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③…로마 침공, 베네치아 탄생하다
아틸라③…로마 침공, 베네치아 탄생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2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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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와 결혼 요구하며 이탈리아 진격…북부인들, 해상으로 도주

 

카탈라우니아 전투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황녀 호노리아(Honoria)가 결혼을 제의하며 서로마제국의 영토 절반을 준다는 약속을 이행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서로마 발렌티니아누스 3(Valentinianus III) 황제는 누나 호노리아를 감금한채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했다.

명분이 쌓여 갔다. 카탈라우니아 전투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인 452년 봄, 아틸라는 훈족 대군을 이끌고 율리안 알프스(Julian Alps)를 넘었다. 병력이 얼마다 되었는지는 기록된 게 없다. 다만 이번에는 반달족이나 게르만 부족들의 참여가 없었다. 훈족들만의 공격이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이탈리아 침공 /위키피디아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이탈리아 침공 /위키피디아

 

첫 공격지는 아드리아해 북쪽 해변도시 아킬레이아(Aquileia)였다. 당시 아킬레이아는 인구 20만이 거주하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 최대 상업도시였다. 성벽은 견고했다. 훈족은 기마전에는 강했지만 공성전에는 약했다. 수많은 돌과 화살을 쏘았지만 성채는 끄떡 없었다. 3개월간 도시를 포위한 끝에 지친 것은 아틸라 군이었다. 아틸라는 아킬레이아를 포기한채 곧바로 로마시로 진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철수 준비를 하던 중에 아틸라는 성채 주위에서 어미 황새가 새끼들을 데리고 둥지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훈족들은 초원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야생동물의 생리를 잘 알았다. 황새가 떠나는 것은 성안에 먹을 거리가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아틸라는 미소를 지으며 철수 준비를 중단하고 황새가 떠난 그 자리를 공격했다. 마침내 식량이 떨어진 아킬레이아의 로마군은 성을 포기했다.

아킬레이아를 함락한 후 아틸라의 훈족은 서로마 황제의 궁궐이 았는 라벤나(Ravenna)로 향해 서진했다. 북이탈리아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훈족은 기독교도들에게 신의 채찍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훈족은 미친 듯이 날뛰는 신이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약탈하고 파괴하고 불태우며 지나갔다. 훈족이 떠난 뒤에는 개 짖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행군 뒤에는 포로 행렬이 이어졌다.

 

452년 아틸라의 서로마 침공로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이야기‘ 15권
452년 아틸라의 서로마 침공로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이야기‘ 15권

 

이탈라이 북동쪽 베네토(Veneto) 지방은 라벤나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훈족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저항한 사람이든, 저항하지 않은 사람이든 모두 죽여 버린다는 소문도 훈족 기병대의 움직임과 빠르게 이동했다. 사실 그러했다. 알프스 산맥 쪽으로 도망치자니 훈족에게 쫒겨 죽음을 면키 어려웠다.

이럴 때에 신화가 만들어진다.

베네토인들은 교회를 찾아갔으나 사제들은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했다. 사제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종탑에 올라가라. 그곳에서 바다 쪽을 보아라. 눈에 들어오는 곳이 너희가 살 집이 될 것이니라.”

사람들은 교회 종탑에 올라갔다. 마침 썰물 때였다. 종탑에서는 군데군데 소택지가 보였고, 그곳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베네토인들은 남녀노소,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제가 앞장 서서 신의 계시를 이행했다.

아틸라의 군대는 해군이 없었고, 또 라벤나로 가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갯벌로 도망친 사람들을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그들은 목숨을 건질수 있게 되었다.

후대에 각색한 스토리일뿐이다. 역사 연구가들에 따르면 그 당시 해변 갯벌에는 소수의 어부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스토리가 오늘날 베네치아라는 도시의 시원이다.

