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슬람史②…고려, 해상·육상 통해 교류
한국의 이슬람史②…고려, 해상·육상 통해 교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1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초, 대식국 상인들과 교역…원대에 회회족, 정착하며 큰 영향력

 

<고려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현종 15(1024) 9, 대식국(大食國)의 열라자(悅羅慈) 10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현종 16(1025) 9, 대식국(大食國)에서 만하(蠻夏)와 선라자(詵羅慈) 100인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정종 6(1040) 1115, 대식국(大食國)의 객상(客商) 보나합(保那盍) 등이 와서 수은(水銀), 용치(龍齒), 점성향(占城香), 몰약(沒藥), 대소목(大蘇木) 등의 물품을 바쳤다. 유사(有司)에게 명하기를 객관(客館)에서 우대하며 대접하게 하였고, 돌아갈 때에는 황금과 명주[金帛]를 넉넉하게 하사하였다.

 

대식국은 아라비아를 의미하며, 열라자 만하 선라자 보나합은 아랍인들의 이름이다. 아랍 상인 100명이 세차례에 걸쳐 와서 고려와 무역거래를 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 편찬자들은 조공무역의 형식으로 기술했지만 현실에선 대등한 관계의 상업무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라비아 상단(商團)의 규모가 컸다. 100명이 왔다면 교역의 규모도 컸다고 볼수 있다. 그들은 고려에 와서 현지 정세를 파악하고 갔을 것이다. 국왕이 후하게 대접했다는 것은 고려가 공무역을 활성화시켰음을 의미한다.

 

당시 아라비아는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 시대였다. 압바스 왕조는 750년 우마이야 왕조(Umayyad Caliphate)를 무너뜨리고 세운 이슬람 왕조로,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이 왕조는 1250년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바그다드를 함락할 때까지 아랍의 패권을 쥐었다. 압바스 왕조는 서쪽으로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 중동,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서부까지 차지한 광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당시 고려 수도 송도(松都)의 외항은 예성강을 끼고 있는 벽란도(碧瀾渡)였다. 그 곳을 거점으로 고려는 아랍 이슬람과 무역거래를 했다. 무역거래는 해상을 통해 이뤄졌다. 아랍상인들은 페르시아~인도~인도네시아~중국~고려로 이어지는 해상항로를 개척했고, 고려는 일본과 함께 이 긴 해상항로의 극동지역 교역국이었다.

 

압바스 왕조의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압바스 왕조의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당시 무역선은 돛을 이용한 범선(帆船)이었기 때문에 계절풍을 이용했다. <고려사>에 대식국 상단이 등장하는 시기가 연중 9~11월에 집중된 것은 이때 바람을 타고 북상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계절풍은 대륙과 바다의 기압 변화로 대략 6개월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아랍 상인들은 3~4개월 정도 고려에 머물렀을 것이다.

짤막짤막하게 사실만 서술한 <고려사>에 대식국 기사가 세 번 나올 정도이니, 고려와 아랍의 접촉이 상당히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벽란도에 거주지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랍 이슬람들은 종교행사인 팔관회(八關會)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팔관회는 개경에서 1115, 서경(평양)에서 1015일에 열렸는데, 아랍인들의 고려 방문시기와 일치한다.

 

압바스 왕조가 몽골()에 의해 붕괴된 후 고려는 원나라를 통해 이슬람과의 본격적인 접촉을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1274년 충렬왕 때 들어온 삼가(三哥)라는 회회(回回) 사람이다. 회회인은 중국 서부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위구르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 부르는 것도 위구르족의 종교라는 뜻에서 나왔다.

<고려사> 열전 장순룡(張舜龍)조에 그 기사가 나온다.

장순룡(張舜龍)은 원래 회회(回回) 사람으로, 초명은 삼가(三哥, 셍게)였다. 아버지 장경(張卿)은 원 세조(世祖)를 섬겨 필도적(必闍赤, 비칙치)이 되었다. 장순룡은 제국공주(齊國公主)의 겁령구(怯怜口, 케링구)로서 고려에 와서 낭장(郞將)에 임명된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將軍)이 되었으며, 지금의 성명(姓名)으로 바꾸었다.”

