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의 출현④…울딘, 게르만족 대이동 촉발하다
훈족의 출현④…울딘, 게르만족 대이동 촉발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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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동고트·서고트족, 훈족 공격에 쫓겨 대이동…410년 로마 약탈

 

서기 400, 훈족의 영웅 울딘(Uldin)이 로마의 역사에 등장한다. 아마 그가 훈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것은 이보다 앞선 395년경으로 추정된다. 울딘은 영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국경 밖의 게르만족을 몰아내 영토로 만들고, -서로 나눠진 로마제국의 내정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협력관계를 형성했다.

 

400, 동로마제국의 서고트족 출신 가이나스(Gainas) 장군이 아르카디우스 황제에 반발해 발칸반도 북쪽 트라키아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울딘은 훈족을 이끌고 반란군을 섬멸하고 가이나스의 목을 쳤다.

훈족의 사절단이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것은 40013일이었다. 사절단은 가이나스의 목을 선물하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고마워하며 훈족을 동맹국으로 선포했다. 또 기념비를 세워 훈족의 기마 형상을 새겨 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로마에 울딘이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울딘의 가이나스 처단은 동로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훈족 영토에 접근하는 종족을 제거했을 뿐이었다. 그는 곧이어 404~405년 겨울에 동로마 영내인 트라키아를 쳐들어 한몫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울딘의 공격로 /위키피디아
울딘의 공격로 /위키피디아

 

울딘은 곧이어 서쪽으로 향해 헝가리 초원 주변에 남아 있던 반달족(Vandals), 수에비족(Suebi), 알란족(Alans), 동고트족(eastern Goths)을 공격해 몰아냈다. 이들 세 게르만족은 훈족에 쫓겨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로 건너갔다. 게르만족의 민족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시대에 프랑스는 갈리아(Gallia)라 불렸다. 갈리아는 피난온 이민족으로 뒤덥혔다. 서로마제국의 갈리아 방위체계가 무너졌다.

역사의 기록에는 울딘 이후 나타난 아틸라(Attila)를 많이 많이 서술하고 기억하지만, 유럽으 역사를 바꾼 결정타는 울딘에 의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서로마의 방어망을 무너뜨렸고, 로마인들은 갈리아의 북부와 중부를 버렸다. BC 1세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정복한 갈리아를 450년만에 포기한 것이다. 갈리아 포기는 브리타니아(영국)도 포기했다는 뜻이다. 로마는 이제 갈리아에서 남부 프로방스지역만 남게 되었다.

훈족에 의해 동로마로 쫓겨간 서고트족은 알라리크(Alaric)를 왕으로 옹립해 일리리쿰(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을 점령하고 있었다. 일리리쿰은 동로마와 서로마의 경계지역인데, 로마제국은 이민족에 의해 갈라지고 찢겨지게 된 것이다.

 

그중 판노니아(헝가리)에 터를 잡고 있던 동고트족 10만명이 울딘에 쫓겨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밀려들었다. 라다가이수스(Radagaisus) 왕의 이끄는 동고트족은 로마로 향했다.

당시 로마의 장군은 스틸리코(Flavius Stilicho)였다. 스틸리코는 반달족 출신으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해 로마의 군권을 쥐고 있었다. 스틸리코는 이미 북부 갈리알를 포기한데 이어 로마마저 위협당하자 울딘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훈족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울딘은 스틸리코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탈리아 반도로 내려갔다. 울딘과 스틸리코의 연합군은 동고트족을 무찔렀다. 이때 훈족과 서로마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동고트족은 노예로 팔려나갔는데, 얼마나 많은 노예가 시장에 나왔는지, 노예 한사람 가격이 가축보다 낮아졌다고 한다.

 

이제 일리리쿰에 있던 서고트족이 이탈리아를 향하기 시작했다. 서고트 왕 알라리크와 반달족 출신 로마장군 스틸리코 사이에 한판 대결이 벌어질 형국이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협상이 이뤄졌다. 서고트족을 로마제국군에 편입시키고 알라리크를 군사령관에 임명하되, 서로마가 그 댓가로 4천 리브라의 금괴를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틸리코의 입장에서는 북쪽의 야만족과 서쪽의 야만족을 동시에 상대하기 어려우므로, 동양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처럼 서고트족을 이용해 다른 야만족을 견제하려는 생각이었다.

