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金씨 시조라는 흉노족 김일제는 누구인가
한국 金씨 시조라는 흉노족 김일제는 누구인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4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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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도왕 장남으로 한나라 포로로 잡혀가…역모 제압후 투후로 책봉받아

 

흉노인 가운데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김일제(金日磾, BC 134~BC 86)일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김()씨의 시조라는 견해 때문이다.

김일제는 중국 역사에 실재하는 인물이고, 그가 중국 씨 한 분파의 시조인 것은 맞다. 중국에선 을 진(jīn)으로 발음한다. 중국에는 황제(黃帝)의 아들인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를 시조로 하는 씨와,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시조로 하고 씨의 2대 계보가 있다고 한다. 이 두 족보는 전혀 다르다.

 

휴도왕과 함께 있는 김일제(왼쪽) /위키피디아
휴도왕과 함께 있는 김일제(왼쪽) /위키피디아

 

김일제는 현재 중국 간쑤성(甘肃省) 일대 하서주랑(河西走廊)에 살던 흉노족 다섯 번왕의 하나인 휴도왕(休屠王)의 맏아들이다. 休屠王은 휴저왕으로 읽기도 한다. 다섯 번왕은 휴도왕 이외에 혼야왕(昆邪王), 절란왕(折蘭王), 노호왕(虜胡王), 계저왕(稽沮王)이었다. 휴도왕의 영토는 언지산(焉支山)과 돈황 근처 삼위산(三危山) 일대였다.

김일제 초상화 /바이두백과
김일제 초상화 /바이두백과

 

예로부터 기련산맥(祁連山脈) 일대에는 흉노의 목장이 있었고 실크로드의 길목이었다. 또 여성 화장품 연지(臙脂)의 주원료인 홍람(紅藍)이 많이 재배되던 곳이기도 했다. 한나라와 흉노 모두에 이 일대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요충지였다.

 

BC 121, ()나라 무제(武帝)가 하서주랑의 흉노를 치기 위해 곽거병(霍去病)을 표기장군으로 임명해 기병 1만명을 주었다. 곽거병의 한군은 하서주랑으로 들어와 절란왕과 노후왕을 죽이고 제천금인을(祭天金人)을 빼앗았다. 제천금인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금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으로, 흉노족으로는 신성시하는 제물(祭物)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데다 제천금인마저 빼앗겼으니 흉노의 선우 이치사(伊稚斜單于)가 분노에 치를 떨었다. 선우는 휴도왕과 혼야왕을 선우의 막사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번왕이 선우에게 끌려가면 죽음이나 다름 없었다. 이 틈에 곽거병의 모사꾼들은 혼야왕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혼야왕은 휴도왕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했다. 하지만 휴도왕은 혼야왕의 제의를 거절했다.

혼야왕은 투항하고 휴도왕은 한군과 맞서 싸웠지만 전사하고 말았다. 곽거병은 휴도왕의 부인(알지)와 두 아들을 포로로 데려갔다. 두 아들은 김일제와 그의 동생 김윤(金倫)이다. 당시 김일제는 14세였다.

 

포로로 잡혀 장안(長安)으로 끌려간 김일제는 궁정의 말을 기르는 마장(馬場)에서 노예로 일했다. 그는 궁녀들이 옆을 지나가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말을 길렀다. 그런 게 눈에 띠어 한 무제는 그를 마장의 총책임자인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그후 그는 승승장구해 황제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김일제가 무제의 총애를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반역자를 처단한 일이다.

대신 망하라(莽何羅 또는 馬何羅)가 역모를 품고 무제를 시해하려 했다. 망하라가 단도를 품고 무제의 침소로 들어가려다 김일제에게 발각되었다. 김일제는 즉석에서 변고의 가능성을 알아채고 망하라를 쓰러뜨리고 칼을 빼앗았다.

한 무제는 김일제의 충성심에 감명을 받아 제천금인을 돌려주고 조상에 제사하도록 했다. 아울러 제천금인의 황금을 뜻하는 씨 성을 하사했다.

무제는 죽기 직전에 김일제를 아들 소제(昭帝)를 보필하는 섭정으로 지명하고 투후(秺侯)로 봉해 귀족 반열에 올렸다. 투현(秺縣)은 현재 중국 산동성(山東省) 하택(菏泽)시 성무현 옥화묘촌이다. 그곳을 봉지로 준 것이다.

김일제는 아들 김상(金賞)을 곽거병의 배다른 동생 곽광(霍光)의 딸과 결혼시켰다. 아버지를 죽인 가문과 통혼을 한 것이다.

투후가 된 후 김일제는 흉노족 3만명을 산동성 투현으로 이주시켰고, 그의 후예들이 나중에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 김일제는 BC 86년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김일제의 무덤 /바이두백과
김일제의 무덤 /바이두백과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金當)은 서기 8년 이모부인 왕망(王莽)을 도와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김일제의 묘비 /바이두백과
김일제의 묘비 /바이두백과

 

하지만 한() 왕조의 유()씨 세력들이 전국에서 힘을 결집해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유씨 왕조(후한)를 세웠다. 후한 광무제는 왕망 지지파를 토벌하면서 김씨 일족의 벼슬과 봉토를 빼앗았다. 이후 김일제 후손들은 중국에서 기반을 잃게 된다.

김일제 후손들은 후한의 탄압을 받게 되자, 대거 한반도로 이동해 신라와 가야의 왕족이 됐다는 설이 있다. 신라의 김알지, 미추왕, 내물왕, 금관국의 김수로왕이 모두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김일제의 무덤은 무릉(무제의 능)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로서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위치는 오늘날 간쑤성 흥평현(興平顯) 남귀향 도상촌이다. 감숙성 무위시에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중국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입구에는 김일제 봉지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그곳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투후사(秺侯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일제 가계도 /위키피디아
김일제 가계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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