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아프리카 해적의 종언④…파리채가 부른 전쟁
北아프리카 해적의 종언④…파리채가 부른 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4.29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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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프랑스의 알제 침공으로 바르바리 해적 근절…식민지 시대

 

18181120일 독일 아헨에서 유럽 열강 5개국이 북아프리카 해적 근절에 관한 의정서를 채택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의정서 서명에 참여했지만, 실행은 당대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에 위임되었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 전쟁에서 서로 적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바르바리 해적 퇴치에는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알제의 후세인 데이 /위키피디아
알제의 후세인 데이 /위키피디아

 

1819년 여름, 영국은 해군 제독 프리맨틀(Thomas Fremantle), 프랑스는 해군제독 피에르 주리앙(Pierre Jurien de la Graviere)을 각각 지휘관으로 지명해 북아프리카로 파견했다. 함선 8척으로 구성된 영불 연합군은 91일 알제에 도착했다. 알제의 수령은 후세인 데이(Hussein Dey)였다.

두 제독은 아헨 의정서의 내용을 통보했다. 지중해 상에서 활동하는 해적을 뿌리뽑고 상선의 자유로운 항해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후세인은 유럽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기를 바라지만, 유럽인들이 알제에 대한 모독과 부정을 할 경우에도 전쟁을 피할수 없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해적근절을 이유로 유럽이 알제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보았다. 후세인 데이는 영국과 프랑스 제독이 요구하는 해적 근절 각서에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924, 영국과 프랑스 함대는 튀니스에 도착했다. 튀니스의 마흐무드 베이는 해적의 근절을 요구하는 유럽의 저의를 의심했다. 마흐무드는 튀니스가 부정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튀니스 해군을 해적이라 불릴수도 없다고 주장하며 후세인과 같은 입장을 밝히면서 문서 서명을 거부했다. (데이와 베이는 오스만투르크가 지방수령에게 주는 작호인데, 지역에 따라 발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일하게 트리폴리의 데이만이 해적근절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다. 프리맨틀과 주리앙은 협상에 실패하고 돌아갔다.

 

프랑스 영사를 때리는 후세인 /위키피디아
프랑스 영사를 때리는 후세인 /위키피디아

 

북아프리카 해적의 근거지였던 알제, 튀니스, 트리폴리는 오늘날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다. 이들 나라가 오늘날에도 유럽과 미국 등 서방국가에 적대적인 것은 그 뿌리가 깊다.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종교적 대립에서 해적의 개념에 이르기까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두 대륙의 대립은 19세기초에도 이어졌다. 유럽에서 해적이라 부르는 무장세력은 바르바리 국가에선 정규해군이었다. 바르바리 국가들은 자국 해군의 해적 활동을 용인한 셈이다.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해적 근절은 북아프리카 토호세력들에겐 무장해제로 비춰진 것이다.

 

1824년 알제는 스페인 상선을 공격해 나포하고 선원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영국 대사가 후세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도시를 떠나 영국 함선으로 올라탔다. 영국 해군 제독 해리 닐(Harry Neale)은 알제를 해상봉쇄하고 도시에 포격을 가했지만 함대가 부족해 퇴각했다.

 

유럽인들을 모독한 결정적인 사건은 이른바 부채 사건(Fan Affair)이었다.

군주들이 쓰는 파리채 /위키피디아
군주들이 쓰는 파리채 /위키피디아

 

사연의 발단은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공화정 당시인 1795~96년 사이에 프랑스군이 유태인 상인을 통해 알제의 밀을 샀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스 정부는 군량미 대금을 갚지 않았다. 후세인 데이가 집권하고 유태인 상인에게 부채를 갚으라고 요구했다. 유태인 상인은 프랑스가 대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빚을 갚을 돈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유태 상인과 알제는 알제 주재 프랑스 대사 피에르 드발(Pierre Deval)에게 밀 값을 갚으라고 요구했지만, 공화정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샤를 10(Charles X)은 반역자들의 부채를 갚을 생각이 없었다.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드발의 조카 알렉산드르(Alexandre)가 알제의 지방도시 보네(Bône)의 영사로 부임해 협정을 무시하고 현지 프랑스 창고의 경비를 강화했다.

