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②…프랑스 침공, 로마군과 결전을 벌이다
아틸라②…프랑스 침공, 로마군과 결전을 벌이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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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라우니아 전투에서 프랑스 진출 저지당해…로마도 갈리아 상실

 

451년 초, 아틸라는 헝가리 초원에서 다국적 부대를 집결시켰다. 병력의 수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정예병이 3만명이라고 하지만, 일본의 역사문학가 시오노 나나미는 예하의 여러 게르만족을 이끌고 갔기 때문에 10만쯤 될 것으로 보았다. 아틸라는 그해 2월초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프랑스)를 쳐들어갔다.

아틸라가 갈리아를 공격한 이유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고트족 출신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주장한 반달족의 협공 제의설이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Geiseric)는 서고트왕 테오도리크(Theodoric) 의 공주를 며느리로 받았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의 발렌티니아누스 3(Valentinian III)가 장녀를 주겠다고 하자 가이세리크는 아들의 결혼을 파혼시키고 서고트왕의 공주에게 죄를 날조해 뒤집어 씌워 코와 귀를 베고 서고트로 돌려보냈다. 당시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정착해 있었다. 서고트 왕은 반달족을 쳐들어갈 태세를 보이자, 반달 왕 가이세리크가 훈족에게 서로마와 서고트족을 협공하자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가이세리크가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가 서로마를 치고, 아틸라는 서고트족을 협박하기 위해 프랑스를 치자는 조건이었다.

또다른 설은 서로마의 황녀 호노리아(Justa Grata Honoria)가 아틸라에게 결혼을 제의해 아틸라가 지참금으로 로마 땅의 절반을 달라며 갈리아를 침공했다는 주장이다.

호노리아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나로, 결혼도 하지 못한 채 30세를 넘었다. 호노리아는 환관을 몰래 아틸라에게 보내 편지와 반지를 건네며 자기와 결혼하면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을 얻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아틸라는 호노리아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지만 이것을 이용할 생각은 있었다. 아틸라는 호노리아의 결혼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서로마의 절반을 달라고 했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는 호노리아를 서둘러 하급관리와 결혼시킨 후 출가한 황녀에게 계승권이 없다고 얼버무렸다. 아틸라는 호노리아의 결혼 제의가 유효하다며 갈리아를 침략했다는 것이다.

 

마침 갈리아를 지배하던 프랑크족에게 왕위 계승전이 벌어졌다. 왕이 죽고 두 왕자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했는데, 장자가 아틸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동생이 서로마제국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서유럽은 훈족의 아틸라와 서로마의 아이티우스로 갈라졌고, 게르만의 여러 종족들도 둘중 하나의 편에 섰다. 아틸라측에는 동고트족, 게피다이족, 부르군트족이 붙고 반달족과 프랑크족이 가담했다. 아이티우스측에는 서고트족과 색슨족, 알란족, 프랑크족의 일부가 연합군을 형성했다.

아이티우스는 432년부터 22년간 서로마제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어려서 서고트족에게 볼모로 잡혀간 후 훈족에게도 10년간 볼모 생활을 했다. 훈족 본거지에서 볼모 생활을 할 때에 그는 아틸라와 만나 교제를 가졌다고 한다. 아이티우스가 초기에 권력이 약했을 때 서너차례 훈족의 지원병을 받아 그 힘으로 서로마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로마의 총사령관이었다. 아틸라가 여러 부족을 이끌고 갈리아로 쳐들어오자 그동안의 우호관계를 접고 대응전에 나서게 되었다.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의 훈족 /위키피디아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의 훈족 /위키피디아

 

4514월 아틸라의 다국적군은 프랑스 동부 메스(Metz)를 공격했다. 메스는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곧이어 세느강 유역의 루테시아(파리)에 이르렀다. 3개 군으로 나눠 공격하던 아틸라군은 오를레앙으로 진격했다. 오를레앙은 갈리아 중앙부의 요충지로 견고한 성채로 둘러 싸여 있고 루아르 강에 면해 있다. 아틸라가 오를레앙을 공격하느라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에 아이티우스의 서로마군이 출진 준비를 마쳤다.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 설득에 최선을 다했다. 훈족이 갈리아를 관통하면 스페인으로 달려갈 것이므로 서로마군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서고트족은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훈족의 이교도에게 당할수 없다는 점도 설득했다. 마침내 서고트족이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갈리아로 들어왔다.

