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아프리카 해적의 종언③…무력개입 나선 서구
北아프리카 해적의 종언③…무력개입 나선 서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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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어 영국, 알제 함포사격…유럽, 해적근절 공동행동 나서

 

1805년 미 해군이 트리폴리의 해적소굴을 제압한 이후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당분간 미국 상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북아프리카 해적 거점은 트리폴리 이외에도 알제, 튀니스가 있었다. 미국은 트리폴리 해적들과 조약을 맺었지만 알제의 해적들은 여전히 미국에게 통행료 조로 공납을 요구했다.

1812~1814년에 미국은 영국과 전쟁(영미 전쟁)을 벌였다. 이 때 영국은 북아프리카 해적들을 부추겨 미국상선을 공격하도록 했다. 알제의 수령 하지 알리 데이가 18128월 지중해를 항해하던 미국 상선 에드윈호를 나포했다. 선원 11명도 인질로 잡혔다. 미국은 영국과 전쟁 중이어서 알제 해적집단에 즉각 대응하지 않았다. 181412월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은 북아프리카로 눈을 돌렸다.

미국 해군제독 디케이터 /위키피디아
미국 해군제독 디케이터 /위키피디아

 

18152월 미국 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은 트리폴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스티븐 디케이터(Stephen Decatur)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0척의 전함을 지중해로 파견했다. 역사가들은 1801~1805년의 전쟁을 제1차 바르바리 전쟁, 1815년의 전쟁을 제2차 바르바리 전쟁이라고 명명한다.

2차 바르바리 전쟁은 미국의 우월한 해군력으로 쉽게 알제를 제압했다. 디케이터의 전함은 1815520일 미국을 출발해 615일 지브롤터를 지났다. 이틀후 미국 함대는 스페인 해안에서 알제의 전함을 추격해 나포했다. 교전이 있었지만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미군이 4명 희생됐지만 알제군은 30명이 사망하고 406명이 붙잡혔다.

또다시 이틀후 알제의 함선을 발견해 교전을 벌였다. 적선은 한시간 총격을 벌였지만 이내 항복했다. 80명이 붙잡혔다.

6월말 디케이터의 함대는 알제 항구에 도착해 메디슨 대통령의 서신을 전달했다. 당시 알제에는 오마르 데이가 새로운 지도자로 막 즉위한 시점이었다.

미 해군은 함포외교를 벌였다. 항복할 것인지, 포격을 당할 것인지,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오마르를 압박했다. 오마르는 항복을 선택했다.

73일 양측은 협상을 타결했다. 오마르는 미국의 요구를 모두 들어 주었다. 오마르는 미국 포로 10명을 석방했고, 미국은 500명을 포로를 돌려주었다. 미국은 또 앞서 나포한 2척의 배를 돌려주고 배상금으로 1만 달러를 받았다. 북아프리카 해적집단에게 오히려 돈을 받은 것이다. 또한 앞으로 미국은 알제에 공납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도 받아들여졌다. 미국의 일방적 승리였다.

 

1815년 알제 항구를 포위한 디케이터의 미국 함대 /위키피디아
1815년 알제 항구를 포위한 디케이터의 미국 함대 /위키피디아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1815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빈에서 회의를 열어 전후 세계질서를 협의했다. 빈 회의에서 북아프리카 해적 근절에 관한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신생국이 두차례에 걸쳐 바르바리 해적들을 제압한데 대해 당시 유럽 열강들은 자극을 받았다. 신생국이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유럽 배후지의 깡패들을 제압하는데 유럽인들은 자국 국민들이 노예로 끌려가도 돈을 주고 석방시키는 정부의 태도에 불만을 드러냈다. 영국 해군 중위 출신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는 바르바리 해적 근절을 호소했고, 그의 주장은 유럽인의 정치판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영국은 빈 회의에서 몰타(Malta)를 얻었다. 몰타는 유럽 최남단 섬으로 이슬람 해적들이 수시로 노리는 곳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영국은 해군의 여력이 생기자, 몰타의 안전을 위해 북아프리카 해적 소굴에 대해 함포 외교에 나섰다.

