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공녀③…“언니 팔고 저마저 바치려 하오”
조선의 공녀③…“언니 팔고 저마저 바치려 하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1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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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사후 순장된 조선 여인…그 동생마저 바쳐지며 오빠에게 독설

 

조선 4대 임금 세종은 우리나라에서 성군으로 받들어지고 대왕이란 호칭이 붙는다. 하지만 세종은 철저한 중화주의자였고 그의 재위 시절에 네차례에 걸쳐 명나라에 공녀를 보냈다. 아버지 태종이 세차례 보낸 것보다 더 잦았고, 인원수도 더 많았다. 우리에게 주입된 세종의 이미지는 이 대목에서 퇴색된다.

세종 6(1424) 7,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원민생(元閔生)이 임금에게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말씀을 전했다.

영락제는 권비(현인비)가 살아있을 때는 음식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로는 음식이며, 술이며, 옷 세탁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 밴댕이), 붉은 새우젓,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려라.”고 했다. 영락제는 조선여인 권씨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황제 옆에 있던 환관이 좋은 처녀 3명을 진헌하도록 하라고 하니, 영락제는 크게 웃으며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데 능숙한 여종 5~6명도 함께 뽑아라고 지시했다고 원민생은 아뢰었다. (세종실록 678)

이때 영락제의 나이는 64세였다. 이 늙은 황제가 아직도 여색을 찾았던 것이다.

 

세종은 공녀를 뽑을 관청인 진헌색(進獻色)을 꾸리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아울러 은어, 연어, 문어등을 잡아 간이 맞게 말려서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여자들을 뽑으려 하는데, 뜻밖에 영락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해 여름 영락제는 노구를 이끌고 몽골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과로로 병에 걸려 진중에서 사망했다. 그의 맏아들 태자 주고치(朱高熾)가 뒤를 이어 홍희제(洪熙帝)가 되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세종은 공녀와 여종 선발을 중단했다. 조선으로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영락제가 죽을 때 조선에서 차출된 공녀 8명 가운데 이미 6명이 죽었다. 권씨(현인비)는 먼저 죽고, 여씨는 권씨 독살설의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네명은 어여의 난’(魚呂之亂)에 사망했다. 영락제가 죽을 때엔 한씨와 최씨 두명만 남아 있었다. 한씨는 한영정(韓永矴)의 딸로, 한확(韓確)의 누나였다. 최씨는 최득비(崔得霏)의 딸이었다.

어여의 난때에 최씨는 황제를 따라 남경(南京)에 갔다가 현지서 병이 들어 머물다가 대참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한씨도 조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방에 여러 날 갇혀 먹지 못하고 굶고 있었다. 그녀의 여종들이 모두 죽었다. 하지만 한 내시가 그를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들여보내 목숨을 구했다. 한씨는 그후 여비(麗妃)로 승격되어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중국 궁궐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노는 모습. /歷朝賢后故事圖(고궁박물원)
중국 궁궐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노는 모습. /歷朝賢后故事圖(고궁박물원)

 

그런데 명 황실에는 황제가 죽으면 후궁과 여종을 함께 묻는 순장제도의 야만적 풍습이 남아 있었다. 당시 영락제 장례에 30명의 궁인이 순장되었는데, 여기에 조선에서 온 최씨와 한씨가 포함되었다. 최씨는 1409, 한씨는 1417년에 중국에 들어갔는데, 최씨의 경우 15, 한씨는 불과 7년만에 황제와 함께 무덤에 들어갔다.

이로써 태종때 영락제에게 보낸 8명의 공녀는 모두 죽었다. 8명 모두 30세 이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태종때 영락제에 보낸 공녀 현황 >>

 

차출된 공녀

작위

사망 현황

 

시기

성씨

나이

부친

연도

원인

나이

1

(5)

1408. 11.

(태종 8)

권씨

18

권영균

현비

1410

질병

(독살설)

20

임씨

17

임쳠년

순비

1421

자살

30

이씨

17

이무창

소의

1421

참수

30

여씨

16

여귀산

첩호

1413

낙형

21

최씨

14

최득비

미인

1424

순장

29

2

(1)

1410. 11.

(태종 10)

정씨

18

정윤후

?

1421

자살

29

3

(2)

1417.7.

(태종17)

황씨

17

황하신

?

1421

참수

21

한씨

?

한영정

?

1424

순장

?

 

한씨는 죽기 직전에 고별인사차 들른 새 황제 홍희제를 만났다. 한씨는 자신이 모셨던 황제의 아들에게 유모가 나이가 많으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라 부탁했다. 유모 김흑(金黑)은 이역만리에서 자신을 돌보던 사실상 어미였고, ‘어여의 난에 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격고 사건이 끝난 뒤 무죄로 판명되어 특사 조치로 풀려났다. <세종실록>은 이런 여종들의 스토리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한씨와 최씨가 죽고 나서 홍희제는 김흑을 조선에 송환하려 했지만 궁중의 여인들이 반대했다. 그가 조선에 돌아가 어여의 난의 비밀을 퍼트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한씨와 최씨의 순장을 알고도 황친이라는 이유로 한확과 최득비를 영락제의 장례 사절로 보냈다.

