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대공황②…전쟁 후유증에 커지는 기형아
1929 대공황②…전쟁 후유증에 커지는 기형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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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전쟁배상금에 독일 파탄…막대한 전쟁채권 상환금, 미국 유입

 

미국 경제학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과 폴 사뮤엘슨(Paul Samuelson)19695월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후에 모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받은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였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프리드먼은 단 하나를 꼽으며 미국이 금융정책을 실시하는데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에 비해 사뮤엘슨은 일련의 역사적 우발사건이 세계 공황으로 귀결되었다고 말했다.

두 거두의 논박은 후에 경제 저널에서 즐겨 회자되었다. 어느 누가 맞고 틀린 대답이 아니었다. 프리드먼은 미국이란 일국의 화폐요인에 초점을 맞추었고, 사뮤엘슨은 범세계 차원의 여러 사건들이 복합적으로 대공황을 초래한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세계 대공황에 대한 시각은 여러 가지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50년 주기의 콘드라티에프(Kondratieff) 장기순환의 불황과 9년 주기의 주글라(Juglar) 중기 불황, 단기인 키친(Kichin) 주기가 동시에 겹쳐 대공황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펼쳤다.

대공황 초기에 재임한 미국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은 유럽에 그 이유를 댔다. 후버는 퇴임후 회고록에서 유럽이 1차 대전에 대한 조정에 실패했기 때문에 금융위기로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미국이 전쟁 채무를 탕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 곤경에 처했고, 유럽에서 회수한 대금이 미국의 증시 거품을 초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외에도 미국에서 부()가 과도하게 부유층에게 집중되어 저소득층의 소비력이 줄어들어 불안정성을 노출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에선 최부유층 5%의 소득비중이 1920년대에 25.8%에서 31.9%로 늘어났는데, 이는 다수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좌파적 시각은 후버 시기에 고임금유지정책, 루즈벨트 시기에 고용보장정책으로 나타난다.

결정적 과오는 미국과 유럽 각국이 금본위제도에 과도하게 집착했다는 사실이다. 프리드먼과 같은 화폐이론가들의 주장대로 미국과 유럽열강은 1차 대전 이후 헝클어진 경제를 수습하고자 금()을 기준으로 하는 통화제도로 북귀하는 과정에서 경제질서의 왜곡을 심화시켰다. 이후 공황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금본위제라는 틀을 유지하느라, 통화정책의 실패를 범했다. 오늘날 경제학계에서는 금본위제가 대공황의 퍼펙트 스톰을 불러일으킨 주요인이라는 견해에 대체적인 합의점이 형성되고 있다.

 

밀튼 프리드먼(왼쪽)과 폴 사뮤엘슨 /위키피디아
밀튼 프리드먼(왼쪽)과 폴 사뮤엘슨 /위키피디아

 

대공황의 원인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잉태된다. 10년간 진행된 여러 사건들이 세계 각국의 경제를 왜곡시켰고, 마침내 그 기형아는 10년후에 거대한 괴물로 나타나게 된다.

1914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의 참전국들은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금본위제를 이탈했다. 교전국들은 새로운 통화를 찍어내면서 전쟁물자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으로 달려 갔다.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 유럽 국가들은 미국에서 탄약과 무기, 보급물자를 구입하고 대금으로 금을 가져다 주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순채무국이었던 미국은 전쟁 중인 1916년에 순채권국으로 전환되었다. 전쟁전 1913년에 미국의 금보유량은 129천만 달러로 전세계 보유량의 26%를 차지했는데, 1918년에 미국은 266천만 달러의 금을 보유해 전세계 금의 40%를 확보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18년 스페인 독감이 퍼져 전세계에 수천만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전쟁후 호황을 막지 못했다. 1920~1921년 사이에 짧은 불황을 거쳐 미국은 장기호황을 맞게 된다.

 

1920년대 미국의 전반적인 호황에도 불구하고 농업 부문은 하락기를 맞았다. 전쟁 기간에 유럽의 농업이 생산을 중단하게 되자 미국, 캐나다, 라틴아메리카가 생산을 늘려 유럽에 수출했다.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농지가격도 올랐다. 미국 농민들은 농지를 담보로 돈을 빌렸고, 은행들도 농지의 담보가치를 높게 매겨 흔쾌히 대출을 늘려 주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유럽과 러시아의 농부들이 경작을 재개하면서 신대륙으로부터 곡물 수입을 줄이거나 중단하게 되었다. 1920~1921년 사이에 미국 곡물가격이 53%나 폭락했다. 농장의 담보가치도 폭락하고 농민들은 빚더미에 올라서게 되었다. 빚을 갚지 못하는 농민은 파산을 신청했고, 농촌 은행들의 수익성은 악화되어 갔다. 대공황기에 농촌의 은행들이 집단으로 도산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석탄산업도 침체의 늪에 빠졌다. 전후 유럽의 수요가 급감한데다 석유라는 신에너지가 개발되면서 석탄 가격은 폭락했다. 섬유, 신발 산업도 침체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런 산업의 쇠락은 자동차, 가전, 전력, 석유 등 신산업의 성장에 의해 상쇄되었다. 미국은 옛 산업이 퇴진하고 신산업이 성장시키는 급변하는 산업 교체에 있었기 때문에 빠른 성장력을 회복했다.

