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자가 보기 싫어 이름 바꾼 덕수궁 대한문
배정자가 보기 싫어 이름 바꾼 덕수궁 대한문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4.08 15: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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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개명… 덕수궁관리소, 대한문 월대 복원키로

 

덕수궁 정문인 대한문(大韓門)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널리 평안하라라는 뜻을 가진 대안문은 조선왕궁의 정문으로는 훌륭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1906년 조선왕실은 이 문의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여기에는 배정자(裵貞子)라는 구한말의 여인이 등장한다. 조선 왕실은 친일분자였던 배정자의 꼴을 보기 싫어 ()’ 자 아래에 ()‘자가 있는 ()‘자를 한()자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면 배정자는 누구인가.

배정자 /한선생 제공
배정자 /한선생 제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녀로 간첩교육을 받고 귀국해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선 친일 스피이로 알려져 있다. 배정자의 어릴 때 이름은 분남(粉南), 즉 개똥이였다. 1870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조선말 세도가인 민씨 일파에 처형된후 집안이 몰락해 기생이 되었다가 출가해 여승이 된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친구인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갑신정변 실패후 도피중인 김옥균을 만나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이토의 죽은딸 사다코(貞子)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 정부로부터 밀정교육을 받아 간첩으로 길러지고 1894년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접근하여 많은 정보를 빼내 한일합병에 기여하게 된다.

1920년에는 만주, 시베리아에서 일본군의 스파이로 암약하며 많은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여 해방 후에는 친일반역자로 반민특위에 회부되기도 했다. 6.25후에는 지금의 한성대 근처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여자 이완용으로 불리는 여인으로, 백성들에게서 원성이 자자했다.

 

대한제국 시절에 임금이 살던 덕수궁에 수많은 대신들이 대안문을 드나 들었다. 그 중에는 이토를 비롯해 그의 하수인들도 고종을 협박기 위해 이 문을 지나 다녔을 것이다. 배정자도 이토의 권세를 앞세워 이 문을 들락거렸다.

배정자는 모자를 쓰고 멋을 냈다고 한다. ()자가 배정자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얼마나 배정자가 미웠으면, 궁궐 정문의 이름도 바꾸었을까.

또다른 설도 있다. 궁궐의 정문에 여성이 가운데 들어 있는 안()자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여 한()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설득력이 약하다.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당시의 정서를 감안하면 배정저 꼴이 보기 싫어 바꾸었다는 주장을 믿게 된다.

 

덕수궁 대안문(1902~1903년경 촬영) /문화재청
덕수궁 대안문(1902~1903년경 촬영) /문화재청

 

원래 궁궐 건측에 정문은 남향에 있다. 경복궁도 남향이 정문이다. 君主南面(왕은 남쪽을 본다)이기 때문에 남쪽의 문이 정문인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대한문은 동쪽에 있다.

그 이유는 남쪽의 길이 협소하고 물길이 있어 정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될 때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에 있는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남쪽의 문이 불편했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장례행렬도 태평로를 지나 종로로 향했다. 역사의 중심축이 문이 동쪽으로 이동하다보니 남쪽문인 인화문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정문이 동쪽으로 바뀌었다.

1904년에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모든 것이 깡그리 타버리는 대참사 속에서 대안문은 불타지 않았다. 궁을 개축하면서 1906년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쳤다.

그러면 문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지금의 서울시청앞 광장 중간정도에 있었다. 그 때는 문이 덩그러니 도로중앙에 있어 마치 섬과 같았다. 19701호선 지하철역공사를 하면서 대한문을 약 33미터 뒤로 옮겼다. 어떻게 이동했을까. 김천식이라는 사람이 문을 끌어서 옮겼다고 한다. 지붕을 뜯고 기둥을 동아줄로 묶어서 끌고 왔다고 한다.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한선생 제공
대한문 수문장 교대식 /한선생 제공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정문인 대한문의 면모를 되찾고자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덕수궁 대한문의 월대(月臺, 문의 기단)를 재현하는 설계를 이달에 시작한다고 밝혔다.

덕수궁관리소는 인근에 있는 태평로와 시민들의 보행로등을 감안해 대한문을 원위치로 옮기거나 원형대로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해 원위치와 형태, 크기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재현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대한문의 월대는 189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1900년에 월대를 새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1900년 전에 대한문 월대가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월대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의해 훼손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월대 끝 부분에 있었던 석수(石獸, 짐승의 형상을 돌로 새겨 만든 것)만 남아 있다. 고종이 환구단이나 왕릉으로 행차할 때 사용했고, 1910년 대한제국의 명운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궁궐의 정문에서 격동했던 근대사의 한가운데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설계는 이달부터 시작해 7월까지 마치고,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 내년까지 월대 재현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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