위구르인이 원나라 조정에서 행정책임자로 일하다가 충렬왕비가 된 몽골의 제국공주의 시종무관으로 고려에 온 것이다.

장순룡은 덕수 장씨(德水 張氏)의 시조다. 고려에 와서 결혼하고 정착해 후손을 둔 것이다.

<고려사>에는 장순룡은 권력을 다투고, 경쟁적으로 사치스럽게 하였다. 저택을 지을 때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지어 기와와 조약돌로 바깥담을 쌓고 화초 무늬로 장식하니, 당시 사람들이 장씨네 집 담장[張家墻]’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구르인으로 고려에서 상당한 세도를 누렸음을 알수 있다.

 

위구르인 /위키피디아
위구르인 /위키피디아

 

회회인 이슬람 상인들은 고려사회에 화제가 되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雙花店雙花 사라 가고신ᄃᆞᆫ/ 回回 아비 내 손목을 주여이다 /이 말이 이 밖을 나명들명

만두집에 만두를 사러 갔더니만, 위구르인이 내 손목을 잡았다.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가면……하는 이 내용은 이슬람 상인이 고려여인을 희롱하는 장면이다. 개성에 이슬람 상인이 점포를 차려놓고 그들 고유의 쌍화라는 만두를 판매했음을 설명한다.

고려사절요 충렬왕조(63)에 원()나라에서 회회인이 제멋대로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이 고려 땅에서 방자하게 굴었음을 보여준다.

 

1490년 위구르 제국 /위키피디아
1490년 위구르 제국 /위키피디아

 

중국 광저우박물관에 소장된 한 묘비문에는 1312년에 고려인 라마단이 와서 병을 얻어 사망한후 이슬람 묘역에 안장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순천향대 박현규 교수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 “‘라마단(剌馬丹)은 고려 사람이다. 나이 38세다. 1312(충선왕 4)에 알라웃딘의 아들로 태어난 라마단은 북경(北京) 남쪽의 청현관(靑玄關)이란 저택에 살다가 1349(충정왕 1) 광서도(廣西道) 용주(容州) 육천현(陸川縣)을 다스리는 다루가치(達魯花赤·지방통치관)에 임명됐다. 그해 322일 숨졌다.” (동아일보) 1)

이미 고려 사회에 무슬림들이 상당히 존재하고, 중국을 오갔음을 입증하는 자료다.

 

정수일 교수는 고려와 이슬람세계간의 교류품으로 소주를 꼽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소주의 연원을 고려시대로 잡는다. 다시 그 연원을 캐올라가면 원조는 아랍에 가 닿는다. 세 번 고아 내린 증류주라 하여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천년께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뒤 증류주는 오늘날까지도 중동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란 이름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몽골 서정군은 1258년 압바스조를 공략할 때 처음 아라끄의 양조법을 배워간 것으로 전해진다. 몽골군은 이후 일본 원정을 위해 주둔한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지에서 이 술을 처음 빚기 시작했다. 원정군이 가죽 술통에 넣고 다니며 마시는 아라끄를 공급하기 위해 고려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라는 것이다. 고려 소주의 본산인 개성에서는 근세까지도 소주를 아락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2)

 

경희대 유효숙 “이슬람과 통일신라·고려의 교류”에서 캡쳐
경희대 유효숙 “이슬람과 통일신라·고려의 교류”에서 캡쳐

 

우리 역사에서 이슬람과의 첫 만남은 신라 말기다. 아랍 세계는 신라를 인지했고, 그들은 신라를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살기좋은 곳”, “황금이 나는 나라로 알고 있었다. 고려가 새 왕조를 일으키자 대식국이 무역거래를 재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영어식 표현 'Korea'는 외국인들이 고려를 발음하면서 생겼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Korea를 널리 알린 사람은 이슬람상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려는 초기에 해로로 아라비아(사라센)과 교역하고, 후기엔 육로로 서역인들을 만난 것이다. 이를 통해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가 알려졌다.

 


1) 동아일보 고려인 이슬람교 라마단묘비 발견

2) 한겨레 고려와 이슬람의 만남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