 

1920년 전쟁배상금으로 뜯겨 가는 기계가 열차에 실려 있다. /위키피디아
1920년 전쟁배상금으로 뜯겨 가는 기계가 열차에 실려 있다. /위키피디아

 

전후 최대 국제이슈는 전쟁배상금 징수였다.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국토가 가장 많이 유린된 프랑스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독일에게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두 번이나 전쟁배상금을 갚은 뼈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악착같이 덤벼들어 7억 프랑을 받아갔다. 1871년 프로이센은 파리를 점령한 후 50억 마르크를 징수했다. 이번엔 프랑스가 받아야 할 차례였다.

1921년 국제적인 배상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승전국들은 천문학적 금액인 1,321억 마르크(310억 달러)의 금을 내놓으라고 독일에 요구했다. 독일이 영구히 일어서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이때 미국은 전쟁배상금을 받지 않을 것이며, 대신에 유럽 국가들이 전쟁 중에 빌려간 채무를 갚을 것을 요구했다. 배상위원회는 독일이 1921년부터 매년 40억 마르크씩 500억 마르크가 될 때까지 갚고, 나머지 820억 마르크는 독일의 지급능력이 있을 때까지 연기하는 것으로 낙착했다.

독일이 한해에 갚아야 할 배상금은 연간 총수출액의 80%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원자재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은 매년 40억 마르크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 등 승전국들은 미국에 채무를 갚기 위해서도 독일에게서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일은 가뜩이나 산업시설이 폭격을 맞아 파괴된 상태에서 전쟁복구는커녕 배상금을 갚을 길이 없었다. 독일 정부는 줄게 없으니 프랑스 복구사업에 독일 노동자를 데려가 부리라고도 했다. 프랑스는 국내 민족감정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받기 위해 독일 산업시설의 기계도 뜯어갔다.

독일은 금이 바닥나면서 재정적자에 휘말렸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은 중앙은행(Reichsbank)에 지폐를 찍어내라고 명령했고,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부추겼다. 전쟁 직후인 19191월 미국 달러화에 대한 마르크(지폐) 환율이 1달러당 8.9마르크였으나, 19221190.8, 19226350, 1922104,500, 19231, 16,000, 19231142천억으로 수직상승했다.

독일을 배 째라고 덤벼들었다. 금이 없으니, 휴지조각이라도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1923111일 프랑스와 벨기에는 군대를 투입해 독일 석탄 주산지인 루르(Ruhr) 지방을 점령했다. 배상금으로 석탄 현물을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프랑스와 앙숙관계에 있는 독일인들이 저항했다. 루르 지방의 독일 기업과 노동자들은 소극적인 저항으로 사보타지를 했고, 19243월엔 철강회사 크루프에서 유혈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독일인의 분노를 샀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나찌를 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프랑스와 벨기에 군은 2년후인 19258월에 루르지방에서 철수하고 만다.

결국 프랑스가 의도한 배상금 징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미국의 찰스 도즈(Charles Dawes)의 주도로 배상금을 깎는 협상이 전개되고, 두 차례의 배상금 감액 조치에 이어 1931년 배상금지급 모라토리엄이 선언된다.

 

1차 대전후 전쟁채권 규모 /김현민
1차 대전후 전쟁채권 규모 /김현민

 

미국은 전쟁배상금과 전쟁채권을 분리했다. 독일에게는 전쟁배상금을 포기했지만 유럽 국가에 빌려준 전쟁채권의 상환을 요구했다.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은 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에 돈을 빌렸다. 영국은 전쟁채권을 탕감하자고 제의했지만, 미국은 전쟁 채권이 상업상 거래이므로 승전·패전과 상관없다고 주장했다. 뉴욕 월가 뱅커들은 채무를 이행하지 않는 나라에는 추가로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결국은 유럽의 승전국들은 독일에게서 받은 배상금을 미국의 전쟁채권 상환에 썼다. 유럽의 승전국들은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독일에서 20억 달러에 가까운 배상금을 받았지만, 이중 상당부분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돈은 뉴욕 월가로 흘러가 증권시장에 유입되었다. 1920년대말 뉴욕 증시의 고공행진은 산업의 발전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유럽의 채무상환자금이 흘러들어 온 것도 일조했다. 뉴욕은 런던을 제치고 세계 금융중심지가 되었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위키피디아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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