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녀②…황제의 탐욕이 빚은 비극적 결말
조선의 공녀②…황제의 탐욕이 빚은 비극적 결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7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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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 영락제 총애 받기도…‘어여의 난’으로 조선출신 여인들 처형

 

조선 3대 태종 시절에 명나라 사신으로 한양에 들락거린 황엄(黃儼)이란 자는 툭하면 영락제(永樂帝)에게 바칠 공녀를 요구했다. 황엄은 황제가 조선 여성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색이 더 고운 여자를 보내라고 독촉했다. 태종 8(1408)5명의 처녀들을 바친데 이어 태종 10(1410)에 정씨를, 태종 17(1417)에 송씨와 한씨를 보냈다. 태종이 영락제에게 바친 여성은 모두 8명이었다. 위키피디아 중국어판에 따르면, 영락제는 정비인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 서씨(徐氏) 외에 25명의 후궁(황비)을 두었는데, 그중 8명이 조선인이다.

 

초기 명나라 수도는 난징(南京)이었다. 영락제는 14092월 몽골(韃靼)을 정벌하기 위해 베이징에 왔다가 조선에서 보낸 첫 공녀 5명을 만났다. 황제는 권씨가 마음에 들어 현인비(賢仁妃)로 봉했다. 또 오빠 권영균(權永均)을 명나라 관직으로 3품인 광록시경(光綠寺卿)에 제수하고 채단 60, 채견 3백필, () 10, 황금 2(), 백은 10, 5, 말안장 2, 2, 저화 3천장이란 막대한 물품을 하사했다.

그리고 다른 네 처녀들에게도 시호를 내렸는데, 권씨보다는 낮은 지위였다. 임씨는 순비(順妃), 이씨는 소의(昭儀), 여씨는 첩호(婕好), 최씨는 미인(美人)의 작위를 받았다. 또 이들의 혈육도 황제로부터 관직과 예물을 받았다.

 

영락제는 현인비를 아꼈다. 권씨는 외모가 빼어난데다 예인(藝人)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영락제는 정실 황후인 인효문황후가 2년전(1407)에 죽은 후에 새로 황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현인비를 사실상 황후 대접을 했다. 황제는 황후 다음 서열인 비()로 중국인 소헌귀비 왕씨와 조선출신 현인비 둘만 두었다.

<명사>(明史)에는 권현비(恭獻賢妃)에 대해 자질이 꽃나무가 무성하듯 아름다우면서 순수하고 옥퉁소를 잘 불어 황제가 사랑하고 가엽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권씨는 금세 중국어를 익혔다고 한다. 황후 서씨가 죽은후 영락제는 현인비에게 황후의 역할인 궁중의 일을 총괄케 하고, 자신의 의식주 일체를 맡겼다.

태종 8년에 베이징에 사신으로 간 유정현이 현인비 권씨와 친척이라는 말에 영락제는 권씨 본가에 자신의 말을 전하고 상당한 선물을 내려 줄 정도로 권씨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조선의 태종도 오빠 권영균을 사신을 보낼 때 홍저포 10, 흑마포 10필을 현인비에 전하게 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현인비가 조선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자료: 중국 사이트 歷史
자료: 중국 사이트 歷史

 

하지만 현인비는 중국에 도착한지 16개월 뒤인 14101024일 죽었다. 오빠 권영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동생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영락제가 몽골을 토벌하러 북방으로 갈 때 현인비를 데려갔는데, 베이징에 도착하기 전에 제남로라는 곳에서 사망했다. 영락제는 현인비의 오빠 권영균을 만나서는 눈물을 머금고 탄식을 쏟아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영락제는 황엄을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현인비 유족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도 전했다.

영락제는 현인비를 제남로에 가매장했다가 먼저 죽은 황후와 함께 합장하려 했다. 하지만 명나라 대신들이 비와 황후를 합장할수 없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황제의 뜻이 관철되지는 못했지만, 현인비의 무덤은 현재까지도 중국에서 잘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현인비 권씨의 묘 /바이두백과
현인비 권씨의 묘 /바이두백과

 

사건은 4년후에 터졌다. 1414, 조선의 조공사절단 윤자당(尹子當)이 황제를 알현하는데, 영락제가 조선 출신 후궁들 사이의 다툼 때문에 현인비 권씨가 죽었다면서 함께 간 여씨가 권비를 독살했다고 문제를 삼았다. 영락제는 윤자당에게 권씨를 죽인 여씨의 가족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윤자당이 중국에서 들었던 얘기로는 함께 공녀로 갔던 권씨와 여씨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여미인(呂美人)죽은 황후에게 자식이 있는데, 권씨가 궁중을 관리하는 것이 몇 달이 가겠느냐고 현인비를 질투했다는 것이다. 여씨는 조선 출신 내관에게서 독약(비상)을 얻어서 호도차에 비상 가루를 타서 권비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미인은 비()보다 아래인 빈()의 품계이고, 권씨는 출국할 때 18, 여씨는 16살이었다.

이 사실은 처음에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권씨의 노비와 여씨의 노비가 서로 싸울 때 권씨의 노비가 네 주인(여씨)이 약을 먹여 우리 주인(권씨)을 죽였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그 말이 영락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영락제는 사건경위를 조사해서 관련된 내관과 노비 등 수백명을 죽이고 여씨에게는 낙형(烙刑)을 가해 1개월만에 죽게 했다.