영국 해군제독 엑스머스 경 /위키피디아
영국 해군제독 엑스머스 /위키피디아

 

1816년 봄, 영국은 해군제독 엑스머스(Exmouth) 경에게 바르바리 국가들과 외교를 벌이도록 전권을 맡겼다. 엑스머스 경은 중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트리폴리, 튀니스, 알제를 찾아갔다. 엑스머스는 영국 뿐 아니라 그리스, 사르데냐왕국, 시칠리아 왕국의 대리인도 겸했다.

엑스머스가 이끄는 영국 함대는 미 해군이 1년전에 함포외교를 벌인 알제에 유럽인 포로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요구했다. 이번에도 알제의 오마르는 지브롤터인, 몰타인, 사르데냐인을 석방했다. 엑스머스는 튀니스와 트리폴리에서도 기독교도의 석방을 요구했고, 그곳 수령들도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엑스머스는 트리폴리에서 유럽인들에 대한 노예 폐지를 약속받았다. 그리고 이 조건을 튀니스와 알제에게도 요구했다.

알제의 오마르 데이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바르바리 국가들에겐 지중해에서 노략질을 하면서 얻는 인질의 몸값과 통행료 조의 공납이 주수입원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중단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오마르가 영국의 요구를 거절하자 교섭은 난항에 봉착했다. 엑스머스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알제를 함포사격을 하갰다고 위협하자, 오마르는 영국인들을 모두 노예로 삼겠다고 응수했다. 거친 언성과 협박이 오갔지만 엑스머스는 포격을 자제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코르시카, 시칠리아, 사르데냐의 어민 2백여명이 알제령 안나바(Annabah)에서 산호 채취작업을 하다가 알제의 군대에 의해 학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유럽인들이 분노했고, 영국이 총대를 멨다. 영국은 포를 쏘지 않는 함포외교에서 포를 쏘는 함포외교로 전환했다. ,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미였다.

엑스머스 경은 다시 함대를 이끌고 알제로 갔다. 엑스머스의 함대에는 영국 15, 네덜란드 10척 등 모두 25척으로 구성됐다.

엑스머스는 오마르에게 기독교 포로를 전원 석방하고, 앞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오마르는 거절했다. 엑스머스는 1시간 내에 답변을 하지 않으면 포격을 가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던지고 함선으로 돌아왔다.

1816827일 영국과 네덜란드 전함이 9시간 내내 불을 뿜었다. 알제의 선박들이 무차별 파괴되고 요새도 허물어졌다. 오마르 데이는 후에 오스만투르크 술탄에게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끔찍한 포격이었다고 보고했다.

무차별 포격 후 엑스머스는 오마르에게 전과 똑같은 요구를 했다. 오마르는 엑스머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고 노예로 갇혔던 유럽인들을 전원석방했다. 이 때 풀려난 유럽인들은 영국 영사와 1,083명의 기독교도들이었다.

엑스머스는 트리폴리와 튀니스에도 문서를 보내 알제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곳의 기독교 포로들을 모두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1816년 영국·네덜란드 함대의 알제 팜포사격 /위키피디아
1816년 영국·네덜란드 함대의 알제 함포사격 /위키피디아

 

엑스머스의 원정으로 바르바리 해안에 잡혀 있던 기독교도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미국과 영국의 연이은 공격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일순간 잠잠해 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적들이 완전하게 소탕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 상선들은 여전히 약탈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또 수령의 통제에서 벗어난 해적들이 여전히 지중해에 출몰했다. 유럽 국가들이 바르바리 해적 퇴치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1818년 가을, 독일 아헨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대표들이 모여 빈 회의 이후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바르바르 해적의 근절에 관한 의정서를 채택했다. 5개국이 결의한 내용에는 바르바리 국가들이 해적 행위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유럽이 공동으로 행동에 나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5개국은 이 의정서를 오스만투르크와 북아프리카 국가들에게 통보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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