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슬람史③…조선초기엔 궁중조회 참석
한국의 이슬람史③…조선초기엔 궁중조회 참석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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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7년 금지조치 이후 5백년간 중단…일제 때 투르크계, 서울서 영업

 

태종실록에 “7(1407), 회회(回回) 사문(沙門) 도로(都老)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명하여 집을 주어서 살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회회는 위구르인, 사문은 성직자다. 이슬람 성직자 도로가 가족을 데리고 귀화를 신청했고,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는 내용이다. 도로가 사람 이름인지, 족장을 의미하는 지위인지는 명확치 않다. 실록에 일본인에게도 도로(都老) 명칭이 많은 것으로 보아 족장 또는 수장 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이슬람 성직자는 5년후인 1412년에 또 등장한다. 도로는 일찍이 본국에 있을 때 수정모주(水精帽珠, 모자 꼭대기에 다는 수정 구슬)를 만들었는데, “조선에는 산천이 많아서 반드시 진귀한 보화를 가졌을 것이니, 만일 저를 두루 돌아다니게 한다면 수정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그는 조선에 오기 전에 보석상이었던 것 같다. 임금은 이슬람 성직자에게 금강산(金剛山순흥(順興김해(金海) 등지에서 수정을 캐도록 허락했다.

한달후 도로는 수정 3백근을 캐서 경성도 관찰사에게 바쳤고, 관찰사는 임금에게 상납했다. 이듬해에도 도로는 순흥부(경북 영주)에서 수정을 캐서 바쳤다. 세종은 1422년에 이슬람 성직자 사문에게 쌀 5석을 내렸다.

조선 왕실은 초기에만 해도 이슬람에 대해 포용적이었다. 이민을 허락하고 전문직에 종사할수 있게 했다. 태종 시기에 도로 이외에도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태종은 이슬람 성직자 다라(多羅)에게 쌀 10석을 내려 주고, 좋은 옥(良玉)을 내어 각서(刻署, 도장 새기기)하여 바치도록 했다. 도장을 새기는 일도 보석 가공처럼 정밀을 요하는데, 다라가 그런 기술이 있었기에 임금이 특수 임무를 맡겼을 것이다.

 

세종 초기에 이슬람 교인들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대표로 참석했다. 경복궁에서 열린 세종 즉위식(1418)에 회회 노인과 승도들이 모두 참여했다. 종묘 제례에서도 회회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엎드려 예를 다했다. 회회인들이 부른 노래는 코란 송축이었다. 1419년 설날 하례식에도 이슬람교도들은 불교도, 왜인(倭人)들과 함께 세종 임금께 의례를 올렸다.

세종 8년까지 이슬람 교도들은 신년하례, 망궐례에 야인(만주족), 왜인들과 함게 신하의 반열에 서서 예를 행했다.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이슬람 복장으로 기도를 했다. 그들은 왕실이 주최하는 조회에 참석해 코란을 읽고 이슬람 기도를 올리며 왕실의 안녕과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했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의 기도와 코란 낭송이 성리학에 젖어 있는 사대부들을 자극했다. 드디어 세종 9(1427), 예조에서 상소문이 올라왔다.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 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마침내 세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회회도(이슬람교도)의 조회참여를 금지했다. 이로써 이때부터 조선에 살던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무너지고, 조선에 융화되어 흔적 없이 사라진다.

 

슬람 역법을 토대로 한 조선조의 혼천의 /위키피디아
슬람 역법을 토대로 한 조선조의 혼천의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슬람이 전해준 역법은 우리 고유의 역법 개발에 큰 도움을 준다.

세종은 집현전에 영을 내려 우리 천문에 맞는 역법을 개발하라고 했다. 조선은 그동안 중국의 수시력을 가져다 썼는데 해가 뜨고 지는 시각과 달의 움직임이 맞지 않았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달력이 정확해야 한다. 세종의 명을 받은 정인지, 정흠, 정초 등 집현전 학자들은 중국에 가서 수시력을 연구해 보니 그 천문학적 토대가 중국 역법이 아니라 이슬람 역법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이슬람 역법을 자기네 천문에 맞게 고쳐 썼으니 조선의 천문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정인지는 이슬람 역법의 원리와 과학을 연구해 조선의 일출과 일몰시간, 절기를 대입해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으로,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음력의 기초다.

조선시대 혼천의(渾天儀)라는 천문기기는 이슬람 역법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427년 세종의 금지조치 이후 500년간 국내에서 이슬람 활동은 사라진다.

압둘라시드 이브라힘 /위키피디아
압둘라시드 이브라힘 /위키피디아

 

1909년 오스만투르크의 저널리스트 압둘라시드 이브라힘(Abdurreshid Ibrahim)이 일본을 거쳐 조선을 열흘간 방문해 <아시아 여행보고서>를 출판했다. 시베리아 타타르계인 그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철도여행을 하면서 조선 민중을 접촉하고 지도층과 대화를 나눴다. 그는 조선에 관해 30 페이지 짜리 보고서에서 조선의 현실, 지도자들의 친일관, 사회상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 이슬람 사상가는 조선 독립과 민족혼 부활에 관해 아낌없이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일제강점기 이후 러시아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이슬람인들이 조선 땅에 거주했다. 투르크계 이슬람 교도들은 1998년 만주 동청 철도 부설에 참여한 이후 한반도 북쪽 지방에 소규모 정착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러시아 혁명 기간에 볼셰비키가 소수민족을 탄압하자 투르크계 이슬람 수백명이 박해를 피해 조선 땅에 들어왔다. 그들은 서울, 대구, 대전, 목포, 일본, 평양, 해산, 신의주 등에 거주하며 무역과 포목점, 양복점 등을 경영했다. 특히 종로, 소공동에서 그들이 운영한 양복점은 우리나라에 양복문화를 전수한 효시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서울에는 투르크계 이슬람이 35~40가구에 120명 정도가 30개 이상의 상점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국에는 250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1928년에는 이들이 모여 서울에서 무슬림-터키 협회를 구성하고 자체 학교와 문화회관 등을 소유했다. 이들이 매입한 문화회관은 서울 중심지에 있는 2층 건물로, 그곳에는 예배소, 학교등이 있었으며, 서울 홍제동에는 이슬람 공원묘지를 조성, 그들만의 장례문화를 가졌다.

투르크인들은 점포에 조선인을 고용했는데, 이들중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932년 주인의 권유로 개종한 박재성씨는 그후 샤일 박으로 개명하고 이스탄불로 건너가 터키인이 되었다. 한국인 최초의 이슬람인으로 기록된다.

일제는 조선인에 비해 투르크계 이슬람에게 관대했는데, 이들의 경제적 부의 축적이 조선인들로부터 질시의 표적이 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국내에 살던 투르크계는 캐나다, 호주, 터키 등으로 이주를 해 19506·25 전쟁 이전에 모두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이슬람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터키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면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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