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①…‘마르스 검’ 휘두르며 유럽 호령하다
아틸라①…‘마르스 검’ 휘두르며 유럽 호령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0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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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다와 공동통치 후 단독 지배…부하에겐 인자, 외적에겐 잔혹

 

아틸라(Attila)는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훈족에게는 영웅이었고, 로마제국과 게르만족에겐 공포의 상징이었다. 후대 화가들이 그린 아틸라의 형상도 두 가지다. 먼저 17세기에 독일인이 그린 아틸라의 모습은 늑대인간처럼 그려졌다. 뾰족한 턱에 머리와 콧수염, 턱수염은 쭈삣하게 솟아 있다. 이에 비해 훈족의 후예를 자처하는 헝가리 미술관에 전시된 아틸라의 모습은 눈썹이 짙고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서유럽인들은 아틸라를 야만인중의 야만인이었다고 서술하지만 동유럽이나 터키에서는 세계를 제패하려는 야망에 찬 인물로 묘사된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395년 출생설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390년대라고 포괄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서기 406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한다. 분명한 것은 그의 재위 기간이 434년에서 453년까지 19년이다. 그중 형 블레다(Bleda)445년에 죽기 이전까지 11년간은 공동통치 기간이었고, 단독통치 시기는 8년에 불과했다.

434년 훈족왕 루가(Ruga)가 죽고 그의 동생인 문주크(Mundzuk)의 두 아들, 즉 조카들이 훈족의 지배자가 되었으니, 블레다와 아틸라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형이었다. 어떻게 해서 조카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없다. 아마 힘 있는 세력이 권력을 승계한 것이 아닐까.

 

아틸라는 어렸을 때 볼모로 서로마의 궁정에서 살았다고 한다. 아들을 볼모로 보냈으니, 문주크의 집안이 약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틸라의 볼모 생활에 대해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그가 서로마의 수도였던 라벤나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기독교에 접하고 국제정세를 배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틸라가 헝가리의 훈족 본영에 돌아왔을 때에 서로마의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가 볼모로 잡혀 왔다. 아이티우스는 후에 20년간 서로마의 군권을 장악하고 아틸라와 대치했던 인물이다. 훈족 궁궐에서 만난 아틸라와 아이티우스는 서로 의기가 투합했고, 이 교감이 아틸라 집권 초기에 서로마와의 협력관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측한다.

 

게르만족 후손인 독일인이 그린 아틸라의 모습 /위키피디아
게르만족 후손인 독일인이 그린 아틸라의 모습 /위키피디아

 

434년부터 시작된 블레다와 아틸라의 통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블레다가 왕이고, 우선 아틸라가 부왕(副王)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다른 견해는 블레다와 아틸라가 지배영역을 나눠 훈제국을 분할통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블레다와 아틸라가 동로마제국에게 왕이 두명이니 조공을 두배로 늘리라고 요구한 점에서 공동통치의 가능성이 크다.

 

435년 블레다와 아틸라는 군사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제국은 훈족의 새 수장에게 화친을 제의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양측은 현재 세르비아 지역인 마르구스에서 만났다. 훈족은 조공량을 두배 늘려 바치고, 동로마가 게르만의 다른 종족과 체결한 조약을 모두 파기하고 훈족만 상대할 것을 요구했다. 동로마는 평화를 구걸하기 위해 훈족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동로마는 350kg의 금을 바치고 훈족에게 시장을 열어주었다.

동로마는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여 평화를 얻었고, 훈족은 조공과 시장을 얻으며 동부 국경지대의 안정을 유지했다.

동로마와 조약을 맺은후 몇 년간 블레다와 아틸라는 로마 국경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초원으로 가서 지역에 할거하던 훈족 부족을 제압하고, 사산조 페르시아를 쳐들어갔다. 훈족은 아르메니아에서 사산조의 방어에 막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했는데, 우크라이나와 동북쪽의 슬라브족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다시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라인강 유역의 부르군트족을 궤멸시키고 그 일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 때 부르군트족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온 패전의 노래가 몇백년 후에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노래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동로마가 주기로 한 조공을 차일피일 미뤘다. 440년 블레다와 아틸라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로 남하했다. 동로마제국은 급히 사과하며 조공을 더 얹어 줄 것을 약속했다.