영락제가 조선의 사신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은 조선에 있는 여씨 가족을 모두 처형하라는 얘기였다.

 

조선의 임금은 명나라 황제가 진노했다는 소식에 일단 여씨 가족들을 감옥에 가뒀다. 여씨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미 장씨와 친척들이 감옥에 갇혔다. 그런후 태종은 대신들에게 여씨 일족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은지를 물었다.

우대신 한상덕은 사직을 무너뜨린 죄, 종묘와 왕릉을 파괴한 죄를 적용해 친족들을 노비로 삼는 방안을 주장했다. 영의정 하륜은 한술 더 떠 위로는 천자(天子)를 노하게 했고, 아래로는 본국에 수치를 안겼으니, 여씨 가족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재와 이숙번 등은 한쪽 말만 듣고 여씨 가족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머나먼 이국에서 조선 출신 두 여인이 서로 언니, 동생처럼 의지했을 터인데, 독살했다는 말은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노비의 일방적인 주장엔 믿음이 가지 않았다.

태종은 여러 주장을 들은후 여씨가 이미 죽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임금은 여씨의 어미 장씨만 관청의 노비로 하고, 다른 친족들은 모두 풀어주었다. 그러나 하륜은 어미 장씨라도 죽여 황제의 뜻에 부응하고 뒷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강단이 있는 임금이었다. 그는 영의정을 다독거리며 며칠후 장씨도 석방했다.

얼마후 조선에서 원민생을 명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원민생은 영락제에게 여씨의 어미를 이미 처형했다며 속여 버렸다. 영락제는 그 말을 듣고 만족해 했다고 한다.

 

진실은 10년후에 밝혀졌다. 세종실록에 그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6, 14241017) 명 황실에서 사건을 쉬쉬했기 때문에 중국 기록에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역사가들은 세종실록에 기록되기 3년전인 1421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본다.

영락제의 황궁에는 여()씨라는 중국 상인의 딸과 어()씨라는 궁녀가 있었다. 여씨와 어씨는 서로 동성애를 하며 내시와도 간통을 했다. 두 궁녀의 애정행각이 영락제의 귀에 들어갔다. 영락제는 두 여인을 아꼈기 때문에 눈감아 주었는데, 두 궁녀는 지레 두려워 하며 목을 매어 죽었다.

영락제가 화가 났다. 여씨의 여종들을 처참하게 고문하는 가운데 먼저 죽은 조선출신 여씨의 죽음에 대한 비화가 드러났다. 중국출신 여씨는 조선출신 여씨에게 성이 같으므로, 친하게 지내려 했지만 조선 여씨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중국 여씨가 조선 여씨가 독을 타서 현인비 권씨를 죽였다고 무고했고, 이런 이야기가 노비들 싸움에서 발설되었다는 것이다. 원흉은 중국 상인의 딸 여씨였다.

여씨 여종의 자백으로 28백명이 연루되어 그 중에 관련자는 죽여 버렸다. 심문 도중에 어떤 여인은 황제의 면전에 자기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내시와 간통하는 것인데 누구를 허물하느냐고 대들었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했다.

이 사건을 어여의 난’(魚呂之亂)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 간 여인들도 죄없이 죽었다. 임씨, 정씨는 목을 매어 자살했고, 황씨와 이씨는 국문 과정에서 참형을 당했다. 죽는 과정에서 황씨는 다른 연루자를 많이 댔지만, 이씨는 죽기는 마찬가지라.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 넣을까, 나 혼자 죽겠다고 했다고 실록은 전했다.

 

특히 어여의 난에서 죽은 황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그녀는 조선에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황씨는 베이징에 들어가기 전에 복통을 앓았는데 의원이 여러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황씨는 김치국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명나라 칙사 황엄이 그런 것을 어떻게 구하느냐고 화를 냈다고 한다.

황씨의 병이 낮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날 소변을 볼 때 음부에서 크기가 가지만한 살 덩어리가 나왔다. 몸종은 그 물건을 칙간에 버렸지만 다른 여종들이 이 사실을 알고 소문을 냈다.

영락제는 황씨가 처녀가 아님을 알고 물으니, 황씨는 일찍이 형부 이웃에 있는 아무개와 성관계를 했노라고 실토했다. 이에 황제가 불같이 화를 내고 태종을 문책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그러자 함께 간 한씨 여인이 이 사실을 알고 황제를 말렸다. 한씨는 태어나서 제 집에만 있던 황씨가 간택받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우리 임금께서 어찌 알수 있었겠느냐며 칙서를 보내지 말라고 애원했다. 영락제는 한씨의 말이 옳다고 해 조선 임금을 문책하지 않았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여의 난으로 조선 여인을 간택한 명나라 사신 황엄에게도 화가 미쳤다. 황엄은 이미 죽었는데, 영락제는 그의 관을 가르고 아내와 노비를 모두 관노로 만들었다. 기세등등하게 조선에서 임금과 고위 관리들을 윽박지르고 공녀를 간택하던 중국 칙사도 결국 불운한 종말을 맞은 것이다.

태종조에 끌려간 8명중에 권씨(현인비)는 먼저 죽고, 여씨는 독살설의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네명은 어여의 난에 사망했다. 영락제가 죽었을 때엔 한씨와 최씨 두명만 남아 있었다.

 

영락제 /위키피디아
영락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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