부에 있는 선선국(鄯善國)을 점령했다. 지금의 고창(高昌)이다. 사막을 건너는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군사를 잃었지만 북위군의 추격을 피할수 있었다. 저거무위는 그곳에서 자립해 북위의 적국인 남조의 송()나라로부터 하서왕(河西王)의 책봉을 받았다.

444년 저거무위가 죽고 그의 동생 저거안주(沮渠安周)가 즉위했다. 그러나 460년 북위에 패해 서쪽으로 도주한 유연(柔然)이 저거안주를 공격했다. 저거안주는 전투에서 패해 죽었다. 고창에서의 저거씨 왕조는 2대 만에 멸망했다.

이후 흉노족은 중원은 물론 내몽골, 몽골고원에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다. 중국 역사에서 흉노족의 기록은 완전히 사라지고, 남은 종족은 선비, 유연, 몽골, 돌궐(투르크)족에 융화되어 소멸되었다.

 

마지막 남은 흉노는 중앙아시아로 건너간 부족인데, 이들은 고향이었던 중국 북방으로 돌아오지 않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바로 서양사에 나타나는 훈족(Hu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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