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슬람史①…신라때 이슬람 문화와 접촉
한국의 이슬람史①…신라때 이슬람 문화와 접촉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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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괘릉 무인석에서 이슬람의 흔적…해상로 통해 아랍에 알려져

 

기독교, 이슬람, 불교를 세계 3대 종교로 통칭한다. 이중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종교는 불교이고, 여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 다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종교는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고려 시대의 문헌에 회회(回回)리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신라 말기부터 들어왔다는 게 통설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온 기독교는 우리나라에서 그 역사가 이슬람에 비해 짧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슬람이 들어왔다는 기록은 우리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랍의 역사 기록에 그 정황이 드러나고, 신라 왕릉에 서 있는 이방인 모습의 석물(石物)에서 이 때 이슬람 문화와 접촉한 흔적을 찾을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 886) 때의 처용(處容)38대 원성왕 (元聖王, 재위 785798)의 무덤인 괘릉(掛陵)의 무인석(武人石)이다.

 

울산 남구 황성동의 처용암 /문화재청
울산 남구 황성동의 처용암 /문화재청

 

처용의 설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왕이 개운포(울주)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는데, 그가 처용이다. 후대에 그를 기린 처용가와 처용무가 전해오는데, 처용무에 등장하는 처용의 탈이 아랍계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일부 학자들이 처용을 이슬람 상인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괘릉의 무인석은 박진감이 넘치며,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무인석 얼굴에 깊숙하게 골이 파인 눈자위, 커다란 매부리코, 곱실거리는 수염, 주걱턱의 모습은 여느 동양인과는 다른 서역인의 모습이다. 괘릉 무인석의 얼굴에 대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과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원성왕 재위시절인 8세기 말에서 헌강왕 시절인 9세기에 신라는 당나라 뿐 아니라 아랍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음을 알수 있다. 당시 아랍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는 이슬람의 세계였다.

 

경주 괘릉의 무인석 /김현민
경주 괘릉의 무인석 /김현민

 

1475년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발견하기 앞서 인도양과 태평양 서안에는 오래전부터 중국, 아랍을 잇는 해상교역로가 열려 있었다.

1998년 인도네시아 자바해 벨리퉁섬 해역에서 발굴된 난파선은 9세기 아랍의 무역선으로 확인되었다. 벨리퉁 난파선에는 67,000여점의 각종 보물이 가득 차 있었다. 파손된 것을 포함하면 7만 점으로 추정된다. ·은 그릇과 은괴, 청동거울, 유리병, 칠기, 동전, 선상 생활품 등이다.

이 난파선은 해상 실크로드를 따라 아시아를 왕래하던 아랍 무역선이었다. 출발지는 당()나라 국제무역항인 광저우(廣州)였고, 목적지는 페르시아만의 무역항으로 추정된다. 발굴된 도자기에 보력(寶曆) 2716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 경종(敬宗) 2, 서기 826년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8~9세기에 중국 남부 광저우(廣州)에 수만명의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 숙종(肅宗) 3년인 7589, 원인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과 페르시아인들이 광저우시를 약탈하고 도망쳤다. 아마도 당나라 관헌과 아랍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 사서에는 大食波斯寇廣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라센과 페르시아가 광저우를 약탈했다는 것이다. 대식국(大食國)은 사라센, 즉 아랍이다. 당시 당나라는 절도사들이 지방군벌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 숙종은 분노했지만, 힘이 미치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다.

당의 황제를 대신해 아랍과 페르시이안들에게 복수를 한 사람은 전신공(田神功)이라는 지방군벌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저항하던 인물인데, 양쯔강(揚子江) 어귀의 무역도시 양저우(揚州)를 쳐들어가 그곳에 있던 대식국과 페르시아인들을 수천명 학살했다. 광저우 학살이 발생한지 2년후인 서기 760년의 일이다. 중국 기록에는 大食波斯賈胡死者數千人”(대식과 페르시아 상인 수천명이 죽었다), “殺商胡波斯數千人”(상인과 페르시아인 수천명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다.

120년후 이번에는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가 아랍인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황소의 반란군은 879년 광저우를 기습했다. 그곳에는 중국이 대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서 대식국과 페르시아인들이 다시 활약하고 있었다. 황소군은 이들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이때 살해된 사람은 페르시아 이슬림교도, 아랍의 이슬람교도, 유태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들이었다. 수천명이 살상되었다. 1859년 미국 선교단이 이때 황소군의 공격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12만명으로 추정했다. 또다른 연구자는 사망자가 12~2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어쨌든 고대에 중국 남부 항구도시에 20만명의 아랍인들이 거주했다는 사실은 중국과 아랍 사이에 엄청난 교역로가 열려 있음을 확인케 한다. 이들 아랍인, 페르시아인은 이슬람이었다.

 

해상 실크로드와 육상 비단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상 실크로드와 육상 비단길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아랍인들은 중국 동쪽에 위치한 신라를 인지했다. 이슬람 학자들의 저술에는 이슬람의 신라의 위치와 생활, 이슬람의 진출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드러난다.

9세기 페르시아의 지리학자였던 이븐 쿠르다드비(Ibn Khurdhadbih)<왕국과 도로총람>( Kitāb al Masālik w’al Mamālik, The Book of Roads and Kingdoms)이라는 책에서 신라에 거주하는 이슬람에 대해 최초로 언급했다. 이 책은 846~847경에 쓰여졌는데, 신라 46대 문성왕 시기다.

851년 아랍 상인 슐레이만 알 타지르(Sulaiman Al-Tajir)가 쓴 여행기에서 신라를 소개했다. “중국은 바다 쪽으로 신라 군도에 막혀 있다. 신라인들은 백인이고, 중국 황제와 평화롭게 지내며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 아랍인들은 아무도 그들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 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나라에는 흰 매가 있다.”

중세 아랍 역사학자 알 마수디(Al Masudi)947<황금초원과 보석광>(The Meadows of Gold and Mines of Gems)이란 책에서 신라가 중국 동쪽 바닷가나 육지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고 했다.

966년 이집트의 지리학자 알 마크리지(Al-Maqrizi)<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를 언급했다. “중국 동쪽에 신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그곳이 공기가 맑고 재부가 많으며 땅이 비옥하고 물이 좋을 뿐 아니라, 주인의 성격도 양호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바드룻 딘이라는 이슬람 학자도 신라는 부유한 나리이고, 아랍인들이 들어가면 아름다움에 현혹이 되어 끝내 떠나려 하지 않았다고 썼다.

 

처용무 /문화재청
처용무 /문화재청

 

이상의 자료를 종합하면 국내 문헌에는 이슬람이 신라에 거주한 사실이 없지만 이슬람의 자료에서 이슬람이 신라에 진출했음이 확인된다.

신라에 온 이슬람은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왔다가 신라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처용이 등장한 헌강왕대(875~ 886)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의 이슬람 수천명을 약탈하고 살상했던 때(879)의 전후다. 처용은 아랍 상인이었다가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도피해 신라의 아름다움에 빠져 눌러 앉았던 게 아닐까.

처용이 등장하는 개운포는 지금 울산으로, 경주의 외항이었다. 인도양과 남지나해, 동지나해를 거쳐 무역을 하던 이슬람 상인이 울산까지 왔을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낯설었기에 신라인들은 용왕의 전설을 만들어 냈고, 처용을 미지의 인물로 각색했을 것이다. 처용이 이슬람이었다는 학계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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