이 협약을 이행하기 스틸리코는 서고트족과의 동맹을 인정하고 금괴를 지불할 것을 원로원에 요청했다. 원로원이 발칵 뒤집혔다. 야만족에게 동맹을 맺는 것도 인정할 수 없을뿐더러 돈을 지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고, 스틸리코가 마음대로 협정을 체결한 것을 문제 삼았다.

스틸리코는 내부의 적들에 둘러 싸였다. 올림피우스라는 노예출신 환관이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에게 달콤한 말을 전했다. “스틸리코가 제국을 방위하는 것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서라고.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얼마전에 스틸리코가 황제의 이복누이 갈라 플라키디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겠다고 한 말을 확신의 근거로 삼았다. 황제와 인척관계를 맺어 합법적으로 제위를 뺏으려는 시도로 본 것이다.

408년 어느날, 황제가 참석한 사열대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대열을 이탈해 스틸리코를 죽였다. 물론 황제가 시킨 짓이었다.

 

훈족 수장 계보 /김현민
훈족 수장 계보 /김현민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죽은 후 그 자리를 환관출신 올림피우스가 맡았으니, 군의 기강이 제대로 설리 없었다. 이 틈을 타고 서고트족이 로마로 진군했다.

알라리크의 서고트군은 408년부터 410년까지 세차례나 로마를 포위하고 유린했다. 410824일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 시내로 진입했다. 로마는 건국한지 1300여년이 되도록 초기인 BC 390년에 갈리아인에게 점령된 이후 한번도 외적에 점령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후 800년만에 처음으로 적의 손에 떨어졌다. 10만명의 야만족은 80만 인구의 로마시를 겁탈했다. 야만인은 로마 시민의 집에 들어가 사람들을 붙잡아 보물을 숨긴 곳을 대라고 강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폭행과 약탈, 살육이 자행되었고, 수녀를 포함해 여자들이 능욕을 당했다. 당시 북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제로 동의 없이 맺은 성관계는 죄가 되지 않는다며 피해의식에 빠져 있던 로마인들을 달래야 했다. 로마는 폐허가 되었다. 많은 로마시민들이 수도를 떠났다.

 

로마제국이 야만족의 공격에 시달릴 때 훈족의 수장 울딘은 다뉴브강 북쪽과 라인강 서쪽의 대제국을 형성했다. 울딘은 언제 죽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411~412년경에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부당을 입고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딘 이후 훈족 수장으로 도나투스(Donatus)와 카라톤(Charaton)이라는 이름이 등장할 뿐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연구자들은 시기로 보아 도나투스가 카라톤의 전임으로 본다. 둘은 410년대에 잠시 등장한뒤 곧바로 사라진다.

420년대에 옥타르(Octar)와 루가(Ruga 또는 Rua)라는 형제가 나타난다. 두 형제가 공동수장인지, 지역을 나눠 분할통치를 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어떤 연구자는 루가가 카르파티아 산맥을 경계로 동쪽을 지배하고, 옥타르는 그 서쪽과 북쪽을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이는 루가가 형 옥타르의 명령을 따랐기 때문에 옥타르가 왕이고 루가는 부왕이는 주장을 편다.

루가는 422년에 동로마 콘스탄티노플 성채에 다가가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동로마는 황금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했다. 훈족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제국을 치면 돈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옥타르가 먼저 사망했다. 그는 430년 라인강변에서 부르군트족의 기습을 받아 부상을 당해 죽었다. 홀로 남은 동생 루가는 옥타르의 부족을 통합했다. 일부 훈족이 루가의 폭압적인 통치를 참지 못하고 동로마로 도망갔다. 루가는 동로마에 탈주자를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동로마는 이민족 탈주자들을 수습하지 못해 루가의 요구사항을 차일피일 끌었다. 루가가 화가 나서 433년에 동로마제국을 침략했지만 번개가 내리치는 바람에 죽었다.

동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Theodosius II)는 신에게 드린 간절한 기도로 루가가 죽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루가보다 더 무섭고 잔혹한 왕이 훈족을 이끌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아틸라(Attila)였다.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JN Sylvestre, 1890) /위키피디아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JN Sylvestre, 1890)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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