1827429, 알제의 궁정에서 후세인과 프랑스 영사 드발 사이에 거친 고성이 오갔다. 드발은 후세인의 요구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화가 난 후세인은 들고 있든 파리채(Fly-whisk)로 드발을 때렸다. 열대지방에서는 파리와 곤충을 쫓기 위해 파리채를 늘 소지하고 있는데, 이슬람 군주들은 자신의 상징으로 독특한 모양의 파리채를 만들어 사용했다. 파리채는 때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부채로도 사용했는데, 후에 유럽인들은 이 사건을 부채 사건이라 불렀다.

사건의 진상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 드발이 국왕 샤를에게 과대 포장해 보고했을 것이다. 샤를 10세는 분노했다. 한갓 이슬람 토호에 불과한 것이 프랑스 왕국의 대리인을 때렸다니,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1830년 프랑스군의 알제 성문 전투 /위키피디아
1830년 프랑스군의 알제 성문 전투 /위키피디아

 

프랑스 국왕은 해군에 명령해 알제 항구를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그 봉쇄는 3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의 봉쇄는 엄격하지 않았다. 알제 해적들은 봉쇄를 피해 여전히 해적질을 하고 다녔다.

1829년 프랑스는 새 영사를 알제에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영사가 부임하려 하자, 후세인은 해안 봉쇄중인 프랑스 함대에 포격을 가했다. 샤를 10세는 협상을 포기하고 알제를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1830614일 프랑스의 육군 소수병력이 알제 해안을 상륙했다. 며칠후 뒤페레(Guy-Victor Duperré)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6백척의 전함에 병력 37천명을 싣고 알제 해안에 밀려왔다. 후세인은 급히 예니세리 등을 동원해 1만명을 모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투는 오래가지 않았다. 75일 후세인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프랑스군은 후세인의 목숨을 살려두되, 이탈리아 나폴리로 추방했다. 후세인이 10여년전에 프랑스와 영국 제독이 왔을 때 예측한 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로써 해적 하이르앗딘 바르바로사(Hayreddin Barbarossa)가 알제를 점령해 1518년 오스만투르크 술탄 셀림 1세로부터 책봉받은 이후 312년만에 오스만투르크령은 프랑스의 손에 넘어갔다. 이후 프랑스는 130년 이상 알제를 식민통치했다.

 

1830년 뒤페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의 알제 공격 /위키피디아
1830년 뒤페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의 알제 공격 /위키피디아

 

알제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그해 8월 튀니스와 해적 근절을 골자로 하는 8개 항목의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의 알제 점령과 튀니스와의 조약 체결로 수백년간 지속되어온 바르바리 해적은 근절되었다. 유럽인들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이 해적 소탕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후 북아프리카 해안은 하나씩 유럽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881년 프랑스군은 36천명을 파병해 튀지니를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11년 이탈리아는 오스만투르크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리비아를 침략해 식민통치했다. 이들 세 나라는 2차 대전 전후에 모두 독립했다.

 

오늘날, 지중해에선 해적 출몰이 사라졌다. 다만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의 적대적 활동을 바르바리 해적에 비유되기도 한다. 2001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미국에서는 이슬람 테러세력을 바르바리 해적과 비유하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2011319NATO군은 리비아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공봉쇄령을 내리고 무아마르 가디피(Muammar] Gaddafi) 정권의 붕괴를 도왔다. 당시 미국과 영국 해군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110발이나 쏘았고, 프랑스, 영국, 캐나다 공군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를 무차별 공중폭격했다. 해상 및 공중 봉쇄는 19세기에 유럽 열강이 바르바리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는 카다피 제거작전을 3차 바르바리 전쟁’(Third Barbary War)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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