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 대공황③…국가이익 앞세운 금본위제 복귀
1929 대공황③…국가이익 앞세운 금본위제 복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5.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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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유럽의 금본위제 전환…영국과 프랑스의 치열한 통화절하 경쟁

 

금본위제(Gold standard)는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고정시키는 제도다. 금은 무겁기 때문에 결제수단으로는 불편하다. 따라서 국가의 면허를 받은(charterd) 은행들이 금을 보유하고 은행권(지폐)을 발행하는데, 지폐 소지자는 언제라도 은행에 금으로 교환하도록 요구할수 있다. 1차 대전 이전의 금본위제도 하에서 미국 달러는 1온스당 20.67달러, 영국 파운드는 1온스당 4.25파운드였고, 1파운드는 4.86달러에 교환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화폐질서를 교란시켰다. 1차 세계대전 기간에 유럽 교전국은 금본위제도를 이탈했다.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보유한 금보다 많은 지폐를 찍어냈고, 돈의 가치는 하락했다. 파운드는 1920년말에 3.40달러로 전쟁 전에 비해 30% 정도 평가절하되었다. 또 유럽국가들자국의 보유금을 주고 미국에 군수물자를 사들이는 바람에 미국의 금보유량이 전쟁 전에 비해 두배나 늘어 전세계 금의 40%를 확보하고 있었다.

전쟁을 전후로 각국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미국은 금보유량이 늘어 통화가 팽창해 1919년 물가가 전전인 1913년에 비해 두 배나 뛰었다. 유럽의 참전국들은 금보유량보다 많은 지폐를 찍어내 미국보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13~1919년 사이 영국의 물가는 2.5, 프랑스는 3, 독일은 8배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패전국 독일은 1922~1923년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금괴 /위키피디아
금괴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고 유럽 참전국들은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문제를 논의했고, 금본위제도의 틀을 유지해온 미국도 유럽에 화폐제도의 복귀를 요구했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1차 대전 직후만 해도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영제국이 여전히 태양이지지 않는 나라이고, 런던의 시티가 뉴욕에 빼앗긴 세계금융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서둘러 금본위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18년 영란은행 총재 월터 컨리프(Walter Cunliffe)가 주재한 회의(컨리프 위원회)에서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금본위제 복귀를 확정했다. 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그들은 위신과 신조, 거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했다. 후세의 평가자들은 영국 중앙은행의 이런 결정에 대해 손상된 자존심의 복귀이며, ‘금본위제에 대한 신앙적 결단이라고 규정지었다.

문제는 언제 복귀하며, 통화가치 비율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였다. 금본위제 복귀를 결정해 놓고도 영국은 현실의 문제로 인해 실행을 지연시켰다. 당장 금이 모자랐다. 유럽국가들은 과도적 조치로 자유변동환율에 합의했다. 그러자 파운드화는 3.81달러로 급락하고 독일 마르크, 프랑스 프랑화는 더 큰 폭으로 하락했다.

192411월 영국 우월론자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재무상이 되었다. 그는 금본위 복귀론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1925514일 입법과 동시에 금본위제로 복귀시켰다. 환율은 전쟁 전의 비율인 4.86달러로 결정했다.

영국의 복귀에는 미국이 도왔다. 미국 연준(Fed)1924년에 금리를 내리고 영란은행은 금리를 올려 금리 격차(arbitrage)에 의해 달러가 파운드로 교환되고, 미국의 금이 영란은행으로 흘러 들어갔다. 게다가 프랑스의 루르 점령과 독일의 파산 위기로 인한 혼란을 피해 유럽의 자금이 영국으로 모인 것도 영국의 금본위제 재정착을 도왔다.

 

미국 금보유액과 금가격 추이 /위키피디아
미국 금보유액과 금가격 추이 /위키피디아

 

하지만 이 위대한 대영제국주의자 처칠을 흔든 것은 프랑스였다. 전쟁에서 영국과 손잡았던 프랑스는 돈의 문제에선 자국이기주의를 발동시켰다.