 

인공위성으로 본 베네치아 /위키피디아
인공위성으로 본 베네치아 /위키피디아

 

서로마군의 총사령관 아이티우스(Flavius AëtiusAëtius)1년전 카탈라우니아 전투에서 병력을 소진했기 때문에 대응할 군사력을 소집하지 못했다. 서고트족, 프랑크족의 참전을 유도하기에는 외교적 시간이 부족했고 야만족 군대를 로마에 유도하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로마는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아틸라 군은 밀라노와 파비아를 아무 저항 없이 진압했다. 도시들은 재산을 모두 내놓고 투항했다. 아이타우스는 남은 군사를 최대한 소집해 대항했지만 순식간에 궤멸되었다. 토리노, 모데나, 코뭄이 함락되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난공불락의 도시라던 라벤나를 포기하고 옛수도 로마시로 피신했다. 아틸라는 순식간에 로마를 포위했다.

 

로마주교 레오 1세가 훈족과 만나는 모습. 라파엘로의 그림 /위키피디아
로마주교 레오 1세가 훈족과 만나는 모습. 라파엘로의 그림 /위키피디아

 

로마시민들은 410년에 서고트 왕 알라리크(Alaric)에 의해 함락되어 페허가 된 경험을 잊지 않았다. 40여년만에 로마가 다시 야만족에 짓밟힐 위기에 처하자 두려움에 떨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대표 이비에누스(Gennadius Avienus)와 근위대장 트리게티우스(Trigetius), 로마 대주교 레오 1(Leo I)를 아틸라 군영에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요청했다.

여기서 또 전설이 만들어 진다. 레오 1세는 뛰어난 위엄 있는 표정과 뛰어난 언변으로 아틸라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레오 1세는 아틸라의 면전에 훈족의 만행을 비난한 후, 만행을 중단하고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갈 것을 설교했고, 아틸라가 레오의 설교에 설득당했다는 것이다. 레오 1세가 아틸라를 설복하는 장면은 르네상스 시절에 라파엘로의 그림으로 재현되었다. 일본의 로마사 해설가 시오노 나나미는 이 때부터 로마주교가 힘을 얻어 교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세계 지배의 야망에 차있던 아틸라가 로마 주교의 설교에 감복홰 로마를 떠났다는 스토리를 믿는 사람은 없다. 후에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면 아틸라는 서고트족의 알라리크처럼 로마를 유린하지 않았을까.

첫째 이유는 두둑하게 보상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전리품과 건조한 기후에 병사들이 느긋해졌다. 우유와 육류를 주식으로 하는 북방민족이 이제는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산해진미를 즐기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마 황제가 주는 전리품에 나약해 진 것이다. 추운 날씨에 적응해 살던 훈족들은 무더운 지중해성 기후에 익숙치 않았을 것이다. 아틸라는 많은 전리품도 얻었고, 나약해져 가는 부하들을 보면서 발걸음을 돌렸을 것으로 보인다.

또하나, 서고트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유린한 후 이탈리아 남부에서 곧바로 급사했다. 역사가들은 그가 말라리아에 감염돼 죽었다고 분석하는데, 어쨌든 그런 사실이 미신을 믿는 훈족 수장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아틸라는 로마시를 짓밟지 않고 철군했는데, 그도 1년후에 급사한다. 로마의 저주를 받은 것일까.

서로마의 황녀 호노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틸라는 로마를 침공하면서 호노리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후 호노리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사료가 없다.

 

1700년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위키피디아
1700년대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위키피디아

 

아틸라가 돌아간 후에도 아드리아해 갯벌로 도망친 베네토인들은 그곳에 머물렀다. 훈족은 사라졌지만, 그후에도 여러 야만족이 이탈리아를 공격하는 바람에 갯벌에서 나올 수 없었다. . 그들은 그곳에서 수중 도시를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베네치아(Venezia).

베네치아인들은 그곳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베네치아인들은 해상을 통해 소금을 거래했고, 이를 통해 섬들은 해상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그후 이탈리아를 점령한 롬바르드족도 베네치아를 침략하지 못했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베네치아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상업도시로 성장했고, 중세에는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베네치아는 16백년전에 아틸라가 선물한 세계문화유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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