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요술피리 만파식적는 어떤 보물이었나
신라의 요술피리 만파식적는 어떤 보물이었나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4 11: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비가 왔다고…왕조의 위대함 보여주는 설화

 

삼한을 통일한 신라에는 보물이 있었다. 만파식적(萬波息笛)이란 요술 피리다.

통일신라 시대에 임금이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고,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고,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요술피리는 신통방통한 물건이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두 개 챕터에 걸쳐 장황하게 요술피리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했다. 삼한을 통일한 김씨 왕조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일종의 설화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사적 엳었다고 하는 경주 이견대(利見臺) /문화재청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고 하는 경주 이견대(利見臺) /문화재청

 

신문왕 2(682) 파진찬 박숙청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있었는데,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 와서 물결에 따라 오가고 있습니다.”

왕이 이상하게 여기어 천문관에게 점을 치게 했더니, 천문관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선왕(문무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김유신공도 신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나라를 지킬 보물을 내리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바닷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동해 바닷가 감은사로 행차해 사람을 보내 그 산을 살펴보도록 했다. 산의 모습은 마치 거북이 머리 같았고 그 위에는 한 줄기의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해졌다.

신문왕은 감은사에 묵다가 배를 타고 움직이는 섬에 들어갔는데, 용이 검은 옥띠를 받들고 와서 바쳤다. 왕이 용에게 물었다. “이 산의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고 혹은 합해지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도 합해진 연후에야 소리가 납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서 불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마음을 합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에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왕이 기뻐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했다. 그리고 명을 내려 대나무를 베도록 했는데, 산과 용이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 소식을 태자(후에 효소왕)이 듣고 달려와 축하하며 옥대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 옥띠의 여러 개의 장식은 모두 다 진짜 용입니다.”

왕이 놀라서 옥띠의 두 번째 장식을 따서 계곡물에 넣었더니 용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연못이 되었다.

신문왕은 대궐로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하였다.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면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었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고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신문왕이 죽고 세자가 왕이 되니 효소왕이다. 효소왕은 원년(692)에 대현(大玄) 살찬(薩飡)의 아들 부례랑(夫禮郞)을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으로 삼았다. 따르는 무리가 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안상(安常)과 가장 가까웠다.

이듬해인 6933월에 부례랑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으로 놀러갔는데, 북명(北溟, 강릉 북쪽)의 경계에 이르렀다가 말갈족에게 잡혀 갔다. 무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돌아왔지만 안상만이 홀로 추격했다.

효소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선왕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나에게 전해주시어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국선이 갑자기 적에게 잡혀갔단 말인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뒤덮었다. 왕은 두려워 해 조사해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천존고 안에 보관되어 있던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말했다.

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었고, 또 오늘은 가야금과 피리까지 잃었단 말인가?”

왕은 즉시 창고지기 등 5명을 가두었다. 그리고 병력을 소집해 가야금과 피리를 찾아오는 자에게는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노라고 말했다.

부례랑의 부모가 백율사 관음보살상 앞으로 나아가 여러 날 동안 저녁마다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향을 놓는 탁자 위에 가야금과 피리 두 보물이 놓여 있고,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도 불상 뒤에서 나와 이르렀다. 부모는 넘어질 듯 기뻐하며 어찌된 일인지 그 내력을 불어보았더니, 부례랑이 대답했다.

제가 포로가 되어 적의 집에서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용모가 단정한 한 스님이 손에 거문고와 피리를 들고 와서는 제게 고향 생각을 하느냐?’ 하기에, 저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님과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라하고는 저를 이끌고 바닷가로 가셨는데, 안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곧 피리를 둘로 쪼개 저희 두 사람에게 각각 하나씩 타게 하고는 자신은 가야금을 타고서 둥실둥실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은 매우 놀라 그들을 맞아들였다. 부례랑은 가야금과 피리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부례랑을 재상인 대각간으로 삼았다.

 

그해 612일에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났는데, 17일에 서쪽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천문을 담당하는 관리가 아뢰었다.

가야금과 피리의 상서로움에 대해 작위를 봉하지 않아 그러한 것이옵니다.”

그래서 신령스러운 피리를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봉하였더니 혜성이 곧 사라졌다. 이후에도 영험하고 기이한 일이 많았지만, 일연은 글이 번거로워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고 서술했다.

 

천존고 /문화재청
천존고 /문화재청

 

신라시대에 이 보물을 보관하던 장소가 천존고(天尊庫)였다. 하늘이 내린 보물을 보관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천존고는 신라 궁궐인 월성(月城)에 있었다고 한다. 이 천존고가 실재했는지, 설화에만 등장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18년에 그동안 발굴한 신라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를 짓고, <삼국유사>에 만파식적과 가야금을 보관하던 천존고(天尊庫)의 이름을 살려 부활시켰다.

규모는 연면적 3,935(대지면적 7,997)에 지하 1, 지상 3층이며, 내부에는 일반수장고 4, 특수수장고 1, 석재수장고 1실을 완비하고 있다. 또 소장유물의 열람 공간, 출토유물의 전시 공간, 소규모 회의 공간 등을 함께 갖추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