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니 중국 백자였네…국보 168호 자격 박탈
알고 보니 중국 백자였네…국보 168호 자격 박탈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4.29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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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74호, 278호 이어 세번째…장성 백양사와 상주 남장사 목조불상은 보물 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던 백자가 정밀 검증을 통해 중국 원()나라의 작품으로 판명되어 국보 자격을 잃게 되었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국보로서 위상과 가치 재검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국보 제168백자 동화매국문 병’(銅畵梅菊文 甁)에 대해 지정 해제를 예고했다.

지난 2018년 학계와 언론 등에서 국보 제168호에 대한 생산지(국적), 작품 수준 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중국과 한국도자사 전문가로 조사단을 구성해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이번 제2차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에서 충분한 논의 끝에 국보 해제가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백자 동화매국문 병진사(辰砂; 酸化銅; 銅畵)를 사용한 조선 전기의 드문 작품으로 화려한 문양과 안정된 기형(器形)이 돋보인다는 사유로 197474일 국보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국보 168호로 지정된 백자 동화매국문 병 /문화재청
국보 168호로 지정된 백자 동화매국문 병 /문화재청

 

하지만 실제 조선 전기 백자에 이처럼 동화(銅畵)를 안료로 사용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13~14세기 고려시대에 일부 유물의 문양에서 산화동 안료를 사용한 예가 확인되지만, 그 이후 보이지 않다가 조선 후기부터 근대기인 1820세기 초반 제작 백자에서 확인되고 있다. 최근까지 확인된 유물과 연구에 따르면 조선 전기에는 백자에 동화로 장식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국보 지정 당시에는 기형 등으로 보아 조선 전기 15세기 제작품으로 보았으나, 기형과 크기, 기법, 문양과 유사한 사례가 중국에서 유리홍(釉裏紅)’이라는 원나라 도자기 이름으로 다수 현존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이 작품도 조선 시대가 아닌 중국 원나라 14세기 경 작품으로 판단되고 있다. 유리홍(釉裏紅)은 도자기 유약밑 밑그림의 일종으로, 중국 원대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시작해 동계(銅系)의 안료를 쓰고 잇다. 환원염에 의해 홍색으로 발색해 유리홍이라는 명칭을 얻었고, 명대에는 진사(辰砂)라고 불렀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지정 기준에 의하면 외국 문화재일지라도 우리나라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있다. 그러나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출토지나 유래가 우리나라와 연관성이 불분명하고,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며,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재청은 국보 제168백자 동화매국문 병인류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래가 드문 것이라는 국보 지정 기준에 미흡할 뿐 아니라 국보로서 위상에도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워 해제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동안 국보자격이 박탈된 경우가 두 번 있었다. 국보 274호로 지정되었던 별황자총통(別黃字銃筒)은 사기극임이 확인되었고, 국보 278호로 지정되었던 조선 공신녹권은 진품이 나타나면서 각각 해제되었다.

 

왼쪽부터 백자 유리홍화문 병(영국박물관), 유리홍연화문 병(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백자 유리홍화문 병(북경수도박물관) /문화재청
왼쪽부터 백자 유리홍화문 병(영국박물관), 유리홍연화문 병(메트로폴리탄박물관), 백자 유리홍화문 병(북경수도박물관) /문화재청

 

한편 문화재청은 조선 17세기 불교조각 조성에 큰 자취를 남긴 조각승 현진(玄眞)의 가장 이른 작품인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5세기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문화재청은 두 불상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높이가 약 208cm에 달하는 대형 불상으로, 1607(선조 40) 조각승 현진(玄眞, 17세기 중반 활동)이 주도하고 휴일(休逸), 문습(文習)이 함께 참여해 완성했다. 현진은 17세기에 가장 비중있게 활동한 조각승(彫刻僧)으로, 이 불상은 그가 제작한 불상조각 중 지금까지 연대가 가장 앞서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불상의 대좌 밑 묵서(墨書, 먹으로 쓴 글)에 의하면, 백양사 불상은 왕실의 선조들인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명복을 빌고 성불(成佛)을 기원하며 만든 것으로, 1607년이라는 제작시기로 미루어 보아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등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지나지 않은 1610년 전후로 이루어진 불교 복구 과정 중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대한 규모에 긴 허리,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신체의 굴곡에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 주름, 안정된 자태 등에서 초창기 작품임에도 현진의 뛰어난 조각 실력과 더불어 17세기 불교조각의 새로운 경향을 선도한 시대적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아울러, 자연스런 신체표현이 가능한 이유 중 하나로 목조(木造)와 소조(塑造) 기법을 조합해 만든 제작 방식을 주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조불상을 만들 때에는 나무를 쪼아 전체적인 형체를 만든 후 좀 더 입체적이거나 현실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부분적으로 진흙 등을 사용한 소조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백양사 불상 역시 주된 재질은 목조지만 진흙으로 보강한 사실이 과학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선 후기 대표적 조각승 현진의 작품 중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불상이자, 그의 활동 지역과 작품 세계, 제작 기법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예술 가치가 뛰어나다. 또한, 1741(영조 17)1755(영조 31)에 작성된 중수발원문(重修發願文)을 통해 개금(改金, 불상에 금칠을 다시 함)과 중수한 내력, 참여 화승(畵僧)들의 명단과 역할을 알 수 있어 학술적 의미 역시 크다. 이러한 이유로 불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대좌(臺座)와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문화재청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문화재청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

조선 전기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으로, 남장사 내 부속사찰인 관음선원에 봉안(奉安)되어 있다. 이 관음보살좌상 뒤에는 보물 제923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아미타여래설법상(尙州 南長寺 木造阿彌陀如來說法像)’이 놓여 있어 가치와 화려함을 더한다.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의 경우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등 관련 기록이 부족해 정확한 제작 시기는 확정할 수 없으나, 귀족풍의 단정한 얼굴과 어깨와 배에 멋스럽게 잡힌 옷 주름, 팔꿈치에 표현된 ‘ῼ’형 주름,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 주름 등 15세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15세기 불상이 지극히 드믄 현실을 고려하면, 남장사 관음보살좌상은 이 시기 불교조각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품이다. 아울러 관련 기록을 통해 1819년 인근 천주산(天柱山) 상련암(想蓮庵)에서 남장사 관음선원으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위와 개금과 중수 등 보수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불상의 역사성 또한 인정된다.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조선 전기 불상이라는 점에서 희소성이 있고 제각 수준이 뛰어나 우리나라 불교조각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 /문화재청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목조관음보살좌상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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