 

훈족의 갈리아 침공로 /위키피디아
훈족의 갈리아 침공로 /위키피디아

 

아틸라는 서로마와 서고트족 연합군이 북상하는 것을 알고 대회전을 벌일 곳을 찾았다. 그는 캄파니아(상파뉴)를 골랐다. 훈족 대군은 오를레앙에서 방향을 돌려 카탈라우니아 평원( Catalaunian Plains)의 고지를 선점하고 아이티우스의 서로마군이 오길 기다렸다. 카탈라우니아 평원은 남북 240km, 동서 160km의 넓은 평원으로, 대회전을 치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유럽의 운명을 건 이 전투는 후에 역사가들이 카날라우니아 평원의 전투라 불렀다.

 

역사의 기록은 과장되어 있다. 6세기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당시 전장에 50만 명의 병사가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군사 역사가들의 견해로는 병참까지 포함하면 양측이 약 5~6만여명, 정규군은 각각 3만명 정도였을 것으로 관측한다.

아틸라의 군대는 절반 정도만 훈족으로 구성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속국 병사들로 채워졌다. 동고트족, 게피다이족, 라인강 우변의 프랑크족, 부르군트족이 가담했다. 또 헤룰리족, 스키리족, 랑고바르디족도 아틸라에게 병력을 파견했다.

아이티우스의 군대는 절반가량이 로마 정규군 부대와 프랑크족과 부르고뉴족의 포이데라티로 이루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서고트족의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알란족도 함께 했다.

 

카탈라우니아 전투 전개 /위키피디아
카탈라우니아 전투 전개 /위키피디아

 

유럽의 패권을 놓고 두 진영이 전투를 벌인 날짜는 451620일이었다. 요르다네스의 서술에 따르면 전투를 벌이기 전에 아틸라는 휘하 장수들을 불러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고 한다.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민족과 광할한 땅을 정복한후 지금 이 자리에 섰다. …… , 이제 저 적들의 머리를 베어 내가 가져 와라. 저들의 재물로 우리의 배를 채우고 저들의 해골로 우리를 치장하자. 하늘과 모든 신들이 그대들과 함께 있다. 나 아틸라도 그대들과 함께 한다. 내가 적들을 향해 첫 화살을 쏠 것이다. 만약 겁을 먹은 자가 있다면 그는 죽어서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틸라는 개전의 화살(嚆矢)을 쏘았다. 오후에 시작된 전투는 한시간 만에 끝났다. 하지만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냈다. 누가 이겼을까. 어느쪽도 이기지 못했다. 모두 졌다. 피해가 얼마나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없다. 다만 양측이 전력을 모두 쏟아부어 싸웠고, 막대한 손실을 내고 기진맥진한 채 쓰러졌다. 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는 전사했다. 아틸라는 아이티우스를 쫓아가 죽일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아이티우스도 아틸라의 목줄을 조이려 하지 않았다. 서로가 과거의 우정을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 소설을 쓰는 이도 있지만, 아마도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손을 놓았을 것이리라.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훈족이 샹파뉴에서 묻힐 뻔 했다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곳에는 작은 토산 다섯 개가 있는데 그때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틸라는 카탈라우니아 전투 이후 퇴각해 헝가리 초원으로 돌아갔다. 서양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야만족의 유럽 장악을 저지한 전투라고 서술한다. 서양 야만인 후손의 입장에서 동양 야만인의 진격을 저지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때 갈리아 북부는 이미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족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서로마로서도 이 전투 이후 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아버지를 잃은 서고트족의 왕자 토리스문트(Thorismund)는 복수심에 불타 아틸라를 추격하자고 했다. 아이티우스는 뜯어 말렸다. 서고트족이 강력하지는 것을 막기 위해 훈족을 견제세력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아이티우스는 토리스문트에게 스페인에서 두 동생이 견제하고 있을 것이라고 귀뜸을 했다. 토리스문트가 급히 귀국해 보니, 두 아우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그는 내전 중에 피살되었다.

아틸라가 퇴각한 이후 프랑크족이 서서히 갈리아를 잠식해 들어갔다. 후에 프랑크족은 갈리아를 제패하고 중세 유럽의 강자로 부상한다.

아틸라는 1년간 휴식을 취하며 군대를 수습한다. 그리고 호노리아 황녀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며 이번엔 갈리아가 아니라, 로마로 직행한다.

 

카탈라우니아 전투도 /위키피디아
카탈라우니아 전투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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