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시장, 반역자 처형하고 가뭄때 옮기는 곳
고대의 시장, 반역자 처형하고 가뭄때 옮기는 곳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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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시대에 사유재산 보호…신라시대엔 담당관청 두어 시장 관리

 

사람이 사는 곳엔 시장이 열린다. 시장에선 서로 생산하고 남은 물건을 교환한다. 우리 역사에서 시장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백성들은 시장에서 모여 갖가지 물건을 사고 팔았다. 그곳에서 정보가 오갔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거래되었다.

고조선 사회엔 8조금법(八條法禁)이 있었다. <한서> 지리지에 그중 3개조항이 전해지는데,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것 등이다.

고대에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고조선 시대에 시장이 있어 곡물이 거래되고, 화폐가 통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고조선 영역인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 곳곳에서 중국 연()나라 화폐 명도전(明刀錢)이 발견되었다. 고조선은 중국 북부지역과 하나의 화폐통용권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시장은 우리 고유어로 저자라고 한다. 저ᄌᆞ, 저재라고도 했다. 시장의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에 시장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온달이 활동하는 6세기에 고구려 시장에서는 노비, , , 생활필수품 등이 거래되었다. 시장의 규모가 컸음을 알수 있다.

고구려 미천왕 20(319) 12월에 모용외는 그의 아들 인()에게 요동을 진정시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고구려본기 미천왕조)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저자거리(市井)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공주가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 노비와 소, 말과 기물 등을 사니 살림살이가 모두 갖춰졌다. 공주가 온달에게 말했다. “부디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마시고, 나라에서 키우던 말 중에서 병들고 파리해져 쫓겨난 말을 골라 사십시오.” (열전 온달조)

 

백제에도 시장이 있었다.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는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으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다. ‘져재 녀러신고요라는 구절을 현대어로 풀이하면 온 시장을 돌아디니고 계신가요라는 뜻이다. 보부상이 전국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도 백제의 시장 모습이 나타난다.

삼근왕 2(478), 은솔 연신이 고구려로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백제본기 삼근왕조)

서동(薯童)은 늘 마를 캐서 팔아 생활하였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삼국유사 기이 무왕조)

의자왕 20(660), 여름 4,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들었다. 왕도의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에 넘어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백제본기 의자왕조)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무왕은 서동이라 불리던 어린 시절에 마를 캐서 시장에 파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백제가 패망할 때 대혼란에 빠져 있는 왕도 부여의 시장 사람들 모습이 그려진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뒤늦게 발전했지만 영토를 확장하고 삼한을 통일하면서 시장도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소지왕 12(489),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다.

지증왕 10(509) 봄 정월, 서울 동시(東市)를 설치하였다.

효소왕 4(695), 서시(西市)와 남시(南市)의 두 시장을 설치하였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시장은 관설시장이다. 그 이전에 자연발생적인 사설시장이 있었는데, ()이 시장을 통제하며 물자를 공급하고 조달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애 따르면, 동시와 서시, 남시에 동시전(東市典), 서시전(西市典), 남시전(南市典)이란 관청을 두었다. 각 관청에는 감() 2, 대사(大舍) 2명 등 4명의 관리를 두었다. 그 아래에 2명의 서생(書生)4명의 사()를 두었다. 아마 서기 또는 경리에 해당한 것 같다. 시장 하나에 10명의 관리를 두었으니, 시장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관측된다.

신라는 17등급의 관직을 두었는데, 각 시전의 총감독인 감()은 대나마(10등급)에서 나마(11등급) 사이였고, 그 아래 대사(大舍)는 나마(11등급)에서 사지(13등급)까지였다. 왕족인 진골은 이런 자리를 맡지 않았고, 6두품의 자리였다.

 

충남 금산군의 민간기우제 금산농바우끄시기 /문화재청
충남 금산군의 민간기우제 금산농바우끄시기 /문화재청

 

삼국시대에 시장은 중죄인들을 처형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장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기 때문에 반역자나 중죄인을 처형해 집권자의 힘을 과시하고 죄인과 그 가족에게 수치를 안기기에 적합한 곳이다. 또 저자거리에 나온 사람들과 상인들은 이곳저곳 이동하기 때문에 소문을 빨리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고구려 신대왕 2(166),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이 아뢰기를, “만약 대왕께서 법에 따라 죄를 결정하시어 저자에 버리시더라도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백제 삼근왕 2(478), 은솔 연신이 고구려로 그의 처자들을 잡아 웅진(熊津)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신라 진평왕 53(631), 임금이 반란을 일으킨 이찬 칠숙을 붙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 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신라, 백제, 고구려 모두가 반란자를 처형할 때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 그 목을 베었다. 또 시체를 시장에 버리기도 했다. 시장에 시체를 버리는 기시(棄市)제도는 중국 진()나라 때부터 있었다. 반역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장이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운룡도 /문화재청
운룡도 /문화재청

 

<삼국사기>에 시장에 관해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다.

진평왕 50(628),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시장을 옮기고 용 그림을 그려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가을과 겨울, 백성들이 굶주려서 자녀를 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夏 大旱 移市 畵龍祈雨 秋冬民飢 賣子女)

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기우제를 지냈다(移市祈雨)는 것이다. 시장을 옮겨 기우제를 지내는 주례(周禮)에 나오는데, 신라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이시기우(移市祈雨)의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 왕실이 기우제를 지낼 때 서울의 시장을 옮기고 숭례문을 닫도록 했다.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내는 풍속은 그후 고려,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낼 때 서울에서는 점포를 닫고 시장을 옮겼고, 지방에서는 시장을 강가 또는 평소 물에 잠겨 있는 곳으로 옮겼다. 즉 시끄러운 시장을 물 가까이 둠으로써 잠자는 용을 깨워 비를 내리게 하려는 주술적인 의미였다. 그 때 그린 그림이 구름 속에 승천하는 용을 그린 운룡도(雲龍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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