 

헝가리 박물관의 아틸라 모습 /위키피디아
헝가리 박물관의 아틸라 모습 /위키피디아

 

공동통치 기간에 형 블레다가 아틸라에 우위를 보였다. 블레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 났고, 승전의 영광을 독차지했다. 이에 비해 아틸라는 신중하고 외교적 해결을 우선으로 했다. 전쟁 때마다 둘 사이에는 견해차가 있었고, 그러는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블레다는 445년경에 죽었다. 블레다가 죽은 이유는 분명치 않다. 아틸라가 죽였다는 의심이 있지만, 증거는 없다.

 

형 블레다가 죽은 직후에 아틸라 검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졌다.

흰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아틸라의 꿈에 나타났다. 노인은 전쟁의 신 마르스(Mars)의 검()을 줄 터이니, 모든 땅을 정벌하라고 아틸라에게 말했다. 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한 목동이 양을 치러 초원에 나갔다가 양 한 마리가 칼에 베어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목동은 핏자국을 따라 가보았더니 땅에 칼이 박혀 있었다. 목동은 그 칼을 아틸라에게 바쳤다. 아틸라는 그 검을 제단에 올려 제사를 지내고 세계 정복을 신에게 약속했다.

6세기 고트족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전하는 이 칼은 아틸라의 검’, ‘마르스의 검’, ‘신의 검이라고 부른다. 아틸라가 만들어 낸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그는 형이 죽고 혼란에 빠진 부족들을 수습하면서 검의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아틸라 시대의 훈제국 영역 /위키피디아
아틸라 시대의 훈제국 영역 /위키피디아

 

이제 아틸라가 훈족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447년 훈족이 동로마를 침략할 때 수장은 아틸라 혼자였다. 449년 프리스쿠스(Priscus)라는 동로마 외교관이 사절단을 따라 아틸라의 군영을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아틸라의 왕궁이 있던 곳은 헝가리 남부 어디쯤으로 추정된다. 헝가리 세게드(Szeged)에서 다량의 훈족 장신구가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그곳이 아틸라의 수도였을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프라시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의 왕궁은 도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목재로 지어졌다. 그중 높은 탑은 다른 건축물보다 높았다. 언덕 사방에는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둘러 싸여 있었고, 그 안에는 목재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에게서 만찬 초대를 받은 사실을 기록했다.

아틸라는 동로마 사신단을 맞았다. 식탁 중앙에 아틸라가 앉아 있고, 사신단 대표 믹시미우스(Maximinus)가 축배를 들고 훈제국의 융성을 축원했다. 아틸라 곁에는 두명의 호위병이 서 있었다. 훈족 귀족들이 양쪽에 앉아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아틸라는 포도주 술잔을 들어 시산들의 건강과 행복을 빈후 한입에 마셨다. 사신들도 일어나 축배를 들었다. 사신들은 일일이 아틸라에게 인사했고, 그러길 세 번이나 했다.

연회 도중에 훈족 예인들의 장기가 펼쳐졌다. 아틸라의 위대한 공적을 찬양하는 시가 낭독되었고, 코미디가 이어졌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검소했다고 평가했다. 사신단 앞에는 은접시가 놓여져 있는데 아틸라의 것은 목재였고, 옷차림도 수수했다.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그의 마구(馬具)에도 황금이나 보석 장식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후대가 그린 아틸라의 형상은 극과 극이다. 당대 사람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요르다네스는 아틸라는 키가 작고 가슴이 넓으며 머리가 컸다. 그리고 회색빛 눈동자에 납작한 코, 새카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기술했다.

아틸라를 직접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의 용모에 대해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틸라의 성격을 이렇게 전했다.

그는 오만한 태도로 다가왔고, 그의 눈은 형형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의 행동만 봐도 권력자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는 승전의 기쁨을 좋아하지만 행동하기 앞서 몇 번이나 신중하게 고민하고 정사를 이성적으로 처리했다. 그에게 하소연하는 사람 앞에서 그의 얼굴엔 동정심이 묻어 났다. 그는 자신에게 복속한 사람들에겐 무한한 관용을 베풀었으며, 뛰어난 지혜 못지 않게 교활한 내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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