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④…영웅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후손들
아틸라④…영웅의 죽음, 뿔뿔이 흩어진 후손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3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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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사망…아들 엘라크, 뎅기지크, 에르나크가 16년 버티다 사라져

 

서기 452, 서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를 위협하고 돌아온 아틸라는 이번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동로마가 보내기로 한 조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 공격 이듬해인 453년 여름의 어느날 아침, 아틸라가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의 침소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부하들은 아틸라를 깨우기 위해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런데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부하들이 침소에 들어가 보았더니, 눈 앞에는 믿기 어려운 광경이 나타났다.

아틸라가 침대에 엎드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던 것이다.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침대 옆에는 어제 맞은 부르군트족 공주 일디코(Ildico)가 훌쩍거리고 울고 있었다.

고트족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술에 취한후 침대에 잠이 들었을 때 그의 코에서 선명한 피가 흘렀는데, 그 피가 목으로 들어가 그를 질식케 했다고 적었다.

당대의 동로마 역사가 프리스쿠스도 아틸라의 죽음이 자연사라고 기록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평소에도 과음을 즐겼다. 새 부인과 첫날밤을 맞은 그날도 술이 거나하게 취했다. 그는 코피를 굉장히 많이 흘려 목이 막혀 죽었다고 썼다. 현대 의학계에서는 과음에 의해 식도정맥류의 내부출혈로 죽음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80년후 동로마의 연대기작가 마르첼리누스 코메스(Marcellinus Comes)유럽의 약탈자 아틸라는 새 부인의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술했다. 역사가들은 코메스의 주장에 신뢰를 주지 않고, 당대의 기록자 프리스쿠스의 자연사 주장을 사실로 인정한다.

 

아틸라의 향연 /위키피디아
아틸라의 향연 /위키피디아

 

아틸라의 시신은 비단 천막에 안치되었다. 훈족의 풍습에 따라 신하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뺨에 칼을 그어 피와 눈물을 흘리며 제왕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의 관은 금과 은, 철의 세 겹으로 포장되었다. 신하들은 아틸라의 관을 어느 강 바닥에 묻었다. 그리고 매장에 참여한 인부들을 모두 죽였다. 지금도 아틸라의 무덤이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틸라는 여러 부인을 두었기 때문에 아들도 많았다. 그 중에 역사에 등장하는 이름은 맏아들 엘라크(Ellac), 둘째 뎅기지크(Dengizich), 셋째 에르나크(Ernak)와 몇째인지 모를 엠네자르(Emnedzar)와 우진두르(Uzindur) 정도다. 동로마의 외교관으로 아틸라를 접견한 적이 있는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아들 중에서 셋째 에라나크를 가장 총애했다고 전했다.

영웅이 죽자 형제의 난이 일어났다. 아들들은 공평하게 땅과 신민을 나누고, 전투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을 왕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단 엘라크와 뎅기지크, 에르나크 세 형제가 공동으로 통치하고, 서로 봉토를 나눠 지배하기로 했다.

또다른 분란은 훈족에 지배를 받던 게르만의 종족들이 독립을 추구한 것이다. 게피다이족(Gepidae), 알란족, 수에비족, 고트족 등은 아틸라 치하에서 내던 병력과 조공을 더 이상 제공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게피다이족의 왕 아르다릭(Ardaric)은 부족의 군대를 지휘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틸라가 죽은 다음해인 454, 알라크는 셋째 에르나크의 부족을 공격해 흑해 일대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가 헝가리 네다오 강변로 돌아왔을 때 게피다이족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에비족, 스키리족, 헤룰리족, 루글리족이 반군 연합에 가담했다. 숫적으로도 게르만족이 우세했다. 네다오 전투(Battle of Nedao)에서 훈족은 수천명의 병사를 잃고 알라크도 전사했다. 이 전투로 훈족은 헝가리분지를 중심으로 과거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 헝가리초원(판노니아)는 동고트족의 영토가 되었다. 또한 게르만의 각 부족은 훈족으로부터의 독립을 달성했다. 훈족은 수하의 게르만족을 모두 잃고 우크라이나 호원으로 퇴각했다.

 

아틸라의 죽음 /위키피디아
아틸라의 죽음 /위키피디아

 

엘라크가 죽은후 두 동생 뎅기지크와 에르나크가 남은 훈족을 통솔했다.