 

중국 궁궐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노는 모습. /歷朝賢后故事圖(고궁박물원)
중국 궁궐에서 황제가 궁녀들과 노는 모습. /歷朝賢后故事圖(고궁박물원)

 

홍희제는 병약해서 조선의 여인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2년만에 죽고 장자 주첨기(朱瞻基)기가 26살의 젊은 나이에 이어받았으니, 명나라 5대 선덕제(宣德帝). 선덕제는 여색을 밝혔다. 이 젊은 황제는 이듬해 곧바로 조선에 미녀를 뽑아 올리라고 요구했다.

세종은 또다시 진헌색을 차리고 금혼령을 내렸다. 전국을 4개월간 뒤져 미녀 5명을 골랐다. 그 명단을 명나라에 보내니, 황제는 더 뽑으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세종 9(1427)7명의 미녀와 요리 담당 여종 10명을 명나라에 보냈다.

이 때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들은 7명 이외에 1명을 추가로 지정하고 돌아갔다. 그 사람은 영락제 장례 때 순장된 한씨의 여동생으로, 이름은 한계란(韓桂蘭)이다. 조선의 공녀 가운데 유일하게 성명이 알려진 인물이다.

 

명나라 사신이 한계란을 콕 집어 선정한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간택되어 영락제의 후궁으로 순장된 여비 한씨가 미모가 뛰어나 명 황실에서 그녀의 막내 여동생을 특정했다는 견해다. 또다른 설은 한계란의 오빠 한확이 명조의 황친(皇親)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는 속셈으로 동생을 보내려 백방으로 뛰었다는 것이다.

기실, 중국 황실에 딸 또는 누이를 보낸 가문은 명나라로부터 관직을 받고 많은 물품을 하사받았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황친에 대해 특별 대우를 했다.

영락제가 애지중지했던 권비(현인비)의 오빠 권영균(權永均)은 명나라에서 3품인 광록시경(光綠寺卿)에 제수받고 막대한 물품을 하사받았으며, 권비가 죽었을 때 명의 칙사가 권씨 집안을 찾아가 제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을 정리한 사관들은 권영균이 갑자기 부유하고 귀하게 되어 나라의 권력자들과 어울리며 교만하게 둘었고, 주색을 좋아하다가 일찍 죽었다고 비꼬았을 정도다.

그러하니 한확인들 욕심이 나지 않을리 없다. 누나를 영락제에 보내고, 이번엔 여동생을 영락제의 손자에게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한계란은 명나라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갑자기 병이 났다며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오빠 한확이 약을 구해 한계란에게 먹이니, 한씨는 약을 먹지 않고 오빠에게 쏘아댔다. “언니를 팔아 이미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 하오.” 한계란은 그렇게 독설을 내뱉고 시집갈 때 쓰려고 준비했던 침구를 찢고 아끼던 재물을 친척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세종실록은 전한다.(951)

한계란은 이듬해인 1428년에 명나라 사신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이 때 한확도 진헌사(進獻使)로 따라 들어갔다. 오빠로서 여동생을 바치는 사절단이 된 것이다.

그녀가 중국으로 떠날 때 부녀자들이 행차를 바라보며 언니가 들어가 순장된 것도 애석한데, 동생이 또 간다며 탄식하며 울었다고 한다.

 

한계란은 선덕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녀는 선덕제가 죽은 후 순장되지 않고 정통제(正統帝), 경태제(景泰帝), 성화제(成化帝)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4대에 걸쳐 황실의 어른 대접을 받았다. 후궁들은 그녀를 '로로(老老)"라고 존칭했다.

74세에 사망했을 때 성화제는 매우 슬퍼하여 백금과 옷감 등을 하사하고, 시호를 공신부인(恭愼夫人)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녀의 장례에 명나라 황태후를 비롯해 황가가 조의를 표하고, 베이징 서쪽 향산(香山)에 장사를 지냈다.

 

한편 1435년 선덕제가 죽은 후, 명 황실은 공녀의 몸종으로 따라간 하녀와 요리사, 예인(藝人) 53명의 조선 여성을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된 태황태후가 자비를 베푼 것이다. 이때 황궁 여인들의 반대로 귀국하지 못한 여비 한씨의 유모 김흑도 본국으로 돌아온다. 조선에서 간 여인 중에 45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 중국 땅에서 죽었을 것이다.

김흑은 돌아와 세종에게 조선 공녀들의 전후 사연들을 아뢰어 그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 17426)

 

조선의 공녀는 세종 이후에 중단되었다가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하면서 인조, 효종 때 재개되었다.

조선 왕실의 처녀 조공은 약소국의 설움이자 시련이었다. 조선 왕실은 상국의 지시를 따라야 했고, 그 지시에 의해 선발된 소녀들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숱한 설움을 당해야 했다.

 

명황제 선덕제 초상화 /위키피디아
명황제 선덕제 초상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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