영국이 금본위제로 돌아가면서 정한 환율은 고평가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프랑화를 저평가하면서 어렵게 확보한 영국의 금이 둑이 무너지듯 프랑스로 흘러들어갔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영국이 금본위제로 돌아가자 세계 각국은 금본위제 복귀를 서둘렀다. 그러나 금이 미국과 영국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금이 부족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방안이 금 이외에 미국 달러와 영국 파운드를 동시에 교환(태환)하도록 하는 금환본위제(gold exchange standard)였다. 1922년 국제연맹에 의해 승인된 금환본위제는 금본위제의 변형으로, 미국과 영국이 절대적으로 금을 확보해야 하는 맹점이 있었다. 여러 나라가 자국이 보유한 달러와 파운드를 금으로 교환해달라고 요구하면 시스템이 붕괴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배상금으로 전후 복구를 하겠다고 기대했다가 독일이 배상금을 갚지 못할 상황이 되자 단기차입금을 조달했다. 정정도 불안해 19249월부터 19269월 사이에 정부가 10차례나 바뀌고 재무장관도 10명이나 교체되었다. 누구도 금본위제 복귀를 책임지지 않았고, 단기채무를 장기채무로 전환하는 것을 받아주는 은행도 없었다.

프랑화의 통화가치는 급속하게 떨어졌다. 전쟁 전에 1파운드당 25프랑, 1달러당 5프랑이던 돈 가치가 1928년에는 1파운드당 124프랑, 1달러당 25.41프랑으로 하락했다. 전쟁전보다 프랑화는 5분의1가치로 떨어진 것이다. 파운드는 프랑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과대평가되고, 프랑은 과소평가되었다. 프랑스 수출품은 가격경쟁력이 생겨 잘 팔리고 영국의 금이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프랑스의 외환보유액은 192611530만 파운드에서 19272월에 2천만 파운드, 4월에 6천만 파운드, 5월말에 16천만 파운드로 급팽창했다.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가 1928년에 뒤늦게 금본위제로 전환하기 위해 보유 파운드를 매각해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영국이 보유한 금은 바닥을 드러내고, 프랑스 은행에 금이 쌓여 갔다. 마침내 영국은 프랑스에 파운드를 금으로 태환하는 것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영국은 만일 프랑스가 거부한다면 전쟁 때 빌려준 채권을 회수하겠다고 위협했다. 프랑스는 파운드화 매각을 중지했다.

19277월 미국 Fed는 유럽의 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재할인율을 인하했다. 이 조치는 영국으로 금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취해졌는데, 그 파장은 다른 곳으로 나타났다. 미국내 유동성이 많아지면서 주식시장의 상승세를 자극했다.

 

뉴욕 Fed 지하의 금 보관 창고 /NY Fed 홈페이지
뉴욕 Fed 지하의 금 보관 창고 /NY Fed 홈페이지

 

19286월 프랑스도 금본위제로 복귀했는데, 환율은 1파운드당 120프랑이었다.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대영제국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성급하게 금본위로 복귀한 영국 통화는 고평가되고, 상황을 신중히 재다가 복귀한 프랑스 돈은 저평가되었다. 각국의 이기주의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또 독일에서 배상금을 기다리다 포기한 벨기에도 적자예산을 편성해 지폐를 발행하면서 저평가된 상태에서 금환본위로 돌아섰고,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도 저평가된 환율로 금환본위로 복귀했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금환본위제로 복귀하는 것을 도왔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주식시장도 과열되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2018년초 미국 중앙은행(Fed)은 재힐인율을 3.5%에서 4%로 인상하고 시장 조작을 통해 금의 유출을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Fed는 이어 19287월에 재할인율을 5%로 인상하고, 그해 하반기와 1929년 초에 공개시장에서 증권을 매각해 추가로 통화긴축조치를 취했다.

금리인상이 뉴욕증시의 열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히려 고금리가 해외자금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다우존스 지수는 1928년초 191에서 그해말 300으로 치솟았고, 이듬해인 19299월에 381까지 올라갔다. 하루 거래량은 19283400만주에서 그해 11690만주, 19293820만주로 1년 사이에 두배 이상 증가했다.

 

공황은 미국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27년 동남아시아에서 경기 위축의 조짐이 보였고, 1928년에는 독일이 불황에 빠졌고, 1929년초엔 폴란드, 아르헨티나 캐나다의 경제가 위축되었다. 증권시장은 독일에서 1927년에, 영국은 1928년 중반에, 프랑스는 19292월에 하강하기 시작했다. 1929년 중반엔 뉴욕증시만 현기증 나게 오르고 있었다.

로이 영(Roy Young) Fed 의장은 그해 2은행들이 투기를 조장하는 주식 중개인들에게 대출을 억제하지 않으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29년 하반기 들어 통화긴축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고 경기 위축의 신호가 나타났다. 뉴욕증시의 다우존스 지수는 1028, 29일 이틀간 대폭락하며 23% 하락했다.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뉴욕 Fed 지하의 금 보관 창고 /NY Fed 홈페이지
뉴욕 Fed 지하의 금 보관 창고 /NY Fed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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