462년 뎅기지크는 헝가리 초원을 되찾기 위해 동고트족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동고트족이 밀렸지만 점차 세력을 회복해 훈족에 맞섰다. 훈족은 헝가리를 되찾지 못하고 우크라이나로 돌아갔다.

뎅기지크와 에르나크는 465~466년 경에 열세를 회복하기 위해 동로마제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훈족은 동로마와 평화조약을 맺고 다뉴브 강변에 시장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동로마는 훈족의 제의를 단박에 거절했다. 뎅기지크는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다뉴브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쳐들어갈 것이라 협박했다. 동로마의 아나가스트(Anagast) 장군은 훈족의 제의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뎅기지크는 곧바로 동로마 황제 레오 1(Leo I)에게 사절단을 보냈지만 레오 1세는 제국에 복종하면 기꺼이 모든 조건을 수락하겠다고 답변을 보냈다. 아틸라의 아들들은 동로마의 거만함에 불쾌해 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 로마의 종속국으로 떨어지길 거부했다.

467년 겨울, 뎅기지크는 다뉴브강을 건너 동로마로 쳐들어갔다. 뎅기지크는 남하하면서 남부의 훈족과 고트족, 스키타이족이 협조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제 살길을 찾아 동로마의 편에 섰다. 동로마도 여러 게르만족 부대를 이끌고 출병했지만, 어느쪽도 압도적으로 상대방을 제압하지 못한채 전쟁은 2년이나 지속되었다.

469, 뎅기지크가 전사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뎅기지크의 목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걸리는 수모를 당했다. 훈족은 아틸라가 죽은지 16년만에 유럽 역사에서 사라진다.

 

6~7세기 불가르족의 이동 /위키피디아
6~7세기 불가르족의 이동 /위키피디아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에르나크는 동생 엠네자르와 우진두르와 함께 남은 부족을 이끌고 현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경계에 있는 흑해 연안 도브루자(Dobruja)로 갔다고 한다. 그후 에르나크에 관한 기록이 없다.

동로마의 외교관 프리스쿠스는 훈족의 예언가들이 훈족이 멸망하면 에르나크에 의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한 말을 전했다.

에르나크가 흑해 연안으로 피신한지 30년후 불가르족(Bulgars)이 동로마제국을 수차례 위협했다. 그 불가르족을 일으킨 칸(Khan)의 시조는 이르니크(Irnik)인데, 그 사람이 바로 에르나크라는 설이 있다. 불가르족은 현재 동유럽의 불가리아를 건국한 종족이다. 불가리아엔 에르나크의 이름을 기려 이르니크(Irnik)란 마을이 있다.

 

7개 마자르 부족장이 헝가리 초원을 공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7개 마자르 부족장이 헝가리 초원을 공격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895년에 아틸라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마자르족(Magyars)의 아르파드(Árpád)7개 부족을 이끌고 헝가리 초원을 공격해 점령했다. 아르파드는 마자르족 최초의 대공이 되어 나라 이름을 헝가리(Hungary)라고 정했다. “훈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중세시대에 헝가리의 사료에는 마자르족이 훈족의 후예라거나 훈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세기 헝가리문학가 케자 시몬(Simon of Kéza)은 훈족과 헝가리인들이 후노르(Hunor)와 마고르(Magor)라는 형제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며, 헝가리족이 훈족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는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후 마자르족이 유럽인들과 섞이면서 오늘날 헝가리인이 되었다. 헝가리는 19세기에 게르만족의 종주국인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었는데 오스트리아 역사학자들은 헝가리인들의 훈족 뿌리설을 뒤집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족이 피노우그라이어(Finno-Ugric languages)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뿌리는 우랄산맥이라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후에도 현재 헝가리 역사학계의 주류도 훈족 뿌리설을 부정한다. 유럽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훈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굳이 들춰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헝가리 왕국의 귀족 다수는 20세기초까지 자신들이 훈족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헝가리의 파시즘 정당인 화살십자당(Arrow Cross Party)은 헝가리가 훈니아(Hunnia)라고 주장했다.

훈족 기원은 오늘날 국수주의 정당인 요비크(Jobbik)의 범투란주의(pan-Turanism)의 이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범투란주의는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둔 여러 민족들이 협력하자는 정치이념으로, 그 대상에는 헝가리족과 한국민족은 물론 핀족(Finns, 핀란드), 일본족, 사미족(Sami, 노르웨이 북부), 사모예드족(Samoyeds, 우랄산맥 북부), 투르크족, 몽골족, 만주족 등이 포함된다.

 

아틸라 /위키피디아
아틸라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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